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역사, 인간 그리고 뉴질랜드

뉴질랜드 이야기

뉴질랜드의 아시아화 (The Asianisation of Aotearoa)

김 무인 2019. 12. 26.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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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의 아시아화 (The Asianisation of Aotearoa)

 

이민 영향(Immigration Impacts)

 

Paul Spoonley

 

정착민 사회로서 뉴질랜드는 두 가지를 반영하는 특별한 국가건설(nation-building) 프로젝트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주 식민자들이 영국(UK)과 아일랜드에서 왔다는 사실; 그리고 ‘남태평양의 영국’을 건설하려는 욕망. 이 프로젝트의 핵심에는 이 나라의 인구 구성을 상당 부분(그리고 거의 배타적으로) 특정 그룹에 한정시키려는 인종적 프로젝트가 있었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특히 아시안 정착민들과 같이 인종적으로 다른 자들을 배제하기 위한 노골적인 정책들을 만들었다. 다른 인종에 대한 ‘타자화(othering)’는 마오리와 그들의 핵심 문화적 정체성과 관습의 주변부화 또는 대체를 포함했다. 이 인종에 기반을 둔 국가건설 프로젝트의 핵심 요소들은 1800년대 초반부터 1960년에 이르기까지 지속하였다.

 

이 국가건설(nation-building) 프로젝트와 그 프로젝트를 뒷받침하는 정책의 기본 틀은 개혁을 표방한 노동당 정부가 책임과 권한 측면에서 국가(state)의 기능을 도려낸 1980년대에 급격하게 변화했다. 노동당 정부는 신자유주의를 통해서 제도적 활동의 핵심 영역에서 책임을 국가(state)로부터 개인 시민에게 이전시켰지만 동시에 원주민의 권리를 (비록 무의식적이긴 했지만) 인정하였다. 노동당 정부는 또한 국가건설 프로젝트 중 ‘백인 뉴질랜드(white New Zealand)’ 정책, 특히 이를 뒷받침하는 이민 정책을 수정하였다. 이 변화는 뉴질랜드 식민화 역사와 차별화되는 변곡점으로 역사상 처음으로 아시아로부터 대규모 이민자들이 유입된다.

 

2000년까지 아시아로부터의 영구이주자들이 증가하였으며 2010년까지 대부분의 아시안 이민자들은 중국과 인도 출신자들로 이들의 영향은 특히 오클랜드에서 매우 두드러졌다. 아시안 이민자들의 출현은 이 나라 교육 지형을 상당히 바꾸어 놓았다; 아시안 음식과 축제는 이제 레저 지형의 주요 부분이 되었다; 아시안 밀집 거주지역(ethnoburbs)과 아시안 밀집 상권지역(ethnic precincts)들이 등장했다. 2013년 센서스에 의하면 자신을 아시안이라고 정의한 사람들이 전체 인구의 11.8%이자 오클랜드 인구의 23%를 차지했다. 이 같은 이민과 수용/배척의 전통적 식민화 패턴과 정반대되는 현상은 ‘뉴질랜드다움(New Zealandness)’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소수 에스닉 그룹의 권리에 대한 인정과 biculturalism과 마오리의 정치적 소망에 대한 인식; 그리고 정책 플랫폼과 인정. 뉴질랜드라는 상상의 공동체는 이제 다른 형태의 길을 밟고 있는 것이다.

 

 

 

 

식민주의와 타자의 사회학(The Sociology of Colonialism and Otherness)

 

뉴질랜드의 식민화 궤적은 캐나다와 호주의 백인 정착민 사회와 그 궤를 같이한다. 이 궤적은 식민화 욕망으로 지배되었으며 영국에 의해 주도되었다; 원주민들과 그들의 공동체를 강제로 옮겼다; 식민지 주인의 가치와 제도를 재생산했다; 그리고 유러피안과 그 제도들의 우월성에 대한 인종차별적 시각에 기반을 둔 국적의 서사 위에서 건설되었다. 

 

20세기 후반 몇 요소들은 그 중요성이 커지긴 했지만, 뉴질랜드의 식민화 과정은 다른 정착민 사회와 비교했을 때 많은 면에서 차이가 없었다: 1840년에 서명된 와이탕이 조약과 1880년대 의회 내 4개의 마오리 의석 신설과 같은 몇 흥미로운 양보들. 그러나 이것들은 식민화 과정의 큰 궤적 면에서 보았을 때 상대적으로 지엽적이므로 식민주의에 대한 정통적 분석은 식민지 뉴질랜드의 사회학적 접근에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인구 자연증가(출생빼기 사망)에 의해 뉴질랜드에는 뉴질랜드에서 출생한 뉴질랜더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그러나 여전히 영국으로부터 대규모 이민 유입은 지속하였다; 신생 국가를 선호하는 ‘인종’으로 채우려는 국가 프로젝트는 여전히 유효했다.

 

1,2차 세계대전 사이 소위 ‘영국혈통(British stock)’은 보다 광대하고 성공적인 영제국을 건설하는 데 필요한 ‘인종’으로 간주하였다. 당시 사회적 제국주의 독트린은 이 새로운 식민지를 경제발전의 기회이자 산업도시화로 오염된 ‘영국 인종’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수단으로 간주하였다.

   

식민지 정착, 식민통치 제도의 설립 그리고 마오리 가치와 제도의 대체와 더불어 특히 아시안들의 도착 가능성을 염두에 둔 배타적 민족주의를 형성하려는 노골적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인종화(racialisation)’는 인종적으로 정의된 ‘타자(other)’에 대한 부정적인 - 가령  ‘문제’를 일으키고 지배 그룹과 국적을 위협하는 존재 - 사고이자 묘사이다. 인종화된 그룹은 ‘이데올로기적 관계에서 특별한 위치로 전락한다(동시에 경제적 정치적 관계에서도 특별한 위치로 전락한다). 중국에서 온 광부들은 1860년대 그리고 1871년까지 뉴질랜드에 도착했다. 당시 뉴질랜드에는 2,641명의 중국인들(거의 남자)이 있었으며 이들은 비영국인 중에서는 가장 큰 그룹이었다. 

 

이 중국인들의 출현은 ‘황색 침공(yellow peril)’으로 일컬어지는 인종에 기반을 둔 정신적 공황(moral panic)을 뉴질랜드 파케하에게 첫 번째로 가져오게 된다. 뉴질랜드는 호주와 캘리포니아의 정책과 법안들을 도입해서 아시안들의 입국을 막았으며 이미 국내에 들어와 있는 이들에게는 다른 거주자들, 정착민들 그리고 시민권자들에게 허락한 권리를 주지 않았다. 1879년과 1920년 사이에 아시안을 인종화하는 33개의 법안이 제정되었으며 초기 중국인들을 겨냥했던 이 법안들은 나중에 인디언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 법안들을 통해 아시안들에게는 뉴질랜드 시민권을 주지 않았고 - 이 법안은 많은 아시안이 뉴질랜드에서 태어났던 1951년까지 지속하였다 -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권리마저 주지 않았다. 이 외에도 소소한 제약과 요구사항들이 있었다. 한 법안은 중국인  양털깍이들을 고용하려는 농부들은 중국인들을 위한 별도의 숙소를 제공하도록 규정했다. 1881년 이민법은 중국인들에게 과도한 도착세를 부과했으며 뉴질랜드로 오는 배 한 척당 승선할 수 있는 중국인들의 숫자도 제한하였다. 이 법안의 몇가지 조항들은 1896년 아시아인 제한법(Asiastic Restriction Act)에 의해 그리고 나머지 조항들은 1920년 이민 제한  변경법(Immigration Restriction Amendment Act)에 의해 변경되거나 보다 강화되었다.

 

뉴질랜드 식민주의의 배타적 민족주의는 대내적으로는 마오리를 겨냥했고 대외적으로는 특히 아시안과 같은 비 영국인들의 입국을 막았다. 2차 세계대전 전후의 뉴질랜드 첫 번째 노동당 정부에 의해 아시안들을 인정하려는 움직임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이 결실은 1950년대가 되어서야 볼 수 있었고 더 많은 인종차별적 법안들과 정책 요소들의 폐기는 1960년대가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이런 변화도 지역에서 벌어지는 차별 행위들 - 가령 특정 공공건물에 대한 중국인 출입금지 - 을 막지는 못했다. 1950년대 후반 푸케코헤의 이발사들은 중국인들과 인디언들의 이발을 거부했고 프랭클린 농부 연맹은 아시안들 소유의 땅 몰수와 아시안들의 추방을 요구했다.

 

 

뉴질랜드의 국제화(Internationalising Aotearoa)

 

제4기 노동당 정부(1984-90)의 신자유주의 실험은 1890년대부터 존재해 온, 일부는 1930년대부터, 사회계약을 깨트렸다. 그 핵심에는 국가(state) 역할의 대폭적 축소와 개인 영역의 소유권과 행위로의 이전, 그리고 사적 영역을 통해서 건강과 주택과 같은 사회적 필요 부분을 충족시키는 책임이 개인 혹은 가족에게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 경제적 개혁은 식민 뉴질랜드의 백인 우선 인종차별적 민족주의와의 두 중요한 결별도 동반했다.

 

첫째, 부분적이긴 하지만 마오리의 원주민 지위와 법적 근거와 국가의 도덕적 기초로서 와이탕이 조약에 대한 새로운 인정이 있었다. 이 인정은 마오리 자치에 대한 제한된 인정을 포함한다. 이 변화들에 반대, 비승인 그리고 논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Kymlicka가 언급한 ‘국가적 소수(a national minority)’ (전형적으로 원주민 공동체 혹은 민족으로서 식민화 이전부터 땅에 대한 점유와 문화적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다)로서 마오리에 대한 담론적 그리고 헌법적 인정에 주목할만한 중심 이동이 있었다.

 

둘째, 1986년부터 백인 뉴질랜드 이민 정책에서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이민신청서의 신청자에 대한 선호하는 국가 출신 요구사항 (초기에 영국 출신에 한정되었다가 이후 다른 유럽국가로까지 확대)이 폐기되고 1986년과 2000년 사이에 캐나다와 호주의 ‘점수제’를 도입하는데 이 점수제 하에서 신청자의 ethnicitiy, 국적 혹은 인종과 관계없이 (엄격하게 말하면 1990년대에 영어 능력 조항을 신설했기 때문에 비영어권 신청자는 일정 부분 걸러진다) 점수 기준을 만족하게 할 경우 신청자에게 영주권을 부여한다. 뉴질랜드 역사상 처음으로 점수를 충족시킨 사람은 아무나 뉴질랜드에 정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아시안의 첫 번째 도착 그룹은 1990년대의 대만, 한국 그리고 홍콩 출신자들이었다. 많은 뉴질랜더들은 당시까지도 이 새로운 이민정책의 영향을 깨닫지 못했고 따라서 반동적 움직임이 생겼다.

 

뉴질랜드는 1970년대에 퍼시피카 사람들의 출현으로 심각하게 인종화와 관련된  정신적 공황에 빠진 경험이 있다. 이 공황은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지속한 ‘불법체류자’ 추방 운동으로 집약되어 나타났다. 1990년대 아시안 이민자들의 등장은 다시 한번 뉴질랜드를 정신적 공황에 빠트린다.  1993년 오클랜드의 지역 신문에 처음 등장한 ‘Inv-Asian(아시안 침략)’ 기사를 필두로 표출되기 시작한 이 공황은 반 이민정책을 기치로 내세운 뉴질랜드 제1당(New Zealand First)의 창당을 촉발하게 된다. 1996년 2월 그 해 후반에 있을 총선을 준비하면서 당수 Winston Peters는 ‘아시안 이민자’를 겨냥한 이민자 반대 선거운동을 개시한다. 뉴질랜드 제1당의 아시안 이민자 반대 입장은 대성공을 거두면서 20%의 유권자 표를 그 해 선거에서 획득하게 된다.

 

이런 인종화된 정치와 대중 인기영합주의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점들이 있다. 영주권 발급의 60%를 차지하는 점수제는 자격이 되면서 뉴질랜드 경제에 이바지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이런 이유로 새로운 이민자들(아시안 포함)은 평균 뉴질랜더보다 더 높은 교육수준을 가졌고 오클랜드 주택 시장과 소비재 시장에서 상당한 소비를 할 만한 가용소득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전문 기술과 많은 자본을 가진 이민자들이었다; 그들은 또한 눈에 잘 띄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눈에 띄는 외모와 상대적으로 높은 사회경제적 지위들이 합쳐져서 일부 뉴질랜더들의 적의에 불을 붙였다. 1996년 총선의 후유증으로 인한 이민정책의 제한적 변화들과 더불어 아시아 경제의 위축 탓에 아시안 이민자의 숫자는 급격히 감소하게 된다. 이 변화는 다시 이민정책에 대한 재평가를 가져오면서 2000년 이후 노동당 정부는 좀 더 완화된 이민 정책을 내놓게 되고 대중들도 이전보다 긍정적인 시각으로 새로운 이민자 유입을 지켜보게 된다. 2000년 이후 영주권과 임시체류 비자 등을 통해 입국하는 아시안들의 숫자는 다시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 인구학적 변화는 뉴질랜드 내 소수민족에 대한 정치와 오클랜드로 대표되는 뉴질랜드 도시 풍경을 바꿔놓게 된다.

 

 

21세기 초다양성 (Twenty-First-Century Super-Diversity)

 

초다양성(super-diversity)은 2005년 Steve Vertovec에 의해 처음으로 도입된 개념이다. Vertovec은 3가지 요소들을 강조하고자 했다: 사람들 이동의 현대적 효과와 이에 따른 인구의 다양화 - 이 다양화는 단지 ethnicity뿐만 아니라 성별, 나이, 법적 지위, 종교, 언어 그리고 초국가주의 같은 다른 측면의 다양화를 포함한다; 이런 다양성의 본질을 고려할 때 사회학적 이론들과 방법들을 ‘개편(re-tool)’할 필요성과 ‘불평등, 편견과 격리(segregation)’의 함의;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책 입안과 이해를 재고해야 할 필요.

 

현재의 다양성 강화와 그 복잡성 - 예를 들어 소수민족에 대한 인정과 ethnicity의 다른 사회적 특성 및 시스템과의 연계 - 은 기존의 개념적 정책 틀과 접근 방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많은 면에서 뉴질랜드는 이런 발전의 선두에 서 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원주민 권리에 대한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논의가 있었고 또 2000년 이후 특히 오클랜드에서는 매우 빠른 속도로 다양화가 진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2013년 센서스에 의하면 40%의 오클랜드 시민 - 그리고 뉴질랜더의 25% - 은 국외에서 출생했고 오클랜드 시민의 23%는 아시안(뉴질랜더의 11.8%)으로 나타났다. 오클랜드에는 각각 10만 명이 넘는 중국인과 인디안이 살고 있다. 센서스에서 스스로 에스닉 중국인(이 안에는 1800년대 후반 뉴질랜드에 도착한 조상을 두고 있는 사람부터 최근 대만,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그리고 ‘본토’ 중국에서 온 사람까지 매우 다양하다)이라고 정의한 사람들이 그동안 가장 큰 아시안 그룹이었으나 최근 그 숫자가 급증한 인디언(피지 인디언 포함)들로 인해 이민자 규모 면에서 두 그룹이 비슷해졌다. 그다음 두 번째로 큰 그룹은 필리핀과 한국인들 - 규모가 비슷 - 이다. 그 밑으로도 난민을 포함해서 아시아의 많은 다른 지역에서 온 그룹들이 존재한다. 이들 다양한 아시안 공동체들은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유입된 이민자들 덕분에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으며 2020년대 후반에 오클랜드 인구의 28~30%를 차지할 것으로 기대되면서 뉴질랜드 마오리 인구와 대등할 것으로 예상한다.

 

국내적으로 볼 때 초다양성은 마오리 인구의 중요성(인구통계학적으로 그리고 그 독특한 정치적 지위 때문에)과 뉴질랜더의 25%가 해외에서 태어났다는 사실(해외 출생 뉴질랜더의 가장 큰 그룹은 주목할만하게도 여전히 영국 출신이다)에 의해 크게 특징지어질 수 있다. 하지만 오클랜드의 경우 해외 출생 거주자가 전체 거주자의 40%를 차지하고 ethnicity 측면에서 더욱 다양하다. 오클랜드에서 아시안 공동체들은 훨씬 더 지배적이고 언어 사용, 학교와 같은 공공제도의 에스닉 구성, 그리고 음식 선택과 축제 같은 일상적인 것들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오클랜드는 OECD 국가 도시 중 가장 초 다양한 도시이며 당연히 아시아 밖의 OECD 도시 중 매우 높은 비중의 아시안 인구를 가지고 있다. 오클랜드의 초다양성은 정착민 사회에서의 그 위치, 마오리 문화와 정치의 중요성, 그리고 아시안 공동체들과 아시아 국가들과의 초국가적 연결로 말미암은 급격한 중심 이동으로 차별화된다.

 

인구학적 그리고 에스닉 변화들 그리고 초다양성의 등장은 뉴질랜드 에스닉 정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관련된  명확한 이슈들과 도전들은 다음과 같다:

 

  1. 새로운 소수민족 밀집지역(ethnoburbs)의 등장으로 말미암은 도시 지형의 변모. 한 예로 오클랜드 Dominion Rd는 많은 소매점들이 아시안(주로 중국인)들에 의해 운영되고 간판은 중국어로 작성되었으며 제공되는 상품과  서비스는 아시안 고객에게 특화되어 있다.
  2. 소수민족 밀집지역의 등장은 핵심 기관 내 다양한 비 패권적 공동체의 증가하는 집중을 유발하고 있다. 약 25%가 아시안 인인 오클랜드의 학교는 그 예가 될 수 있는데 일부 학교들은 아시안 학생 수가 40% 이상부터 시작해서 일부는 60%가 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오클랜드의 아시아화는 공공 기관들의 고객 인구 구성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한편 직원 구성이나 정책은 동반적으로 진행되고 있지는 않다. 
  3.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공동체들과 소수 문화공동체가 규모와 밀집도 면에서 이렇게 성장하는 것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유입된 남태평양 이민자들을 제외하면 뉴질랜드 역사에 유례가 없는 경우이다. 그 이전의 중국인 이민은 상대적으로 소수였고 지역적으로도 고립되었었다. 더 나아가 이 공동체들은 전통적 이민자 공동체들(영국과 아일랜드 출신들)과 다르다. 특히 이들의 외모가 다르고 그들의 언어와 문화적 가치들은 때때로 뉴질랜드의 패권적 가치와 제도들과 명확하게 비교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 이민자의 증가하는 인구학적 중요성은 뉴질랜드에서 태어나거나 성장한 아시안들 - 이들의 행동과 가치는 또 다르다 - 의 등장 덕분에 점점 보완되고 있다. 미래에는 이 새로운 세대들이 부모가 속한 공동체와 뉴질랜드 사회와 문화 모두에게 더욱 폭넓게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4. 무엇이 biculturalism을 구성하는가에 대한 계속되는 논의에 대한 함의는 아직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1960년대 이후 biculturalism은 식민화의 부정적 영향에 대한 제한된 인정, 와이탕이 조약의 새로운 (하지만 부분적) 헌법적 역할, 그리고 다른 뉴질랜더와 차별화되는 마오리의 권리에 대한 인정을 이끌어 내었다. 그러나 이 biculturalism과 함께하는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는 어떻게 보일 것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요원하다. 분명 일부 마오리는 다문화주의가 biculturalism과 와이탕이 조약의 현재 위치를  대체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5. 이 초다양성의 본질, 특히 오클랜드,은  ‘뉴질랜드다움(New Zealandness)’ 에 대한 대중적 이해를 재고하게 한다. 누군가에게는 이 초다양성이 그들이 뉴질랜드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을 훼손할 것이다. 핵심 제도들과 공유되는 가치들이 아시안 이민자와 그 후손들에 의해 재구성되고 있다. 그들 역시 그들의 정체성을 재정의하고 있다: 이민자 공동체들은 많은 경우 가정 혹은 비즈니스를 출신 국가와 뉴질랜드 양쪽 모두 유지하고 있다. 그들의 연결고리는 초국가적이며 이민은 점점 순환적이 되어가고 있다 (이건 아시안에게 한정되지 않는다; 뉴질랜드 해외 이민자들이 80만 명이다). 초창기 사회적 결속(social cohesion)이 영국-아일랜드인들의 이민과 식민주의의 한 기능이었다면 점점 다양화되어 가는 공동체들은 21세기에 뉴질랜더 (혹은 오클랜더)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질문을 제기하면서 이에 도전한다.

 

 

결론(Conclusion)

 

아시아 다양한 지역 출신의 이민자 도착과 정착은 눈에 띄게 뉴질랜드의 에스닉 구성을 변화시켰고 많은 영향을 동반했다. 식민 시절 뉴질랜드가 역사적으로 가졌던 영국과의 지리정치학적 연결은 지금 아시아 태평양 지역, 특히 중국과 인도라는 두 슈퍼파워, 과의 관계에 의해 보완, 심지어 대체, 되는 중이다. 이 관계는 임시 체류자 (학생이나 관광객) 혹은 영주권자와 같은 사람들의 이동을 포함한 국경을 넘나드는 행동들에 반영된다. 이어서, 이 관계는 뉴질랜드의 사는 동네, 학교, 소매점과 다른 공공장소의 에스닉 구성을 변화시켰다. 또한, 이 관계는 뉴질랜더가 어떻게 그들이 누구인가를 이해하는가 - 문화적으로 다양한 사회에서 뉴질랜더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와 국가의 문화 정치학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권리 인정 측면에서 개념적 그리고 정책 격차가 여전히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어떻게 그들의 언어는 인정되어야 하고 유지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일정 노력이 이루어졌을 때 그리고 마오리의 문화와 정체성을 위한 국가적 공간을 창출하기 위한 노력이 여전히 남겨졌을 때 무엇이 인정의 적정한 형식을 구성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