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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분산미디어 시대, 맑스주의의 중요성(3/3) - 디지털 자본주의 이해하기 (3)

김 무인 2022. 5. 2.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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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맑스: 분산미디어의 정치경제학을 향하여

Digital Marx: Toward a Political Economy of Distributed Media

 

 

 Andreas Wittel





 

6.  가치 (Value)

 

노동 개념의 복잡성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가치로 눈을 돌려야 한다. 노동과 마찬가지로 가치도 사회적 연구의 광대한 영역이다. 가치는 많은 의미와 관점을 가진 용어이고,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쉽게 산만해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놓치기 쉽다. 그렇다면 미디어 정치경제학에서 가치의 중요한 부분은 무엇일까? 이것이 첫 번째로 다뤄져야 할 질문이다. 두 번째 질문은 우리의 현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 생태계 이해에 맑스의 가치 개념이 무엇을 제공해 줄 수 있을까이다. 

 

2015년 ,영국 Occupy Democracy 시위 중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

 

경제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2001)는 가치와 관련하여 세 가지 접근법을 구분하였다. 첫째, 사회학적 의미의 가치가 있다. 이 가치는 인간 삶에서 무엇이 궁극적으로 좋고, 적절하고 혹은 바람직한지에 대한 판단적 개념이다. 둘째, 경제적 의미의 가치가 있다. 이 가치는 어느 정도로 대상을 바라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 바람이 양적으로 측정되는지에 대한 측정적 개념이다. 셋째, 언어적 의미의 가치가 있다. 이 의미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구조적 언어학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여기서 가치는 의미 있는 차이로 이해된다. 이것은 단어(혹은 사물)를 다른 것과 연관 짓고 비교하는 개념이다. 어떤 사물의 가치는 다른 사물과의 대조 혹은 비교를 통해서만 성립할 수 있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1857~1913)

 

미디어 정치경제학에서 가치 개념

 

매스미디어 정치경제학에서 가치 개념은 노동 개념과 마찬가지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맑스 이론에서 노동과 가치는 밀접하게 상호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노동에 관심 있는 연구자는 가치에도 관심을 가진다. 가치에 대한 탐구가 그동안 왜 무시되었는지는 추측할 수밖에 없다. 나의 추측은 간단하다: 매스미디어는 일반적으로 공공선, 즉 민주주의를 지키는 독립적 세력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매스미디어의 민영화 확대 그리고 소유자의 경제적 이익 추구로 말미암아, 공공재로서의 매스미디어 가치는 끊임없는 위협 아래 놓였다. 이에 따라 매스미디어 정치경제학은 매스미디어의 잠재적 가치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민주적 사회를 위협하는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규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런 관점은 완벽하게 이해가 간다. 결국, 매스미디어 정치경제학은 비판 이론의 전통에 서 있는 것이다. 미디어 재벌과 미디어 거물들이 공공 영역에 기여했다고 칭찬한다면 정말 이상한 일일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레이버의 가치 접근법 구분을 매스미디어 정치경제학에 적용한다면 바로 위 추측과 매우 유사한 결과를 얻는다. 하지만 좀 더 미묘하다. 경제적 의미에서 가치에 대한 관심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미디어 생산품 혹은 미디어 조직을 계량적으로 측정하려는 어떤 시도도 없다. 사회학적 의미로서의 가치에 대해서도 역시 어떤 유의미한 탐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만약 있었다면, 그것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미디어/커뮤니케이션의 가치에 관한 것이었을 것이다. 즉, 미디어/커뮤니케이션의 유토피아적 측면, 미디어가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논의였을 것이다. 

 

그러나 매스미디어 정치경제학은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 의미 측면의 가치에 대해서는 논의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미디어 생산과 미디어 조직 간의 유의미한 차이, 특히 공공 미디어 조직과 민간 미디어 조직 간 차이에 대해 일정 주장을 전개했다. 가치 개념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영국 매스미디어 정치경제학은 공공 미디어 조직을 상업적 미디어 조직과 비교하면서, BBC와 같은 국영 미디어 조직에 긍정적 평가를 했다.

 

분산미디어 시대에 이런 접근 성향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경제적 의미에서 가치가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징조는 없다. 사실, 계산적이고 계량적 단위에 의한 가치 측정은 애초 미디어 정치경제학자들에게 다소 의심스러운 목표였을 것이다. 그러나 비물질적 노동의 중요성이 증가하면서, 경제적 의미에서 가치 측정은 아예 의심스러운 목표 차원을 벗어난다 - 미친 짓이고 완전히 헛된 프로젝트가 될 것이다. 지적이고 감성적인 것의 가치는 측정 대상을 벗어난다는 것이 갈수록 명확해지고 있다. 

 

“그러나 고전적 가치 이론이 지배했던 시대로부터 돌이킬 수 없이 변화한 것은 경제 질서 측면에서 가치 이론을 발전시킬 가능성, 혹은 오히려 구체적 노동의 척도로서 가치를 고려할 가능성이다.”(Negri, 1999) 네그리는 대신 위로부터의 가치 이론을 “밑으로부터, 삶의 기반으로부터”의 가치 이론으로 바꾸자고 제안한다. 스피노자의 생각을 바탕으로 네그리는 가치를 행동하는 힘으로 이해한다. 그레이버의 구분에 더하여 가치를 생각하는 네 번째 방법으로 이것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가치는 사람들이 행동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것.

 

분산미디어 시대에 사회학적 의미의 가치에 대한 논쟁은 왕성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논쟁들은 다음과 같은 이슈를 다룬다: 디지털 커먼즈; 자발적 무임금 노동과 문화; 개방성, 기여, 그리고 공유; 관심; 희소성과 풍요; 선물(gift) 경제; 재산과 접근; 경쟁이 아닌 협력과 협업; 익명의 발언과 행동; 감시, 프라이버시, 그리고 투명성; 전문가와 아마추어의 가치; 인터넷과 민주주의; 인간과 기술; 미디어와 정치적 행동; 자본주의와 출구전략. 이것들은 무엇이 좋고 바람직한지에 관해 판단을 내리려는 시도다. 

 

나는 다음을 주장한다: 매스미디어 시대에 민주주의를 지키는 미디어의 가치는 위협받았다. 현재의 분산미디어 시대에도 이 가치는 여전히 위협받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이야기의 끝은 아니다. 이제 권력, 이데올로기, 그리고 조작에 대한 전통적 질문은 에이전시, 권력 부여, 잠재성, 그리고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질문으로 보완되고 있다. 매스미디어 시대에는 미디어와 삶에 있어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한 질문을 연결하는 논의가 많지 않았다. 분산미디어 시대에는 이런 논의가 활발하다. 



맑스의 가치 개념

 

맑스의 가치 개념은 이 논의에 기여할 수 있을까? 간략하게 살펴보자: 노동가치론을 통해 맑스는 상품의 가치가 시장 그리고 돈과 상품을 교환하는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리버럴 정치경제학자들의 주장을 거부한다. 리버럴의 관점은 가치가 상품에 내재한 것이라는 입장과 가치는 상품을 구매하려는 사람들의 욕망에 달렸다는 입장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반면, 가치는 상품 생산에 투자된 노동 시간의 양에 비례한다고 맑스는 주장한다. 돈과 상품의 교환은 상품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상품 생산이라는 사실을 가린다. 가치는 상품으로 구현된 사회적 필요 노동 시간이라는 명제에서 맑스는 그의 잉여가치 개념을 발전시킨다. 잉여가치는 노동력 비용(임금)과 상품에 투여된 노동의 가치 간 차이를 의미한다. 잉여가치 혹은 이익은 노동자가 창출한 것과 그들이 대가로 받은 것과의 차이다. 노동을 통해서 가치가 창출된다면, 잉여가치는 노동 착취를 통해 창출된다. 

 

모이시 포스톤(Moishe Postone)(1942~2018)

 

맑스의 노동가치론(labour theory of value)은 맑스주의 이론 내에서도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지젝(2011)은 노동가치론이 맑스 이론에서 가장 약한 고리라고 말한다. 맑스의 노동가치론은 초역사적 이론이 아니라, 오직 자본주의 사회에만 적용되는 가치 이론이라고 모이시 포스톤(Moishe Postone)의 주장을 바탕으로 그는 그렇게 주장한다. 지젝의 주장은 중요한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일부는 자본주의적이고, 일부는 공적 자금으로 운영되고, 일부는 디지털 커먼즈인 현대 미디어 생태계에서 맑스의 이론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맑스의 이론을 ‘선물 경제’(gift economy) 혹은 ‘기부 경제’(economy of contributions)에 적용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다면 어떻게 가능할까? 선물 경제를 생각해 보자. 선물을 교환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희생시키면서 선물의 생산 과정에서 가치의 근원을 찾는 것이 과연 선물 경제에 도움이 될까? 이런 접근은 그다지 이치에 맞지 않을 것 같다.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이해만을 위해 개발된 가치 이론의 지평을 넓힐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한 영감을 찾을 수 있는 곳은 가치에 대한 인류학 연구 분야다.

 

마르셀 모스(Marcel Mauss)(1872~1950)​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는 가치에 대한 인류학 연구 성과에 대한 훌륭한 리뷰를 남겼다. 그는 선물과 상품이라는 이분법을 극복하면서, 마르셀 모스(Marcel Mauss)(증여론의 저자:역자 주)의 접근과 맑스의 접근을 연결할 수 있는 개념을 찾았다. 그는 특히 멜라네시아에서 광범위한 현장 조사를 한 Nancy Munn이 개발한 가치 개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녀에게 가치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한 사람의 행동 능력이 구체적 활동으로 바뀌는 과정이다. 가치는 궁극적으로 사회적 관계를 창조하는 힘이다. 

 

Nancy Munn(1931~2020)

 

“물질에 대한 욕망과 인간관계의 중요성 중 하나를 선택하기보다는, 이 둘은 같은 것의 굴절로 볼 수 있다. 상품은 생산되어야 하며 (그리고 유통되고, 교환되며, 소비되고…), 사회적 관계는 생성되고 유지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시간, 에너지, 지능, 그리고 관심의 투자가 필요하다… 이런 식의 접근은 물론 맑스를 떠올리게 한다 … 우리는 분명히 노동가치론에 따라 사안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노동’을 훨씬 더 넓게 정의해야 한다.” (Graeber, 2001)

 

이런 노동 개념은 맑스의 실천으로서 노동이란 일반적 정의와 거의 동일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네그리와 스피노자(Spinoza)가 행동하는 힘이라고 묘사한 것과 같다. 이 모든 것은 이론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미디어 정치경제학이 왜 이 가치 이론에 신경 써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를 대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사실 이것은 내가 말하고 싶은 핵심이 아니다. 그러나 맑스의 노동가치론 (넓은 의미에서 노동에 대한 이해)이 실증적 연구를 위한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고 생각한다. 

 

가치를 행동하는 힘 그리고 사회적 관계를 창조하는 힘으로 보는 것이 맞는다면, 가치가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라면, 커뮤니케이션 정치경제학 그리고 분산미디어  정치경제학은 정치경제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재정의하고, 네그리가 밑으로부터의 정치경제학이라고 불렀던 것을 확립하는 데 완벽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가치에 대한 연구는 구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주체들’ 그리고 창조하고, 연결하고, 소통하고, 공유하고, 함께 일하고,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욕망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7. 재산(property)

 

매스미디어 시대에 재산은 생산수단의 소유권 측면에서 항상 중요했다. 그러나 미디어 콘텐츠의 소유권 측면에 대한 관심은 다소 제한적이었다. 로널드 베티그(Ronald Bettig)(1996)는 특히 지적 재산(intellectual property)과 저작권(copyright) 영역이 “상대적으로 덜 탐구되었다”라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는 미디어 콘텐츠의 소유권에 대해 연구한 극소수 정치경제학자 중 한 명이다. 흥미롭게도 그의 연구는 디지털 시대의 시작과 함께 이루어졌다. 



로널드 베티그(Ronald Bettig)(1960~2016)

 

지적 재산권과 저작권의 실체

 

베티그는 지적 재산의 규범적 원칙과 실제 존재하는 시스템과의 차이에 관심을 두었다. 지적 재산에 대한 규범적 정당화의 중심에는 지적 그리고 예술적 작품의 창작자들은 창의력을 위한 인센티브가 필요하다는 가정이 있다. 저작권은 창작자에게 그들 작품을 이용할 수 있는 독점적 권리를 주기 위한 것인데, 이는 다시 창작자에게 수입을 제공하면서 새로운 작품을 제작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실제 저작권 시스템은 이런 이상처럼 운영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예술적 그리고 지적 작업은 많은 사람과 비싼 기술이 관여된 생산, 복제, 그리고 유통 과정에 의존한다. 베티그(1996)에 의하면, “저작권의 소유권은 갈수록 생산과 유통에 필요한 기계와 자본을 가진 자본가에게 의존한다.”

 

“자본가 계급은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미디어에서 실제 창작자들의 예술적 지적 노동을 추출할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 ‘출판’을 하기 위해서는, 실제 창작자들은 그들 작품에 대한 소유권을 유통 수단을 가진 사람들에게 양도해야 한다.”

 

 

그의 분석은 희망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매스미디어 시대에는 매우 정확한 것이다. 베티그는 “지적 예술적 커먼즈에 대한 포위는 비록 자본의 논리가 그렇게 보이게 할지 몰라도 불가피한 것도 필요한 것도 아니다”라고 통찰했다. 베티그는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음이 틀림없다. 그의 책이 출판된 1990년대 중반에는 문화와 디지털 커먼즈 공유는 주로 오픈소스 운동으로 국한되었다. Napster와 같은 파일 공유 소프트웨어도 없었고, Creative Commons와 같은 저작권에 대한 법적 실험도 없었고, 소셜웹도 없었다. 

 

 

매스미디어 시대에 자본의 팽창 논리는 지적 예술적 커먼즈를 위한 여지를 많이 남기지 않았다. 미디어 콘텐츠의 압도적 부분은 공동 재산이 아니라 자본에 장악된 것이었다. 이 점에서 베티그의 성명은 몇 가지 예언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지적 예술적 커먼즈 보호구역이 이제는 불가피하지 않다는 것이 매우 명백해졌다. 사실 이것은 두 그룹 간 죽음의 전쟁이다: 한쪽에는 예술적 지적 노동과 디지털 커먼즈를 구하려는 사람들 그리고 다른 쪽에는 자본과 이 보호구역을 노리는 사람들.  

 

베티그는 풍부한 실증적 자료와 함께 설득력 있는 다음 질문을 던진다: 이상적 규범 측면에서 합법적이긴 하지만, 저작권 협약은 왜 지적 예술적 작품의 창작자를 실제로는 지원하지 못하고 커뮤니케이션 흐름을 통제하는 자들을 지원하는가? 디지털 전환과 더불어 이 문제는 더 심각해지고 있다. 모든 디지털 창작품은 무한히 복제될 수 있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배포될 수 있기 때문에 비경쟁적 제품으로 간주된다. 사실 대부분의 지적 재산은 비경쟁적이다. 즉, 지적 재산은 다른 사람의 사용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같은 제품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디지털 창작품은 단지 비경쟁적인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본성상 풍부하다. 따라서 디지털 권리를 통해 저작권 개념을 구하려는 모든 시도는 인위적으로 희소성을 만든다는 점에서 불합리하다. 그런 시도는 풍부한 물체를 법적으로 희귀한 제품으로 바꾼다. 역설적으로 표현하면: 디지털 시대에는 오직 인위적 희소성의 창조만이 자본주의의 축적을 먹여 살릴 수 있다. 디지털 창작품이 비경쟁적일 뿐만 아니라 풍부하기 때문에 지적 재산권 문제가 주변에서 중심 무대로 이동했다.



자유문화(free culture)

 

자유문화(free culture) 논쟁을 몇 줄로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맑스의 핵심 입장을 간단히 설명하고 싶다.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비판적 정치경제학자들과 요하이 벤클러(Yochai Benkler)(2006)와 로렌스 레싱(Lawrence Lessig)(2004)과 같은 리버럴 정치경제학자들 사이에는 비교적 뚜렷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후자는 지적 재산권의 합법성을 포기하지 않은 채 자유문화를 찬성한다. 그들은 단지 저작권법의 수정을 제안할 뿐이다. 그들은 또 디지털 커먼즈 구축에 들어가는 자발적 무임금 노동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하지 않으면서, 디지털 커먼즈를 진보적 발전이라고 칭송한다. 커먼즈 기반 동료 생산은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을 향상시킨다고 벤클러는 주장한다. 이에 대해 비판적 정치경제학자들은 다른 입장을 취한다. 이들에게 자발적 무임금 노동은 해결해야 할 문제다. 

 

로렌스 레싱(Lawrence Lessig)(1961~present)

 

비판적 디지털 미디어 정치경제학자들 내에서의 논쟁은 편 가르기가 쉽지 않다. 자발적 무임금 노동에 대한 적극적 옹호 입장도 있는가 하면, 이 자발적 무임금 노동에 대한 자본의 착취에 대한 적극적 관심도 공존한다. 많은 학자는 이 두 입장의 경계에 있다. 자유문화의 딜레마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예술적 혹은 지적 작품의 창작자들에게 일정한 수입을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을 찾는 것으로 이어졌다. (예: Peter Sunde’의 ‘Flattr’ 혹은 드미트리 클라이너(Dmytri Kleiner)의 ‘카피파레프트’(copyfarleft)와 ‘벤처코뮤니즘’(venture communism))

 

 

그러나 이런 논쟁은 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재산권 자체에 대한 논의를 회피한다. 예를 들어, 심지어 자유문화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사람들조차 자유문화는 창조적 생산과 혁신을 자극하지만, 저작권은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작업의 축소를 가져온다는 주장과 같은 다소 실용적 입장을 취한다. 물론 이런 주장은 중요하지만, 지적 재산권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 지금까지 논의되지 않았다는 것에 나는 놀란다. 알랭 바디우(Alain Badiou)(2010)는 좋은 수사학적 질문을 던진다: “왜 우리는 강자의 생존을 위해 모든 형태의 재산권을 엄격하게 통제하는가?” 



알랭 바디우(Alain Badiou)(1937~present)

 

맑스의 재산권 개념

 

이 대목이 맑스가 필요한 부분이다. 관련하여 우리가 맑스에서 배울 수 있는 첫 번째는 재산권은 자연권이 아니라는 것이다. 재산 관계는 특정 역사적 조건의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 재산권에 유리하도록 봉건제 재산권을 폐지했다. 공산주의의 차별화된 특징은 재산권 자체의 폐지가 아니라, 부르주아 재산권의 폐지다. 현대 부르주아의 재산권은 계급 적대관계와 소수에 의한 다수 착취에 기반을 둔 제품의 생산과 전유 시스템의 최종적이며 가장 완벽한 표현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산주의 이론은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사유 재산의 폐지.” (공산당 선언, 1848)

 

두 번째 주목할 것은 맑스의 재산권에 대한 관점은 혁신적이며 리버럴 정치 이론가들과 매우 다르다. 왜냐하면, 맑스는 사람과 사물 간 관계에 초점을 맞추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맑스는 재산권을 상품을 둘러싸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구축한 관계로서 개념화한다. 따라서 재산 관계는 근본적으로 사회적 관계의 표현이다. 자본주의에서 재산권은 자본과 임금 노동의 대립에 기초한다. 즉 생산수단을 소유한 쪽의 이익 축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고립되고 독립적 노동 개인을 그의 노동 조건과 융합시킴으로서 스스로 획득한 개인 재산은 다른 임금 노동자의 착취에 의존하는 자본주의적 사유 재산으로 대체된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결과인 자본주의적 전유 방식은 자본주의적 사유 재산을 생산한다.” (자본론 1권)

 

이처럼 자본주의 사유 재산은 물건의 소유권에 관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 물건을 사용하는 것을 배제하는 권리에 관한 것이다. 사유 재산은 지적이고 열심히 일한 사람들이 정당하게 획득한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게으른 악동들’이라는 신화를 해체하면서, 맑스는 재산권의 기원에 대한 대체적 설명을 내놓는다:

 

“이런 지루한 유치함이 재산권을 옹호하기 위해 매일 우리에게 설교 된다… 그러나 실제 역사를 보라. 정복, 노예, 강도, 살인, 단기간의 무력 등이 더 큰 역할을 수행한다.” (자본론 1권)

 

자본주의가 세계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지금, 맑스의 이 문장은 왜 이토록 울림이 있을까? 

 

세 번째이자 우리의 목적상 가장 중요한 맑스의 관찰은 ‘사유 재산’(private property)과 ‘개인 재산’(personal property)의 구별이다. 자본주의에서 사유 재산은 나쁘다. 이는 단지 소외된 노동(임금 노동)의 결과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사유 재산은 애초부터 소외된 노동을 가능하게 한 수단이자, 자본과 노동 간 부당한 관계를 유지하는 수단이다. 사유 재산은 생산적 재산이다. 자본주의 생산에서 필수적인 것은 재산이다. 잉여가치 창출에 활용할 수 있는 재산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맑스는 사유 재산을 개인 소유의 생산수단과 동일시한다. 따라서 사유 재산은 개인 재산 혹은 소비를 위한 재산(재생산과 생계를 위한)과 매우 다르다. 왜냐면 후자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사회화되어서는 안 된다. 비생산적 재산 혹은 필요에 기반을 둔 재산은 어쨌든 해롭지 않다.

 

사유 재산과 개인 재산의 차이

 

“따라서 자본이 모든 사회구성원의 재산인 공동 재산으로 전환될 때도 개인 재산은 사회적 재산으로 전환되지 않는다. 변화하는 것은 재산의 사회적 성격뿐이다. 재산은 그 계급적 특성을 잃는다…. 임금 노동의 평균 임금은 최저 임금이다: 즉, 노동자가 맨몸으로 생존할 수 있을 정도의 양만큼. 우리는 결코 인간 삶의 재생산을 유지하고, 다른 사람의 노동을 부려 먹을 여력이 없는 노동 생산물의 이런 전용을 폐지할 생각이 없다.” (공산당 선언)

 

의심할 여지 없이 지적 재산은 개인 재산이 아니라 사유 재산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지적 재산은 생산적 상품이다. 지적 재산은 잉여가치를 생산하고, 이후 더욱 많은 잉여가치를 생산할 미래 상품의 토대를 마련한다. 정보는 더 많은 정보를 생산하고, 뉴스는 더 많은 뉴스를 생산하고, 지식은 더 많은 지식을 생산하고, 예술은 더 많은 예술을 생산한다. 그러므로 지적 재산권은 자본주의에서 이 비물질적 생산품의 창작자를 보호하기 위한 발명품이 아니라 자본 축적을 돕는 것이다. 베티그는 풍부한 실증적 증거와 함께 이 주장을 뒷받침했다. 

 

내가 보기에 자유문화를 지지하는 측과 자발적 무료 노동의 착취적 본질을 우려하는 측 간 논쟁은 교착 상태에 있다. 두 입장 모두 맑스주의 관점에서 지지되어야 한다. 그들은 서로 모순되어 보이지만, 맑스가 자본주의 내부 모순으로 이해하는 것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더 나아가, 지적 예술적 노동자를 위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은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유망해 보이지 않는다. 이 모든 것들은 자본가들은 이타적 이유로 자발적 무임금 노동을 지지하지 않으며, 착취당하는 사람들은 생계를 유지할 만큼만 번다는 단순한 사실로 귀결된다.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사유 재산 자체의 적법성에 대한 논의다. 재산 관계는 사회적 관계를 반영한다. 이제 우리는 원을 완성할 수 있다. 재산 관계는 우리를 사회학적 의미에서의 가치로, 그리고 가치에 대한 네 번째 접근, 즉 스피노자의 감성 이론에 바탕을 둔, 행동하는 힘으로서의 가치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또한 노동 개념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만약 자유문화가 사회에 도움이 된다면 (제대로 검토된 적이 없다), 사회는 이 자유문화의 창작자들을 지원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사회는 그들의 무임금 기부, 인류에 대한 그들의 선물을 지원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전 세계적 기본 소득은 이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자발적 무임금 노동과 자유문화 딜레마에서 촉발되어야 할 관련 논쟁은 노동 분업이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화가는 없다; 단지 다른 일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만약 사람들이 자본주의 재산권 체제에 맞서 그들의 힘을 사용한다면 그들은 투쟁에 참여할 것이다. 

 

“개별 노동에서 유래한 흩어진 사유 재산을 자본주의적 사유 재산으로 전환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이미 실질적으로 사회화된 생산에 의존하는 자본주의적 사유 재산을 사회화된 재산으로 전환하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리고, 폭력적이며 어려운 과정이다. 전자의 경우, 소수 강탈자에 의한 대중 재산의 몰수이지만, 후자의 경우 대중에 의한 소수 강탈자 재산에 대한 몰수다.” (자본론 1권)

 

맑스는 아마 이 투쟁에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낙관주의와 희망은 필요한 것이다.



9. 투쟁 (Struggle)

 

“계급 전쟁이 있지만, 전쟁을 일으킨 내 계급인 부자 계급이 이기고 있다.” (워렌 버핏, 2011)

 

매스미디어 시대에 커뮤니케이션 정치경제학자들은 맑스주의 이론을 다소 제한적 방식으로 적용했다. 디지털/분산미디어 시대에 커뮤니케이션의 정치경제학은 맑스의 개념을 더 넓은 방식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는 맑스 정치경제학의 몇 가지 핵심 개념들 - 특히, 서로 연결되어 있는 노동, 가치, 재산 개념 들 - 을 국가, 시장, 그리고 공동체의 흥미로운 혼합으로 구성된 우리의 현재 미디어 생태계에 대한 분석에 이 개념들의 유용성을 입증하기 위해 사용했다. 맑스 정치경제학의 중심에 있는 또 다른 개념은 계급 투쟁이다. 디지털/분산미디어는 저항과 자본주의 대안 건설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이 가능성은 억압된 자들의 투쟁에 의한 보다 근본적 변화 없이는 달성될 수 없다.

 

노동, 가치 그리고 재산과 마찬가지로, 계급 투쟁 개념은 매스미디어 정치경제학에서도 등장하지만. 오직 주변부 개념으로서이다. 핵심 개념이 되어본 적이 없다. “계급 투쟁 관점에서 디지털 기계화 전자 미디어를 둘러싼 계급 투쟁에 대한 일부 연구가 있었지만, 이들은 신루디즘(neo-Luddism)을 넘어서는 이론적 관점을 제공하지 못했다”라고 닉 다이어 위데포드(Nick Dyer-Witheford)(1999)는 옳게 지적했다. 

 

미디어와 투쟁의 이론화는 분산미디어 정치경제학자들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다. 21세기에 우리는 어떻게 계급 투쟁을 개념화할 수 있을까? 가치 사슬의 각 지점에서 착취에 저항하는 노동자 대리인이 있었고, 최근 정치경제학자들은 이들에 대해 상세히 다루었다. 정보화 시대의 투쟁은 또 해킹주의(hacktivism)와 ‘어나니머스’(Anonymous)와 같이 느슨하게 연결된 사이버 ‘그룹’이 전개하는 저항 형식들을 가리킨다. 투쟁은 디지털 커먼즈와 대체 재화와 구조의 구축에 투자된 모든 에너지 그리고 사회운동을 가리킨다. 

 

어나니머스’(Anonymous)

 

2011년은 첫 번째 세계적 봉기의 해였다. 소셜 미디어와 사회운동 간 구체적 관계는 더 자세히 연구할 필요가 있지만, 소셜 미디어가 사회운동과 정치활동가들에게 힘을 줄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디지털 시대에 미디어와 투쟁 간 연계는 복잡하지만 강하다. 분산미디어 정치경제학자들은 미디어 조직 혹은 미디어 산업을 벗어나 연구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 그들은 또 사이버 공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연구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 거리와 광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연구하고 있다.

 

맑스는 정말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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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후기

 

이번 챕터의 후기는 본문 내용과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본문에 등장한 학자들과 관련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블로그 글 - 창작 글이든 번역 글이든 - 에 인물과 현장 사진 싣는 것을 좋아한다. 이전 어느 글에서 일본인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글쓰기 방식을 좋아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녀의 글쓰기 방식은 과거 역사적 사실을 읽는 이의 눈앞에 그 현장이 있는 것처럼 묘사하는 방식이다. 이 블로그의 많은 글은 학술적이고 과거 역사를 다룬 것이다. 나 자신에게조차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 혹은 피부에 잘 와닿지 않을 수 있기에, 현장감을 위해 사진과 동영상을 활용하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글에 등장하는 인물 - 많은 경우 학자 - 의 인생 역정을 반드시 살펴보는 편이다. 위대한 사상가이기에 앞서 그들도 나처럼 생계를 위해 일하고, 이성과의 사랑에 괴로워하는 인간들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저자는 생계를 위해 자동차 공장 생산라인에서 일했고, 어떤 이는 구두 매장에서 구두를 팔았으며,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한 남성을 뜨겁게 사랑했던 여자이기도 했다. 이런 관점에서 이번 챕터에 등장하는 학자 중 세 명이 나의 시선을 끌었다. 역자 후기는 이들에 대한 소개로 대신한다.

 

첫 번째 인물은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다. 1961년생이니까 살아 있었다면 여전히 왕성한 연구 활동을 할 그였지만,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9월 이탈리아에서 갑작스럽게 병사했다. 그가 일반인에게 알려진 것은 2011년의 월가를 점거하라(Occupy Wall Street) 운동에서의 그의 적극적 참여 덕분이었다. "We are the 99 percent"라는 슬로건을 만든 것도 그였다. 소위 명문 예일대에서 조교수로 연구 활동을 하던 그는 2005년 재계약에 실패한다. 1999년 시애틀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 반대 시위와 같은 그의 적극적 사회운동 참여와 노동계급 출신인 그의 학계 엘리트주의에 대한 혐오가 겹쳐 괘씸죄에 걸린 것이다. 미국 학계의 담합으로 다른 미국 대학에서도 일자리를 찾지 못한 그는 결국 영국으로 학문적 망명을 해 그곳에서 계속 연구 활동을 했다. 2005년 당시 미국 대통령은 조지 부시 2세였다. 

 

두 번째 인물은 로널드 베티그(Ronald Bettig)다. 번역하다가 들어 보지 못한 인물이 등장하면 구글에서 먼저 한글로 검색해 본다. 검색된 한글 정보가 빈약할 경우 영문으로 넘어가 검색한다. 대부분 경우 정보가 빈약할지라도 한글에서 이름 정도는 검색이 되는데, 로널드 베티그는 아예 검색이 안 된다. 영문으로 검색했다. 위키피디아에 등재되어 있는 인물의 경우 화면 오른쪽 아니면 최상단에 뜬다. 그런데 Ronald Bettig는 위키피디아에 없는 것까지는 이해하는데 최상단부에 검색된 사이트는 뭔가 이상했다. 다름 아니라 불의의 사고로 숨진 이들을 추모하는 사이트였다.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난 뒤 우울증을 겪던 펜실베니아 주립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였던 그는 어린이가 있는 한 여성이 그의 집에 머무는 것을 허락한다. 베티그와 가까워진 그 여자는 베티그가 죽으면 자신에게 유산이 상속되겠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남자 친구를 끌어들여 베티그를 절벽 위에서 떨어트려 죽인 것이다. 그가 살해된 2016년 당시 그의 나이는 56세였다. 위 그레이버처럼 왕성한 연구 활동을 통해 사회에 기여를 할 수 있었던 그였는데 너무나 어처구니없이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인물은 앙드레 고르(André Gorz)다. 앙드레 고르를 아는 분들은 즉각 그의 아내에 대한 순애보를 떠 올릴 것이다. 그렇다. 한국에서도 출간된 ‘D에게 보낸 편지”는 그가 불치병을 앓던 그의 아내 도린(Dorine)에게 바친 연서다. 이 연서를 쓴 다음 해인 2007년, 앙드레 고르는 통증으로 힘들어하는 그의 아내와 함께 동반자살을 함으로써,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아내와 함께하고 싶다는 그의 소원을 이루었다. 이하는 편지의 일부다. 

 

“나는 내 인생을 직접 산 게 아니라 멀리서 관찰해온 것 같았습니다. 자신의 한쪽 면만 발달시켰고 인간으로서 무척 빈곤한 존재인 것 같았지요. 당신은 늘 나보다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모든 차원에서 활짝 피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삶을 정면 돌파했지요. 반면에 나는 우리 진짜 인생이 시작되려면 멀었다는 듯 언제나 다음 일로 넘어가기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내게 당신의 삶 전부와 당신의 전부를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 동안 나도 당신에게 내 전부를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말을 했지요.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둘이 함께하자고.”

 

(인용처: 장석주의 독서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