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역사, 인간 그리고 뉴질랜드

뉴질랜드 이야기

파케하의 Ethnicity (Pakeha Ethnicity)

김 무인 2019. 12. 24.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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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케하의 Ethnicity (Pakeha Ethnicity)

 

백인 특권의 정치학 (The Politics of White Privilege)

 

Steve Matthewman



소설가 Joyce Carol Oates는 이렇게 썼다: '다수를 차지하는 그룹은 자신들이 표준(norm)이 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놀랍게도 사회학은 그 간 역사적 특권과 주류 사회의 '자연스러운' 표준들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 사회학은 대신 일탈, 차이 그리고 다름에 초점을 맞추었다; 다른 말로, 표준에서 벗어난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 사회학의 주 관심사는 지배적 지위를 즐기는 사람들보다는 힘없고 소수이며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최근 들어 비판적 백인 연구의 등장을 통해 이런 경향은 바뀌고 있다. 이글에서 나는 뉴질랜드 다수의 에스닉 인구인 파케하(Pakeha) - 유럽 출신의 뉴질랜더(New Zealanders) - 와 이들에게 축적된 특권에 관해 탐구할 것이다.

 

초기 비판적 백인 연구가인 Peggy McIntosh는 지배 그룹은 자신들의 특권을 보는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썼다. 그녀는 말하길 우리는 백인의 특권을 규칙적으로 이용되지만  제대로 연구된 적이 없는 '보이지 않는 불로소득 자산의 종합체'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백인과 그들의 표준과 가치들은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져 소수 에스닉 그룹들은 이들에 의해 판단되고 또 이들을 따라 가야 할 상황에 부닥치게 된다.  McIntosh 자신도 미국의 패권적 백인 사회 내의 백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다. 

 

 

 

 

이전까지 그녀에게 당연스러이 여겨졌던 것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포함했다: 대부분 시간을 자신과 같은 '인종(race)'의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는 것; 원하는 지역에 새 이웃들의 반대와 같은 문제에 부딪힘 없이 집을 빌리거나 살 수 있는 것; 자신과 같은 ethnicity의 사람들이 뉴스 미디어와 대중문화에서 자주 (그리고 긍정적으로) 노출되는 것을 보는 것; 교육을 포함한 대부분 것들이 자신과 같은 인종의 관점으로부터 나온다는 것; 자신이 좋아하는 물건들을 파는 가게에 자주 들르는 것; 자신이 자신의 '인종'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만의 가치에 의해 판단되는 것; 자신과 같은 '인종'의 공무원과 대화하는 것; 인종 프로화일링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 자신을 인종차별 하지 않는 법률가 그리고 의사들과 상호교류하는 것; 그리고 유색인종 그들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남는 것. McIntosh는 또 다수그룹은 그들 그룹과 혜택받지 못한 다른 그룹 간의 간격이 좁아지는 것을 우려한다고 지적한다.

 

이 우려는 간격이 좁아짐으로써 그들의 특권에 피해가 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기인한다. 유사한 상황은 뉴질랜드에서도 발생한다. 파케하는 마오리 문화의 상징적 면들 - 국가 마오리 버전의 수용, 국가 간 스포츠 경기에서의 Haka 이용, 와이탕이 기념일 축하, powhiri와 마오리 언어 교육 등 - 은 지지하나 경제권력의 기존 구조에 도전하려는 시도에는 여전히 반대한다. 물적 자원의 재분배 - 가령 해저와 갯벌의 마오리 소유권, 마오리를 위한 대학장학금과 의대 입학 자리, 혹은 마오리 토지에 대한 토지세 면제 등 - 에 대해서 광범위한 반대가 존재한다. McIntosh는 백인의 체계적 특권에 대해 논한다: 백인이란 이유로 혜택을 부여받음과 동시에 많은 사회적 곤경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백인이기 때문에 ethnicity나 인종에 구애받음 없이 삶을 살아갈 기회를 잡는다. 마오리는 이와 대조적으로 세상에 대해 다른 경험을 한다: 오명 씌우기와 빈약한 서비스 제공과 더불어 폭언부터 노골적 폭력에 이르기까지 마오리는 직장, 주택 그리고 건강관리의 영역에서 차별적 행위를 받는다.

 

조약 자원센터(the Treaty Resource Centre)는 이 나라의 ethnic 관계를 형성하는 과거와 현재의 파케하 특권을 나열한 적이 있다. 19세기와 20세기에 파케하는 마오리 땅을 싸게 살 수 있었다.; 교육 체계에서 그들의 언어로 배우고 의사소통을 한다; 마오리 의회 좌석 수를 제한하고 다른 선거구에서의 마오리 투표권을 금지함(지금은 없어졌지만)으로써 그들의 투표 가치를 증가시켰다; 마오리보다 먼저 실업자 수당과 노인 연금과 같은 혜택의 모든 권리를 누렸다; 그리고 토지 개발을 위한 정부의 금융지원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 중 몇 특혜는 사라졌지만, 나머지는 여전히 남아있다. 우리의 주요 섹터 (교육,건강관리,사법제도 등)의 모든 것들은 파케하의 가치에 따라 구축되었다. 파케하 대다수는 그들이 ethnicity 덕분에 인종차별적 심문, 감시 그리고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웠다. 흥미롭게도 오클랜드 대학교의 교육대학에서 학자들이 폴리네시아 문화 가치(마오리와 Pasifika)가 우세한 과목을 진행했을 때 파케하 학생들이 무시당하고 소외당하는 기분을 느낀다고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그 과목은 단일 학위 내의 단일 과목이었다. 그들은 그런 식의 기분을 항상 느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해야 할 것이다.

 

 

Ethnicity의 사회학

 

이제까지 우리는 피부색과 인종에 대해 거론해왔다. 이 둘은 일상의 담론을 형성했다. 그러나 사회학자들은 생물학적 특성에 기초한 ‘인종’보다는 문화적 특성을 내포하는 ‘ethnicity’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선호한다. 인종이란 개념은 문제가 있다. 어떻게 유전적 요소들을 환경적 요소로부터 분리해낼 수 있는가? 설사할 수 있다 하더라도 생물학적으로 차별화된 인구를 찾을 수 있는가? 과학자들은 찾지 못했다. 과학자들은 유일한 인종들을 찾거나 그들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밝혀낼 수 없었다. 더 나아가 인종은 사악한 용도로 사용되는 정체성 카테고리이다. 식민화 프로젝트, 강탈, 인종청소와 노예제 등은 침략자의 인종적 우월성과 희생자들의 인종적 열등성을 근거로 정당화되어 왔다. 사회학자들이 ethnicity를 말할 때 그들은 선별된 신화, 기억 그리고 전통과 공유되는 표준과 상징들에 기초한 집단적 동일성(identification)을 염두에 둔다. 멤버십이라는 것은 여러 면을 통해서 부여된다.

 

Anthony Smith는 한 ethnic 카테고리에 속한 사람들은 아래 사항을 ‘전형적’으로 공유한다고 주장한다:

 

  • 다른 그룹으로부터 구분을 시키고 그들의 ‘정신’을 의미하는 그룹의 이름
  • 구성원들을 함께 묶어주는 공통된 조상에 대한 신화
  • 기억에 대한 공유와 더불어 그룹의 결속을 가져오는 공통된 역사
  • 구성원이 아닌 사람들과 구분시켜 주는 독창적 문화. 문화 구성요소는 언어, 종교적 믿음, 법과 관습, 의상, 음식문화, 예술과 문학 등을 포함한다.
  • 경계가 있는 물리적 영토 - 그들의 고향. 이것은 또한 공동체 개념을 강화시킨다.
  • 집단적 소속감. 구성원들은 반드시 서로 동일시한다.

 

개인들이 ethnic 그룹의 구성원 ‘자격’이 되기 위해서 이 6개 측면을 모두 가질 필요는 없다. 수용에 관한 엄격한 규정은 없다. 예를 들어, 마오리 말을 할 줄 모르지만, 마오리가 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론과 실제에서의 파케하(Pakeha in Theory and in Practice)

 

Ethnicity의 사회학적 정의를 위에서 서술했는데 이 대목에서 드는 질문은: 과연 파케하는 ethnic 그룹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사회학적으로 이해되는 ethnicity는 공유되는 기억과 역사, 관습, 언어, 종교 그리고 세계관의 공통 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파케하는 각각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잉글랜드, 웨일스, 크로아시아, 네덜란드 등 다른 지역 출신의 조상을 가지고 있다. 당연히 그들 사이 문화와 역사도 다르다. 그들은 종교도 언어도 음식문화도 공유하지 않을뿐더러 그들의 역사는 오히려 종종 충돌과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파케하 ethnicity에 관한 제일 저명한 이론가는 자신의 가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뉴질랜더, 아일랜드 출신 뉴질랜더(Irish New Zealander)입니다. 통계는 우리를 거의 90%에 달하는 유럽 출신 이민자의 후손이라는 그룹에 싸잡아 포함하지만 우리는 다수 그룹에 속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이렇게 한 그룹으로 엮인 사람들이 같은 지역을 점유하고 있고 그들은 같은 피부색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외양과 물리적 거주 장소를 제외하고 그들은 무엇을 공유하는가? 그들은 위 Anthony Smith가 말한 집단적 기억들과 전통들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David Pearson은 파케하는 진정한 ethnic group이라기보다는 다소 두리뭉실한 ‘ethnic 카테고리’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James Urry은 더 나아가 ‘파케하는 어떤 정체성을 대표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어있는 카테고리이며 단지 비-마오리임을 의미할 뿐이다’라고 단언한다.

 

이런 이론적 문제 외에도 실체에도 문제가 있다. 누가 파케하인가? 용어는 호칭의 정치학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유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 ethnic 그룹이 다른 ethnic 그룹에 의해 자신 그룹의 호칭이 정해지는 것은 드문 경우이다. 심지어 다른 사례의 경우도 소수 그룹이 다수 그룹에 의해 불리는 호칭을 수용한 경우이지 파케하처럼 소수 그룹(마오리:역주)에 의해 이름이 주어지는 것은 유일한 경우로 생각된다. 누가 이 호칭을 수용하는가는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2000년대 초반의 미디어 여론조사에서 파케하 자격이 되는 사람들의 최소 절반은 이 호칭에 거부감을 표명했다. 보다 최근에 행해진 전국 샘플에 기반을 둔 사회과학리서치의 응답자 중 유러피안 이민자 후손의 뉴질랜더들은 압도적으로 비정치화된 국가 정체성 (national identities)을 선호한다고 답했다: ‘뉴질랜더’ (49.7%), ‘뉴질랜드 유러피언’ (24.7%) 그리고 ‘키위’ (13.8%). ‘파케하’를 선호하는 사람은 9.8%에 불과했다. 호칭 선택은 그 외의 것에 대한 질문에 대한 그들의 응답과 상호 관련되어 있다:마오리에 대한 그들의 감정. ‘뉴질랜더(New Zealanders)’, 뉴질랜드 유러피안(New Zealand European)’, 그리고 ‘키위 (Kiwi)’라는 호칭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마오리와의 관계를 암시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biculturalism은 아젠다가 아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자신을 파케하라고 정의한 사람들은 마오리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리서치 결과를 토대로 저자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사람들이 사회 그룹들을 명명하거나 묘사하는 방식들은 사람들과 그 그룹들 간의 관계를 인지하고 합법화시키거나 혹은 가리고 배척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

 

우리는 또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의 변화 - 파케하 호칭 내 의미의 이동 - 에 주목해야 한다. 파케하와 마오리는 관계적 정체성이다. 이 둘은 서로를 통해서 존재한다. 이 둘은 상호 접촉 초기에 나온 식민화 산물이다.  1970년대 정체성의 정치화는 호주, 캐나다,뉴질랜드 그리고 미국 같은 정착민 사회에 급속한 변화를 가져왔다. ‘인정의 정치(recognition of politics)’가 다수 에스닉 그룹에서 등장했다. 이 인정의 정치는 원주민들, 식민화에 의해 발생한 역사적 부당함, 그리고  이에 대한 보상을 인정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인정의 정치 등장은 백인 자유주의자들의 죄책감 표출에 불과하다고 평가 절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왜 갑자기 죄책감을 느끼는가? 이 평가는 역사와 마오리의 주체적 역할을 무시한 것이다; 특히 십 년간에 걸친 hikoi(행진), 점령, 시위와 유러피안 우월성에 대한 학문적 도전과 같은 체계화된 적극적 행동주의를 무시하는 것이다. 이 행동주의는 부분적으로 세계적 사건들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인데 특히 1960년대와 1970년대 미국의 민권운동, Black Power 그리고 반식민지 운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바로 이 무렵부터 사람들이 다른 의미에서 자기를 파케하라고 정의하는 것을 보게 된다: 다른 문화임을 선언하는 차원과 그들의 다수적 지위(와 그에 따른 특권)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중요하게 이것은 마오리의 원주민 지위를 인정하는 방식이 되기도 한다. 1980년대에 어떤 이들은 마오리를 존경한다는 의미로 그리고 그들의 원주민 지위와 와이탕이 조약을 인정한다는 선언 차원에서 파케하 ethnicity를 자청했다.  따라서 파케하는 공식적으로 ‘두 문화(bicultural)’로 규정지어진 뉴질랜드 사회에서 마오리에게 필요한 ‘타자(other)’로서 등장하고 존재하는 것이다. 즉 현재 파케하는 1980년대 국내 정치의 산물인 셈이다.

 

주목할 만한 새로운 발전이 1990년대에 시작되었다: 파케하가 자신들을 ‘두 번째 원주민’이라고 칭하면서 에스닉 그룹으로 자리매김하려고 시도하게 된다. Paul Spoonley가 지적하듯: ‘파케하에게 뉴질랜드는 신생국가이며 따라서 그들에게는 “우리는 우리의 전통을 창출해야 하고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해 왔는지에 대한 우리만의 이해가 필요하다” 라는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식민화 이후(post-colonial)’ 정체성의 개발은 긍정적일 수 있지만, 여기에는 유의해야 할 부분들이 있다: 첫째, 원주민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식민지 점령 시점에서 땅의 전통적 점유자여야 하는데 파케하는 그렇지 않았다; 둘째, 새로운 정체성은 정착민 역사와 다수 에스닉 그룹에게 축적되어온 특권들에 대해서는 외면을 한다. 파케하로서 마오리에게 ‘우리는 모두 원주민이야’라고 말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동등하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겠지만 실제로는 우리 중의 누구는 다른 누군가보다 더 평등하다.



Ethnicity와 불평등(Ethnicity and Inequality): 마오리 특권에 대한 신화 (The Myth of Maori Privilege)

 

Ethnicity는 여러 이유에서 중요하다. 첫째, ethnicity는 종종 개인 정체성 - 사람들이 자신들과 세계에서 자신들의 위치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가 - 의 핵심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둘째, 같은  ethnicity를 공유하는 사람들끼리는 삶의 방식도 공유할 가능성이 높다. Anthony Smith가 상기시켜주듯 단어 ‘ethnicity’는 함께 살고 문화적으로 유사하다는 의미의 그리스어 ethnos에서 유래했다. 셋째, 한 에스닉 그룹의 멤버들은 종종 삶의 기회를 공유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한 사람의 ethnicity는 그가 어디에서 살지, 얼마나 오래 살지 그리고 얼마나 잘 살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사회적 지위 계층제(social status hierarchies)는 말 그대로 결정적이다’. Ethnicity는 따라서 개인의 정체성 혹은 공유되는 사회적 활동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특권과 박탈을 결정하는 복합체의 한 부분이다. 이러한 이유로 사회학자들은 ethnicity를 구조적 불평등이 생산되는 기반 중 하나인 사회 계층제의 근본적 요소의 하나로 인정한다.

 

Goran Therborn은 불평등의 원인과 후속 결과에 대해 유용한 사고의 틀을 제공한다. 그는 불평등을 창출하는 데에는 4개의 메커니즘이 있다고 주장한다. 

 

  • 배척(exclusion): 어떤 사람들은 좋은 건강관리,학교 그리고 직장같이 삶에 있어 좋은 것들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억제된다
  • 계층적 제도들: 사회질서가 위에는 소수가 밑에는 다수가 있도록 구축되어 있다. 위에 있는 소수는 나머지 사람들과 그들의 지위와 특권을 나누는 것을 꺼려한다
  • 착취: ‘가진 자’는 집단으로 ‘못 가진 자’들을 빼앗는다
  • 거리화 (distanciation): 어떤 이는 앞서 나아가고 어떤 이는 뒤처진다는 사고를 통해 불평등의 창출을 돕는 정치적 경제적 결정을 은폐한다. 

 

Therborn은 이 메커니즘들을 통해서 3가지 유형의 불평등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생명과 관련된 불평등(vital inequality), 존재와 관련된 불평등 (existential inequality) 그리고 물질 혹은 자원과 관련된 불평등 (material inequality). 생명과 관련된 불평등은 건강의 질과 연결된다. 신체적 정신적 건강은 사회적으로 형성된다고 각종 연구결과는 보고하고 있다. 평균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덜 건강하고 따라서 단명하는 생명과 직결된 불평등을 겪는다. 존재와 관련된 불평등은 삶의 질과 연결된다; 어떤 편견도 없이 살 수 있는 환경. 물질 혹은 자원과 관련된 불평등은 교육성취와 네트워크 같은 사회적 자원과 금전적 자원 모두를 포함한다.

 

우리는 이 메커니즘이 뉴질랜드에서 어떻게 작동되는지 확인할 수 있다. 2013년 뉴질랜드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마오리와 비 마오리 인구 간의 평균 수명 차이는 7.3년으로 비 마오리 인구가 더 오래 산다; 마오리 여성의 평균 수명은 76.5세임에 반해 비 마오리 여성은 83.7세이다; 마오리 남성은 72.8세 그리고 비 마오리 남성은 80.2세이다. 또한, 뉴질랜드 전체 인구와 대비하여 마오리는:

 

  • 공식적 교육 학위를 받을 확률이 적다(66.7% 대 79.1%)
  • 낮은 중간 소득을 기록하고 있다 (전체 인구 중간 소득 $28,500보다 $6,000이 적음)
  • 자기 집 소유율이 낮다 (28.2% 대 49.8%)

 

사회개발부의 초창기 사회 보고서에 따르면:

 

  • 16%의 마오리는 차별 경험이 있지만 파케하는 8%
  • 56%의 마오리 응답자는 자신이 ethnicity 때문에 차별받았다고 대답한 반면 
  • 32%의 파케하 응답자만 자신이 ethnicity 때문에 차별받았다고 대답

 

또 2010년 사회보고서에 따르면:

 

  • 28.3%의 마오리는 전반적으로 삶에 매우 만족하는 반면 파케하는 34.4%
  • 마오리 실업률은 12.7%, 반면 파케하는 7.8%
  • 마오리 비만율은 43%, 반면 비 마오리는 23%
  • 마오리 자살율은 10만 명당 16.1명, 반면 비 마오리는 9.9명

 

Avril Bell에 따르면 정착민들은 마오리 원주민 지위의 정통성을 무너뜨리는(de-authenticate) 전략을 구사한다. 이런 전략은 마오리의 원주민의 지위를 무효화시키고 백인 특권을 회복하기 위해 구사된다. 이 전략에 기초한 전형적 주장은: 순수 마오리 혈통을 가진 마오리는 남아있지 않으며 마오리 역시 마오리 이주 전 원주민인 Moriori 족을 식민화했고 따라서 같은 이민자이다. 여기에 추가된 전략은 뉴질랜드는 마오리에게 특혜를 주는 인종을 기반으로 하는 정책에 파묻혀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전형적으로 우파 정치인한테서 나온다. 예를 들어, 2004년 당시 야당 국민당 당수였던 Don Brash는 Orewa에서 행한 연설에서 ‘진정한(real)’ 마오리는 이제 남아있지 않으며 마오리와 파케하는 매우 근접한 소득분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와이탕이 조약에 대해 ‘우리는 21세기에 민족 형성을 위한 우리의 노력에 19세기의 법과 관습이 개입되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 라고 주장함으로써 역사 자체를 진보에 대한 방해물로 내동댕이치는 것을 마다치 않았다. 

 

이런 부류의 주장은 정착민 사회 다수 그룹의 상시적인 주장이다: ‘안 좋은 일들이 과거에 일어났다 하지만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 이 주장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박은 과거가 강력하게 현재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Tracey McIntosh가 주목했듯이:

 

땅의 문제는 오늘 날 거의 모든 마오리 불평의 법적,문화적 그리고 정신적 초점이다… 나의 부족을 포함한 많은 부족들은 와이탕이 조약에 서명한 적이 없었고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땅이 도둑질당했다고 보는 것이다. 땅이 마오리에게 의미하는 정신적 의미를 차치하고서라도 우리 땅을 빼앗김으로써 우리의 모든 경제적 기반이 사라졌고 모든 사회적 관계가 왜곡됐다.

 

‘역사는 아주 중요하다: 마오리에게 행해졌던 과거의 부당함은 현재 우리 삶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그 후속 영향을 경험하고 있다’라고 McIntosh는 이어 말한다. 이에 덧붙여 Avril Bell은 식민화는 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구조(structure)로 보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고 주장한다: ‘구조적으로 현재의 백인 뉴질랜더들은 …. 초기 정착민들의 노동으로 창출된 우리 사회 내 지위들을 차지하고 있다. 백인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지배적 문화를 구성하고 있으며 우리의 정치적 경제적 제도들은 대부분 백인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다수의 에스닉 그룹은 넓은 의미에서 특권의 상속자들이다. 파케하가 단지 특권만을 상속받은 것이 아니라 파케하에 의해 지배된 제도들도 상속받은 것이다. 예를 들어 교육에서 파케하 관점에서 쓰인 교재들이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그럼에도 마오리 특권에 대한 불평은 계속된다. 그 중 한 예가 2014년 당시 ACT당 당수였던 Jamie Whyte가 행한 연설이다. Whyte는 마오리의 인종을 기반으로 한 권리에 대해 비난했다. 그 예가 마오리의 선거구와 마오리 의회 좌석 그리고 오클랜드 시청 내 마오리 자문그룹의 존재였다. 그는 의회 내 마오리 좌석이 원래 파케하의 이익을 위해 마오리의 의회 내 영향력을 제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을 ‘망각’했다.

 

그는 또한 우리 역사에서 인종 기반 첫 번째 정책을 건너뛰었다: '뉴질랜드 헌법 법률 1852년'. 이 법률에 근거 영국의 관습법은 마오리의 관습법을 밀어내고 우리 땅의 법이 되었다. 이것은 그들을 위해 그들에 의해 만들어진 시스템을 통해 정착민들의 우월적 지위를 보장하기 위해 아주 필수적이었다. 또한 Whyte는 마오리의 쉬운 대학교 입학(예를 들어 법대)을 예를 들어 ‘인종 기반 특혜’를 비난했다. 연구에 따르면 빈곤한 지역 출신의 마오리 학생은 다른 에스닉 그룹 학생과 비교하여 대학교에 진학할 확률이 떨어지고 진학 이후에도 학업을 계속하는 확률이 떨어졌다. 이런 학생들은 기회의 평등이 주어지지 않은 까닭에 대학교 진입 장벽을 낮추어 결과의 평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오클랜드 대학의 대다수는 부유층 지역의 학생이지만 아무로 이를 비난하지 않는다. 특권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Whyte는 마오리의 ‘법적 특권들’이 혁명 전 프랑스 귀족들이 누렸던 혜택과 동등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법적 특권들’을 강조함으로써 어휘 선택에 조심했는데 모든 사회 지표에서 마오리가 물질적으로 특혜를 받지 않고 있음을 그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도 안 되는 프랑스 귀족과의 비유는 여전히 불쾌하다. 한 예만 들자. 프랑스 귀족은 법적으로 모든 과세에서 면제되었다. 반면 마오리는 법적으로 과세의 의무를 지고 있다. 주제로 돌아가자: ‘모든 이에게 하나의 법(one law for all)’과 ‘공평한 경쟁 무대(level playing field)’는 현 상태를 영속화하려는 시도이다. 현재의 사회적 제도들은 다른 그룹의 희생 위에 특정 그룹에게 구조적으로 혜택을 주고 있는 것이다.

 

 

결론 (Conclusion)

 

이글은 파케하 ethnicity에 대해 살펴보았다. 왜 ethnicity가 중요한가를 고려함에서 나는 사회적 계층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를 위해 불평등과 특권에 대한 논의를 이어갔다. 파케하 ethnicity를 논함에서 이는 마오리, 마오리 행동주의(인정과 배상) 그리고 영 제국주의의 식민화와 관련해서 생각해야만 이해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파케하가 된다는 것은 두 문화(bicultural)와 지역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ethnicity’는 우리를 규정하는 많은 정체성 중 한 측면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복합적 존재이다. 우리의 나이, 계급, 성별, 성적 취향 그리고 국적 등 다양한 요소들이 우리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친다. 많은 사람이 ‘우리는 모두 단지 개인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지만 사회학자들은 우리는 또한 상호의존의 네트워크에 얽혀있는 사회적 인간임을 주목한다. 더 나아가 특권과 편견은 개인적 가치로는 설명할 수 없다.; 우대와 차별은 우리가 한 일 때문에 발생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우리가 어떻게 보이는가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가령 백인, 흑인, 남성, 여성, 동성애자 등과 같은 집단적 그룹의 멤버로서). 이런 모든 이유에서 ethnicity는 우리가 진지하게 탐구해야 할 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