사회, 역사, 인간 그리고 뉴질랜드

세상 이야기

행복에 대한 전체론적 접근을 생각하다 - 부탄을 중심으로

김 무인 2022. 3. 31.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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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지난 3월 18일, UN 산하 기구인 Sustainable Development Solutions Network (SDSN)(한국 미디어에서는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라고 번역해서 사용하는데 입에 잘 감기지 않는다)에서 ‘2022년 세계 행복보고서’(World Happiness Report 2022)를 발표했다. 2012년에 처음 등장한 이 보고서는 따라서 올해 10주년을 맞이한 셈이다. 이 행복보고서 혹은 행복 지수(Happiness Index)는 히말라야산맥 중턱에 위치한 작은 나라 부탄이 물질적으로 풍요하지 않지만,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는 전설 같은 소문과 더불어, 많은 이에게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목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지표로 여겨지는 듯하다.  

 

 

이번 발표된 보고서의 각 국가 행복지수 순위에는 나의 관심을 끄는 대목이 몇 있다. 가령, 아예 조사 자체가 수행되지 않아 순위에 포함되지도 못한 그 전설의 부탄, 9위에 자리 잡은 이스라엘, 59위에 자리 잡아 살짝 높은 일본과 더불어 OECD 국가 중 최하단부에 위치한 한국  등.  아래 글은 이 행복지수를 보면서 드는 이런저런 생각들이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부탄?

 

UN이 2012년부터 각 국가 국민의 행복 정도를 측정하는 수단을 도입해서 행복보고서를 발표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역추적 과정은 흥미롭다. 당시 반기문 사무총장의 UN은 이전 해인 2011년에 ‘Happiness: Towards a Holistic Definition of Development’(행복: 발전에 대한 전체론적 정의를 향하여)라는 결의안을 채택한다. 이 결의안에서 천명된 행복에 대한 전체론적 정의를 위해 SDSN은 부탄이 2008년부터 도입 실행한 Gross National Happiness(GNH)(국민총행복) 지수를 결정적으로 인용/참조한다. 국민의 총체적 안녕과 행복을 위한 새로운 측정 수단의 개발은 물질적 풍요를 일정 단계까지 이룩하고 그다음 단계로 정서적 행복을 추구하려는 선진국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2012년 당시 인당 GDP가 US $2,538.95 (구매력 기준 US $9,084)에 불과한 후발개발도상국 부탄이 개발한 모델을 받아들인 것이다. (부탄의 인당 GDP는 지금도 100위권 밖이다). 

 

많은 사람이 경외심 혹은 최소한 경이로운 시선을 갖고 부탄을 대하는 것이 이 대목이다. 덕분에 부탄은 어느덧 물질적 풍요함에 초연한 채 정신적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되었다. 특히 부탄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국가로 선정되었다는 한국 미디어의 근거 없는 발표들은 한국에서 이 신화 창조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가령, YTN의 보도, 한국경제신문 기자의 블로그 그리고 한국일보 기사가 그 실례다. YTN은 부탄이 세계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다는 근거를 아예 제시하지 않았으며,  두 신문 기자는 영국의 싱크탱크인 신경제 재단(New Economics Foundation: NEF)이 2010년에 발표했다는 ‘행복지수’를 근거로 대었다. NEF가 개발한 각 국가 행복측정 수단인 Happy Planet Index(HPI)는 정확히 번역하자면 ‘행복지수’가 아니라 ‘행복한 지구지수’이다. 

 

 

현재 각각의 국가 행복지수를 측정하는 수단으로 UN이 발표하는 ‘세계행복보고서’ (World Happiness Report)가 표준이 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전 2006년부터 행복의 주관적 그리고  환경적 측면 등을 반영하여 조사 결과를 발표해 온 NEF의 Happy Planet Index도 여전히 인용된다. 그러나 부탄은 자국민의 행복 정도를 파악하는 자체 측정 모델인 Gross National Happiness(GNH)(국민총행복)을 참고해 만든 UN의 ‘세계 행복보고서’에서도 최고 순위를 기록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것은 물론, NEF의 Happy Planet Index에서도 최고 순위를 기록한 적이 없다. 위 기자들은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기사를 썼는지 모르겠으나, 두 기자의 문장 구성이 매우 유사함에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부탄은 2006년 Happy Planet Index에서 13위, 2009년에는 17위, 2012년에는 아예 순위에 없었으며 2019년에는 127위를 기록했다. UN이 만든 ‘세계행복보고서’에서도 2015년에 처음 순위에 포함되어 79위, 2016년 84위, 2017년 97위, 2018년 97위, 2019년 95위 그리고 2021년부터는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순위에 집계되지 않았다.  부탄이 행복한 국가로 세계적 차원에서 알려진 것은 2006년 Business Week에서 개인 기고가가 부탄을  “Happiness Factor”에서 세계 Top 10으로 인정한 것이 가장 두드러질 뿐이다. 

 

영국 미디어 Guardian의 온라인판 Opinion 화면 좌측에 인상적인 글귀가 있다. “Comment is free…but facts are sacred” (의견을 남기는 것은 자유나 사실은 존중받아야 한다). 1921년 편집자 C. P. Scott가 남긴 글이다. 행복 관련하여 글을 쓸 때 부탄은 위에서 언급한 극적 요소 때문에 독자의 흥미를 끌기 위한 소재로 적합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저널리즘의 창의성은  ‘팩트’에 기반을 둔 사회학적 상상력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한국 온라인 미디어뿐만 아니라 블로그에서도 참고/인용 자료의 링크 기능 활성화를 강력히 권장한다. 영어판 위키피디아와 한국어 나무위키를 내가 애용하는 것도 잘 활성화된 링크 기능 때문이다. 

 

 

장황하게 부탄을 격하(?)한 것은 일부 한국 미디어의 팩트 체크 미비를 꼬집자는 것도, 부탄이 알려진 것보다 행복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도 아니다. 부탄의 역대 국왕(4대와 5대)이  ‘국민총행복’지수라는 것을 창의적으로 만들면서까지 ‘자국민’의 행복에 대한 전체론적 접근을 시도했듯이, 부탄을 비롯한 ‘세계 모든 국가와 국민’의 행복에 대한 전체론적 접근을 시도하기 위한 사전 우상 파괴 작업일 뿐이다. 국민 행복에 대한 부탄 정부의 전체론적 접근의 이상과 현실에 대한 비판적 접근은 21세기에 유행처럼 각광받는 국가별 행복지수에 대한 냉철한 평가의 시금석을 우리에게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부탄의 철학자 국왕들?

 

21세기, 전 세계 국가 정책에 큰 영향을 끼친 행복에 대한 전체론적 접근을 현대적 의미에서 처음 시도한 부탄 국왕들의 시도는 매우 인상적이다. UN이 2012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세계행복지수’의 원형 개념과 철학적 기반은 그로부터 무려 40년 전인 1972년, 4대 국왕 지그메 싱계 왕축(Jigme Singye Wangchuck)에 의해 마련되었다. 그는 “국민총행복이 국민총생산보다 중요하다”(Gross National Happiness is more important than Gross Domestic Product)라는 지금 돌이켜 봐도 감탄을 자아내는 유명한 선언을 했다. 이 선언을 발표할 당시 그는 고등학생 나이인 17세에 불과했다. 부탄 근대화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아버지 선왕 지그메 도르지 왕축(Jigme Dorji Wangchuck)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왕위를 물려받은 그해에 발표한 것이다. 미국 경제학자 Richard Easterlin이 소득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이후 물질적 풍요가 증가해도 행복은 증가하지 않는다는 이스털린의 역설(Easterlin paradox)을 발표한 1974년보다 2년이나 이른 시점이었다. 

 

5대 국왕 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축과 4대 국왕 지그메 싱계 왕축

 

지그메 싱계 왕축의 국민총행복 개념은 그의 아들이자 5대 왕인 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축(Jigme Khesar Namgyel Wangchuck)에게 이어져, 2008년 입헌군주국으로의 전환과 동시에 ‘국민총행복지수’(Gross National Happiness Index)는 부탄 헌법에 명시되기에 이른다. 부탄의 국민총행복 개념이 정립된 1972년에, 소수 재벌 주도에 의한 경제적 풍요에 국가의 사활을 걸면서 이를 핑계로 유신 독재가 시작된 한국과 대조된다.  

 

부탄의 국민총행복(GNH)은 4개의 큰 축(pillar)으로 이루어졌다. 

 

  1. 지속 가능하고 공평한 사회-경제 발전
  2. 환경 보존
  3. 문화의 보존과 발전
  4. 올바른 통치

 

가난에서 탈출하기 위한 몸부림에 자연환경 보존이나 사회구성원에게 공평한 발전 따위는 상상조차 못 한 1970년대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의식의 격차가 있다. 또한 21세기, 어쩌면 세계 각국의 정책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을 용어,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을 이 시기에 행복의 핵심 개념으로 인지했다는 것은 획기적 패러다임의 전환과 선구적 통찰력이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오늘날 일상이 된 ‘기후변화(climate change)’ 혹은 ‘지구온난화(global warming)’ 용어도 1980년대에서나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 블로그에서도 다룬 적이 있는 생태사회주의(eco-socialism)를 반세기 전부터 이 히말라야 소왕국의 철학자 왕들은 이미 지향한 것처럼 보인다. 특히, 인간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자연 속에서 관계적으로 존재한다는 인식은 대단한 유사점을 보여주고 있다. 

 

부탄의 국민총행복(GNH) ​

 

많은 학자는 부탄 국왕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이 ‘국민총행복’ 개념과 그 축들의 기원을 불교 철학의 중도(中道; The Middle Path) 개념에서 찾는다. 치우치지 않는 바른 도리를 일컫는 중도는 석가모니의 깨달음 과정에서 유래했다. 출가 전 왕궁에서의 물질적 풍요에도 행복하지 못한 그는 출가 후 행한 고행 역시 그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출가 전 육체적 물질적 쾌락이나 출가 후 육체적 물질적 고난과 같은 한편에 치우친 극단적 방식으로는 진정한 행복(깨달음)을 얻을 수 없으며, 오직 심신의 조화, 즉 정신과 육체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중도에서만 진정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국민총행복’과 관련하여 중도는 다음처럼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 “물질적 편안과 사회의 정신적, 감정적 그리고 문화적 필요 간 조화로운 균형을 달성하기 위한 다면적 발전 접근 방식.” 

 

불교 국가 부탄은 과거부터 이 중도 철학을 행복 개념에 적용했다. 17세기 법전도 인간 사회와 자연과의 공존 속에 국민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정부의 존재 목적이라고 규정했다. ‘국민총행복’ 개념과 철학은 이런 불교적 가르침 그리고 1952년 이후 지금까지 집권한 세 명의 역대 국왕이 모두 어릴 때 유럽 혹은 미국에 유학하면서 수용한 유럽식 합리주의의  합작품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불교의 전체론적 철학을 기반으로 서양식 정책 기법을 활용한 것이 현재 부탄의 ‘국민총행복지수’(GNH Index)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지수를 개발한 부탄연구센터(Centre Bhutan Studies)도 개발 과정에서 옥스퍼드 대학의 도움을 받았다. 



부탄의 진정한 문제는?

 

이렇게 큰스님처럼 정신과 물질의 지속 가능한 조화로운 발전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화두를 세계 중생 국가에 던진 부탄이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Happy Planet Index(행복한 지구지수)의 초기  몇 년을 제외하고는 UN의 세계행복보고서에서도 100위권을 맴돌거나 아예 조사가 안 되어 순위에 없기도 하다.  “바보야, 경제 성장이 전부가 아니야!”라는 화두를 세계에 던지는 데는 성공했지만, 부탄 스님 역시 자신의 머리를 깎는 데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듯하다. 가난하지만 행복한 나라라는 부탄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은 당황스러운 위 순위 외에도 많다. 

 

실업률의 증가로 청년들이 수도인 팀부(Thimphu)로 모여들면서 범죄가 폭증하고 있다.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자랑하지만 문제는, 그 질과 실속이다.  Bhutan 2020: A Vision for Peace, Prosperity and Happiness에 따르면 부탄 인구의 절반 가까이는 여전히 문자와 숫자 문맹이며 학교 중퇴와 유급률이 높다. 의료시스템은 숙련된 의료 인력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국가 의료비 지출의 증가를 세수 증가가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여성 인권 경시 풍조는 심각한 수준이다. 수도 팀부의 여성을 상대로 한 2007년 서베이에서 응답자의 77%는 폭력을 경험했으며, 2010년 서베이에 의하면 15세~19세 여성의 68%는 남성의 폭력을 수용할 수 있다는 대답을 했다. 2013년에 가정폭력 예방법이 제정되었지만, 문제는 법이 아니라 전반적 사회 분위기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다룬 2017년 정부 연구를 따르면, 15세~64세 여성의 38.3%는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전통적 믿음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그리고 2010년 조사 때보다 낮아졌지만, 응답자의 53.3%는 여전히 남편이 아내를 때릴 수 있다고 답했다.  

 

이렇게 여성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 만연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국민총행복’ 개념을 설파한  4대 국왕  지그메 싱계 왕축이 친자매 4명을 동시에 아내로 맞이한 일부다처 행각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인지 모른다. 나무위키를 따르면 국왕은 큰언니랑만 결혼하려고 했는데 큰 언니가 우겨서 밑에 동생 자매들과 어쩔 수 없이 같이 결혼했다는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 식의 가십이 있다. 그런데 이 가십이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성의 행복이 남성에 의해 좌우되는 사회라면 왕에게 좌우되는 것이 그나마 나을 수 있기 때문이다. 

 

4대 국왕 지그메 싱계 왕축과 모두 친자매인 그의 아내들

 

국민총행복을 주창한 부탄 4대 국왕 지그메 싱계 왕축의 본질적 한계 그리고/혹은 위선은 그러나 위와 같은 그의 사생활이 아니다.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과 박해다. 2019년 기준, 부탄의 인구는 약 75만 명인데 이중 1/3에 해당하는 약 25만 명이 19세기 중반부터 네팔에서 이주해 부탄 남부에 거주하는 로참파(Lhotshampa)족이다. 

 

1988년 한때 부탄 인구의 45%까지 차지한 로참파족은 지그메 싱계 왕축의 “한 나라 한 민족’(One Nation One People) 정책에 따라, 1989년부터 그들의 언어인 네팔어 사용이  금지되었으며 티베트계 원주민 복장 착용이 강요되었다. 동시에 부탄 정부는 의도적 인구 조사를 통해 상당수 로참파족을 불법체류자로 규정하여 추방 조치를 단행하였다. 이에 로참파 족이 거세게 항의하자 부탄 군대는 이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한다. 이 과정에서 로참파족의 거주지에 대한 방화, 불법 구금, 고문, 강간 심지어 살인까지 자행되었다. 이에 따라 1992년 말까지 약 10만 명의 로참파족이 네팔의 피난민 캠프로 추방되거나 떠날 수밖에 없었다. 민주정으로 이전한 후인 2010년에도 부탄 정부는 여전히 로참파족에 대한 인종청소를 부인하고 있다.

 

네팔의 난민 캠프에 거주하는 로참파 족

 

맺음말

 

‘2022년 세계 행복보고서’ 발간을 계기로 행복에 대한 전체론적 접근을 둘러보면서 두 가지 질문을 하게 된다. 하나는 행복지수의 대상 범위이고 다른 하나는 행복의 기준이다. 모든 행복지수는 국가 단위로 조사가 시행되고 발표된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국가의 모든 국민이 행복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인가? 위 부탄 여성과 소수민족 사례에서 보듯 과연 한 나라의 전체론적 행복 추구에 있어 모든 이가 똑같이 중시되고 있을까? 객관적 물질적 조건 못지않게 사회구성원의 주관적 감성적 측면을 중시하는 전체론적 행복(happy) 개념은 과연 ‘자족’(content)의 부정적 함의가 배제된 것일까? 



모두를 위한 행복일까?

 

부탄의 경우 ‘국민총행복’ 개념의 국민에서 전체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네팔 출신 로참파 족은 실질적으로 배제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자기 국민’의 행복에 대해서는 전체론적 접근을 강조했지만, 행복을 누려야 할 ‘대상’에 대해서는 전체론적 태도를 버렸다. ‘세계 행복보고서’ 역시 개별 국가 단위로 행복을 측정할 뿐, 각 국가의 행복과 다른 국가의 행복 간 연관성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2022년 세계 행복보고서’에서 9위를 차지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이스라엘의  9위 행복은 122위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대한 폭격을 통해 쟁취된 행복이다. 이런 식이라면 미국 주도의 나토 위협으로부터 자국민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 이번에는 80위에 그쳤지만 - 도 성공적(?)으로 전쟁을 마치면, 다음 번 조사에서 행복지수가 올라갈지 모른다. 아이러니한 것은 피침략국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가 침략국 이스라엘에 도움을 요청했다는 사실이다. 

 

국민의 행복에 대한 전체론적 접근을 표방한 각종 행복지수는 많은 경우 일반인들이 수긍하기 힘든 순위를 보여준다. 여러 요소가 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순위에 기여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가장 큰 요소는 타인의 희생 위에 이루어진 행복 - 그것이 행복이라면 - 에 대한 무차별적 인정이 아닐까 싶다: 한 국가 내에서 다른 인종, 문화, 젠더를 가진 사회적 약자 그룹의 희생 위에서 이루어진 사회적 강자 혹은 다수의 행복; 다른 나라 국민의 피눈물 위에서 이루어진 한 나라 국민의 행복 등. 



행복 혹은 자족? 

 

행복에 대한 전체론적 접근 방식은 타당해 보이고 심지어 시대정신처럼 보인다. 그러나  행복에 있어 주관성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문제로 남는 듯하다. 위 사례에서 보듯, 남편에게 맞고 사는 것도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부탄 기혼 여성이 과반이다. 행복의 객관적 조건과 주관적 태도의 적정한 조합이 부탄 ‘국민총행복’ 철학의 기반인 ‘중도’ 개념인데, 과연 적정 지점은 어디가 되어야 할까? 행복지수에서 단골로 상위권을 차지하는 북유럽 국가들 국민들은 과연 행복에 있어 물질(객관)과 정신(주관) 조합의 황금비율에 근접한 것일까? 

 

소위 선진국의 많은 사람이 자신은 중산층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많은 미국인이 자기 집이 없어 야영장에서 살지만 자기 소유의 트레일러를 가졌다고 자신을 중산층으로 간주한다.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은 자발적 행복 추구 방식일까, 아니면 지배 계층의  이데올로기적 패권에 세뇌된 없는 자들의 어쩔 수 없는 자족( 自足) 방식일까? 유행어 소확행(小確幸)은 소(小)에 방점을 찍어야 하는 자족일까 아니면 행(幸)에 방점을 찍어야 하는 행복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