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역사, 인간 그리고 뉴질랜드

뉴질랜드 이야기

부자와 가난한 자 (Rich and Poor)

김 무인 2019. 12. 30.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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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가난한 자 (Rich and Poor) 

 

뉴질랜드의 계급 분열 (Class Division in Aotearoa New Zealand)

 

Bruce Curtis and Marko Galic

 

사실, 지난  20년 계급 간 전쟁이 진행되었었는데 우리 계급이 이겼다.

- 워렌 버핏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Where Are We Today?)

 

2015년 국제 자선단체 Oxfam에 의하면 이 지구 절반의 부(wealth)는 가장 부유한 1%가 소유하고 있다. 이 가장 부유한 1%는 이 지구 인구의 나머지 99%보다 더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부는 심지어 이 수치보다 더 집중되어 있다. 2013년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85명은 가난한 35억 명, 혹은 지구 인구 절반보다 더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다. 이 숫자는 2014년 66명으로 떨어졌다. 명백히 부의 집중화와 빈곤의 확산은 현재 진행형이다. 뉴질랜드 상황도 거의 같다: 

 

가장 최근 자료인 2013년 Credit Suisse Global Wealth Databook에 따르면 44,000명의 Kiwi(뉴질랜더)들이...  3백만명의 뉴질랜더보다 많은 부를 가지고 있다. 달리 표현하면 최상위 1%가 25.1%의 부를 가지고 있는데 이 의미는 하위 70% 인구보다 많은 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 뉴질랜드에서 가장 부자인  Graeme Hart는 US $70 billion (700억 달러)로 Forbes 부자 순위에서 200위를 기록했다. 그의 부는 뉴질랜더 하위 30% 혹은 130만 명의 재산보다 많은 것이다.

 

사회적 불평등은 세계적으로 그리고 국내에서도 가속화되고 있다. 뉴질랜드를 특징짓는 사실 중 가장 우려되는 것 중 하나는 이 나라가 소위 선진국 중 가장 불평등한 사회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뉴질랜드는 20세기의 수십 년 동안 허구적 신화를 믿어 왔다: 평등주의에 대한 신화. 예를 들어, John Key (이전 국민당 정부 시절의 수상:역주)는 노동자 계급의 아들로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국가가 제공하는 주택에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상이 되었다. 이 신화는 우리가 평등한 사회 그리고 노동자들과 그 자녀에게 천국이며 사회적 경제적 발전과 함께 정착민과 원주민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자랑스러운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신화는 David Bedggood가 그의 획기적인 저서 Rich and Poor in New Zealand에서 묘사했듯이 과거를 돌이켜봐도 절대 사실이 아니다. 현재에 적용하면 아주 터무니없는(nonsense) 소리이다. 아직도 일부 사람에게는 이 ‘평등주의 신화’가 사실로 느껴질지 모르겠으나 대다수에게는 명백히 아니다. 

 

 

 

 

이 부자와 가난한 자와의 격차는 제4기 노동당 정부에 의해 도입되고 그 뒤를 이은 모든 정부가 추진한 신자유주의 정책들에 의해 가속화되면서 더욱 벌어졌다.  신자유주의는 수익률 증가에 초점을 맞춘 자본주의 경제를 구성하는 한 방식이다.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신자유주의 정책들은 뉴질랜드의 사회적 삶을 변모시켰다. 민주적이고 열린 사회를 위한 기반으로 여겨졌던 많은 사회적 관계들이 국유 재산이 거대 기업에 판매됨으로써  혹은 국가가 제공하는 서비스에도 ‘사용자부담 원칙(user-pays)’을 도입함으로써 상품화되었다. 다시 John Key로 잠시 돌아가 보자: 그는 국가로부터 월세 보조를 받는 국가 소유 주택에서 자랐고 그의 어머니는 국가 수당을 받았었다. 그는 또한 초등,중등 그리고 대학교육을 무료로 받았다. 신자유주의를 밀어붙인 노동당과 국민당의 거의 모든 정치인은 그들의 대학 교육을 무료로 받았다; 그럼에도 이들은 오늘날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학비는 자신이 내도록 하는 대학 교육의 상품화를 추진했다. 여러분은 우리로 하여금 뉴질랜드의 평등주의를 가장 믿게 하고 싶은 사람들(신자유주의 정치인들과 정책 입안자들)야말로 그것이 허구적 신화임을 만든 장본인이라고 말하고 싶을지 모른다.  

 

이글은 2015년 기준 세계에서 3번째로 부자인 워렌 버핏(Warren Buffett)의 언급으로 시작했다. 워렌 버핏은 적자 기업을 해체함으로써 그의 부를 축적했는데 아마도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은 미국인 노동자를 실업자로 만들었다. 이것은 그에게 윈-윈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실업자들이, 마약 운이 좋다면, 종착지로 선택하게 되는 미국에서 번창하는 트레일러 야영지 운영 산업의 큰 손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부는 거대한 권력을 동반하며 워렌 버핏처럼 과시욕이 있는 사람에게 이것은 놓칠 수 없는 자랑의 기회이다. 그러나 버핏이 ‘솔직하게(telling it like it is)’ 언급한 계급의 개념을 통해서 우리는 불평등의 진정한 근원을 밝혀보고자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David Bedggood - 1980년에 발간한 그의 책은 지난 수 십 년간 뉴질랜드 사회학의 베스트 셀러이다 - 의 발자취를 따라가려 한다. 이 책의 완전한 제목은 ‘뉴질랜드의 부자와 가난한 자: 계급, 정치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Rich and Poor in New Zealand: Critique of Class, Politics and Ideology)’이다.



두 거대 계급: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Two Great Classes: The Capitalist Class and the Working Class)

 

부자와 가난한 자(매일 밤 굶주린 채 잠자리에 드는 전 세계 8억 명의 사람들을 포함) 간의 갈수록 벌어지는 격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가 사는 현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자본주의의 결과물들에 대해서 우리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 터무니없을 정도의 더욱 많은 부의 보다 적은 숫자의 사람들에로의 집중; 절대적이며 가혹한 빈곤과 실업자 그리고 저소득층 노동자의 상대적 빈곤의 확산; 지루하고 낮은 임금의 ‘McJobs(맥도널드 종업원의 일에서 기원한 급여가 낮고 단순한 일로서 미래 희망이 없는 직업: 역주)’; 불가능한 주택 구매; 사회복지의 축소; 그리고 희망의 종료 - 그럼에도 이 메커니즘은 실체가 가려지면서 정상적이고 영원한 것처럼 보이고 있다. 자본주의의 핵심에는 이 시스템의 핵심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두 적대적 계급의 갈등이 있다.

 

가장 간단한 계급의 정의는 ‘생산수단에 대한 관계를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두 가지가 이 정의로부터 떠오른다: 1. 생산 수단의 중요성; 그리고 2. 계급은 다수; 즉 여러 계급이 있다. 생산수단은 정확히 말하면 생산을 가능하게끔 하기 위해 현대 사회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다. 생산은 이전 인간의 노력 결과물과 합쳐진 인간의 노력 혹은 ‘노동(labour)’을 포함한다: 추출된 원자재, 기계, 도구,공장,설계와 계획, 그리고 더 나아가 지적 재산권. 우리는 이 모든 이전 생산의 결과물들을 캐피탈(capital)이라고 부른다. 이동이 쉽고 가변적인 형태의 캐피탈은 돈(money)이다.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과의 관계는 소유권 혹은 비소유권이다. 사회 내 한 그룹의 사람들은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그들을 ‘자본가(capitalist)’ (혹은 ‘부르주아’)라 부른다; 다른 그룹의 사람들은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우리는 그들을 ‘노동자(worker)’ 혹은 노동자 계급(혹은 ‘프롤레타리아’)이라 부른다. 뉴질랜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계의 나머지 국가와 마찬가지로, 노동자이다.

 

단순히 대다수 사람들이 노동자가 아니라 ‘압도적’ 다수의 사람들이 노동자이다. 계급을 정의하기에 달렸지만, 인구의 1%가 자본가라는 것도 아마 부풀려진 수치일 것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당신이 당신 인생에서 만날 거의 모든 사람은 그들이 잘 차려입고 부유해 보이며 자신을 중산계급에 속했다고 스스로 생각하더라도 노동자 계급에 속한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 계급은 누가 생산수단을 가졌고 누가 갖지 않았는지에 대한 척도이다. 자본가들은 자본을 소유하고 있고 이 때문에 그들은 생산과정의 결과물인 상품(goods)과 서비스 형태의 상품(commodities)을 소유한다. 이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생산수단과 생산된 상품을 소유하는 것이 자본가가 이익을 창출하고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는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자본축적 - 생산수단의 소유로부터 창출된 이익을 통해서 - 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견인차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 것은 자본주의적 축적을 위해 끊임없이 순환하는 자본주의 법칙이다. 자본가들은 생산과정의 결과물로 그들이 소유한 상품들의 판매를 통해 번 돈이 이 상품들을 생산하는데 소요된 비용보다 클 때 이익을 창출한다. 만약 생산비용이 상품판매 금액보다 큰 상태가 장기간 이어지면 자본가들은 파산하다. 그들은 생산수단의 소유자이기를 멈추는 것이다. 그러나 이익의 잠재력은 상품판매 시점이 아닌 생산과정에서 창출된다. 이 잠재력은 간단하다; 노동자들이 그들이 생산한 상품의 가치보다 덜 임금을 받으면 된다. 노동으로 창출된 가치와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임금의 차이는 ‘착취율(rate of exploitation)’이라고 불린다. 자본가들의 이익은 착취의 직접적 결과물이다. 착취율이 높을수록 이익은 높아진다.

 

착취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근본적 적대 관계(antagonism)이며 부당함(injustice)이다. 착취는 압도적 다수의 노동자가 그들의 정신, 신체 그리고 심지어 감정까지 세상의 모든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해 사용하는 시스템의 불공평함(inequities)을 드러낸다; 노동자들은 보상으로 그들 노동가치의 한 부분만을 임금으로 받게 된다. 이 것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왜 노동자들은 노동하는가? 답은 그들의 생산수단과의 관계에 있다. 그들은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고 그 결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것, 노동력을 파는 수밖에 없다. 노동자들은 따라서 자본주의에 절대적으로 강하게 묶여 있다. 이 시스템이 존재하는 한 출구는 없다. 일하지 않는 혹은 일자리를 찾을 수 없는 노동자는 실업자로서 복지수당을 위해 소득세를 내는 다른 노동자들의 자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쁘띠 부르주아와 ‘중산계급’(The Petite Bourgeoisie and ‘the Middle Class’)

 

계급은 생산수단을 누가 가지고 있고 누가 가지지 않았는지에 대한 잣대이다. Karl Marx는 자본주의의 논리상 모든 사람들은 이 거대한 두 계급(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중 하나에 점진적으로 속하게 되며 노동자 계급의 숫자가 증가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 두 계급 사이에 두 계급의 특징을 조합한 제3의 계급이 있다. 이 계급은 쁘띠 부르주아(작은 자본가)다. 이 작은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모든 노동을 의존하기에는 충분치 않은 약간의 자본과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다. 그 결과 쁘띠 부르주아는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자신을 위한 노동. 이들은 종종 ‘자영업자(owner-operator)’로 불린다. 이들은 창업 기업, 일부 전문직/상인, 가게 주인, 택시운전사 그리고 뉴질랜드는 역사적으로 가족형 농부들이 이에 포함된다. 쁘티 부르주아와 부르주아 간의 구분을 하기는 쉽지 않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빌 게이츠는 그를 위해서 일을 한다. 잘 알려졌다시피 그는 아주 열심히 일하는데 마이크로소프트의 생존을 위해서 일을 굳이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쁘티 부르주아에게 있어 ‘자신을 위한 노동’은 그들 비즈니스의 생존에 필수적이다. 소규모 자본은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더불어 자신에 대한 착취가 필요하다.

 

실제로 이 ‘자기착취(self-exploitation)’는 가족들의 무급노동을 포함한다. 막스는 이 쁘띠 브루조아는 자본주의하에서 지속해서 쇠퇴하고 파산하여 노동자 계급 혹은 심지어 ‘룸펜 프롤레타리아(lumpen-proletariat)’ - 사회의 부랑자 - 로 전락할 것으로 예측했다. 이 예측은 우리가 보고 있듯이 맞았다. 예를 들어, 압도적 다수의 쁘띠 부르주아의 비즈니스들은 이익을 창출하기가 어려운데 이는 그들 자본이 충분치 않기 때문에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비즈니스 운영이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덧붙여, 대규모 비즈니스를 선호하는 자본주의 구조는 독점에 유리한 환경을 창조함에 따라 쁘띠 부르주아 비지니스는 생존하기가 어렵게 된다. 작은 건강식품점 자영업자를 생각해보라: 그 지역의 슈퍼마켓 체인에서 몇 달간 선반에 얼마의 건강식품을 추가하면 이 작은 건강식품점은 쉽게 파산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생산수단의 소유와 통제에 관련된 3계급에 대해 알아보았다: 자본가, 쁘띠 브루조아 그리고 노동자. 인구를 이 3계급으로 나누는 작업은 쉽지 않다. 아마 자본주의의 최고 비밀일 것이다. 민주주의, 평등주의 등을 옹호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정부들은 이 같은 통계를 수집하는 것에 확실히 관심이 없다. 그러나 ‘자본가’, ‘노동자 계급’, 그리고 ‘쁘띠 브루조아’들은 우리가 사회구조를 얘기할 때 매일 사용하는 단어들은 아니다. 대신,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산계급(middle class)을 얘기한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이 중산계급에 속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거나 그렇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중산계급이라는 카테고리는 우리가 위에서 다룬 3계급과는 매우 다른 실체이다. 자본가, 노동자 계급 그리고 쁘띠 부르주아 계급은 객관적 실체이다. 개인은 이들 중 한 계급에 속하게 되는데 이는 이들의 생산수단과의 관계 때문이다. 자신이 어디에 속해있는지에 대한 이들의 생각이 이들의 계급을 결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계급의 객관성이다. 중산계급 개념은 실제로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이는 주관적이며 주관성은 사고와 이데올로기 영역에 속한다.

 

자본주의의 가장 큰 성공은 - 많은 사람이 자본주의의 지속적 생존의 이유로 꼽는다 - 이데올로기적이라는 점이다. 시스템으로서 자본주의는 대부분의 노동자에게 그들이 ‘중산계급’의 멤버라는 (혹은 멤버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을 계속 주입해 왔다. 자본가들은 단지 생산수단만 소유한 것이 아니다. 자본가들은 우리가 스마트폰, 랩톱 그리고 텔레비전을 통해 ‘소비하는’ 정보와 오락산업에 의해 생산되는 상품 대부분을 다루는 미디어도 소유하고 통제한다. 이들 상품 중 하나는 즐거운 중산계급의 삶의 방식에 대한 매혹적 이미지이다; 실제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이런 이미지들은 우리에게 부와 명성을 약속하고 자본주의가 절대 현실화시켜줄 수 없는 열망을 제공한다.

 

중산계급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까닭에 자본가 계급에 종종 이데올로기적인 협조자가 되는 고소득 노동자들로 구성된다 (그들은 충분한 특혜를 받고 대신 현 시스템이 재생산되도록 돕는다.). 이 상대적 고소득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추가 급여를 받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자본가들에게 파는 노동은 다른 노동자들의 통제 혹은 자본가들이 그들의 특권을 유지하고 심지어 더 부유해지는 전략 창조에 사용되기 때문이다. 슈퍼바이저, 매니저, 분석가, 영업사원, 과학자, 공무원 그리고 교사와 대학교수 등을 생각해보라. 다른 노동자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것이 이 중산계급 상대적 고소득 노동자들이 사적 그리고 공공 섹터에서 하는 일이다 - 직접적 감독/관리를 통해서 혹은 간접적으로 지침의 제정과 시행, 표준설정(benchmark), 정책들, 학사 일정과 심지어 새로운 감시와 책임의 기술을 통해서.

 

 

패권과 ‘분리해서 통치하라’ (Hegemony and ‘Divide and Rule’)

 

우리는 ‘왜 노동자는 일을 해야 하나’라는 질문에 대해 ‘그들은 선택의 여지가 적거나 없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 유사하게, 더 많은 급여를 바라는 것은 합리적 소망처럼 보인다. 그러나 왜 노동자들은 중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믿는가? 밖에서 보면 때로 이는 바보스럽다 - 많은 미국인은 트레일러 야영장에 살면서 그들이 자신 소유의 트레일러를 가졌다는 이유로 자신들을 중산계급으로 간주한다. 이것이 이데올로기와 패권(hegemony)의 힘이다. 자본주의 시스템과 그 시스템이 창출한 부당함이 노동자 계급과 ‘중산계급’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내재화될 때 우리는 패권의 역할에 관해 얘기할 필요가 있다. 막시스트 이론가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는 패권을 자본가 계급의 다른 그룹들에 대한 정치적, 문화적 그리고 경제적 지배라고 묘사했다. 패권적 지배는 강압적 수단 (경찰과 군대)이 아닌 사상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정당화된다. 우리가 이 글 시작 부분에서 논한 평등주의에 대한 신화가 그런 사고의 예다. 패권은 우리 일상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발견될 수 있다.: 소비지상주의자(consumerist) 생활 방식의 강요와 자본가 계급의 이해를 해치지 않는 사회적 과정들부터 단결(solidarity)과 부당함에 대한 저항의 기초가 되는 집단적 유산(memories)들에 대한 검열에 이르기까지.

 

1차 세계대전 100주년 기념행사는 이런 조작의 대표적 예다. 우리는 이 전쟁이 자본가들이 영토와 자원을 놓고 벌인 전 세계적 투쟁임을 망각할 것을 권장 받고 이 전쟁에서 학살된 청년들이 뉴질랜드를 만들었다고 믿을 것을 기대받고 있다. 더 나아가 계급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거의 전적으로 가려졌다. 교육 시스템, 미디어 그리고 심지어 오락산업의 거의 모든 부분이 우리 세계의 증가하는 우울한 현실을 다루는 계급에 기초한 내용은 배제하고 있다. 전쟁, 빈곤, 환경오염, 불관용, 사회적 경제적 배척, 인종주의와 많은 다른 부당 함(injustice)들이 대부분 사람(노동자)들의 멍청함 때문에 혹은 ethnicity, 국적, 성별, 성적 취향(sexuality), 종교 등과 같은 ‘내재적’ 차이의 결과로 설명되는 경향이 있다. 계급의 핵심적 위치를 가리는 행위는 시스템으로서 자본주의가 자신을 보호하는 행위이다.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자본가 계급은 루이스 알튀저(Louis Althusser)가 언급한 ‘국가의 억압적이고 이데올로기적 기구(apparatuses)’를 사용한다. 억압적 기구는 경찰, 군대 그리고 형법 제도, 국가사회기관과 다른 권위적 힘을 포함한다. 이데올로기적 기구는 대중매체, 학교와 대학, 종교 제도와 소비자 문화의 대부분 형식 들을 포함한다.

 

뉴질랜드의 경우, 노동자 계급은 대부분 ‘억압적’ 기구의 대상이다 (예: 교도소 내 높은 마오리 비율, 오클랜드 남부와 같은 노동자 계급의 공동체에 대한 경찰의 지속적인 감시, 노조 운동에 대한 파괴 등). 반면, 소망을 간직한 중산계급은 대부분 계급 구분과 사회적 불평등이 큰 이슈가 되지 않는 성공적인 나라를 묘사하는 ‘이데올로기적’ 기구의 대상이 된다. 이 이데올로기적 기구는 단순히 적대적 계급관계를 가리고 정착민 사회의 특권을 지지하기 위해 젖과 꿀이 흘러야 할 이 땅에 대한 식민화 역사를 ‘망각’케하는 것뿐만 아니다; 뉴질랜더들에게 지속해서 자본주의가 유일한 대안임을 받아들일 것을 주문하고 있다. 가장 명백하게는, 자본가 계급에 대한 단결된 정치적 행동을 최소화하기 위해, 매스미디어는 ethnicity에 기반을 둬서 노동자 계급 ‘내’의 갈등을 확대 재생산한다. 이런 ‘분리해서 지배하라’ 전략은 자본가 계급에 권력을 유지하는데 중심이 되는 전략이다.

 

 

중산계급이 되길 원하십니까? 프레카리아트에 온 걸 환영합니다 (You Want to Be Middle Class? Welcome to the Precariat)

 

우리는 위에서 문제가 되는 중산계급의 실체에 대해 논했다. 우리는 중산계급을 막시시트에 의해 사용되는 객관적 의미의 계급보다는 고임금 노동자들의 계층(stratum or layer)으로 이해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지난 20여 년간 새로운 노동자 계층이 뉴질랜드와 해외에서 형성되었다: 프레카리아트(precariat). 프레카리아트는 직장과 삶에 있어 precariousness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의 구조적 조건들로 특정 지워지는 사회 계층이다. 그들은 불안전 취업과 실업의 순환고리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다. New Zealand Council of Trade Unions(2013)에 의하면 뉴질랜드 노동인구의 최소 30%인 635,000명이 이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밝혔는데 이 직장의 특징은:

 

노동자가 좋은 삶을 위해 필요한 안정성을 거부하고 노동자 자신이 근무 환경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축소함으로써 그들 본인과 가족 그리고 공동체에까지 부정적 후속 결과를 일으킨다. 이 직장은 고용주를 위한 허지만 노동자들을 위한 것은 아닌 다양하고 변화하는 성격의 일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직장에서 적응의 부담은 노동자가 져야하고 고용 혹은 계약관계에서 힘의 불평등은 노동자에게 불이익을 가져다준다.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의 한 결과는 노동자들의 단결과 집단적 도움의 최소화이다. 게임의 법칙이 오로지 자본가 계급에 의해 만들어진 ‘유연한 노동시장’에 자리잡은 경쟁 탓에 집단적 단결을 유지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이것은 임시, 파트타임 혹은 캐주얼 직업에 적용되는데 갈수록 고소득을 희망하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모든 노동자에게 적용되고 있다. 계급관계에 대한 최근의 분석들은 노동자 계급만 그런 것이 아니라 소위 중산계급 역시 불안정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조건들을 유지하기 위해 자본가들이 가장 많이 쓰는 논리는 지속적인 직접적 혹은 간접적인 해고 위협이다 (‘당신의 자리를 원하는 10명의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

 

 

결론: 패권을 넘어서 (Conclusion: Beyond Hegemony)

 

Marx가 150년 전에 비판적으로 분석했던 자본주의 시스템은 그때 이후 여러 면에서 심지어 더욱 기생충 적(parasitical)으로 변했다. 최대한의 이익을 얻기 위한 지속적인 욕망과 열망으로 지배된 자본가 계급은 생산품의 가격을 올리는 대신 노동 비용을 낮춘다. 첫째, 자본가들은 전통적 산업들을 제3세계로 이전했는데 그 곳에서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과 노동자 보호 혹은 어떤 종류의 노동 안전 장치가 없어도 노동을 하기 때문이다. 둘째, 계속해서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자본가들은 자신의 국가 내 고용관계를 바꾸었다 - 그리고 지금도 상당 부분 지속하고 있다. 상위 계급(자본가들)과 무지한 ‘중산계급’(시스템의 한 부분인 고소득 노동자들로서 자신들의 주변에 벌어지는 일들을 무시한다)의 쾌락적 삶을 떠받치기 위해 땀을 흘려야 하는 뉴질랜드를 포함한 세계의 노동자들은 신자유주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시스템의 희생자이다. 동시에 지배적 미디어의 담론에서 노동자들은 비용 혹은 경비로 취급되지 경제의 근본적인 한 부분으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뉴질랜드의 경우, 자본주의 시스템은 19세기 식민주의 경험과 20세기 이후의 신식민주의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우리의 식민 역사는 종종 평등에 대한 신화와 과거에 대한 조작(reinventing)을 통해 가려져 왔다. 그러나 식민화는 구조적이고 지속적인 불평등을 창조했다. 뉴질랜드 자본주의는, 지배 엘리트(자본가 계급)의 특권과 함께, 마오리 땅에 대한 강탈에 기반을 둬서 설립되고 지속하여 왔다; 원주민들의 노동자 계급 심지어 최하층 계급(underclass)으로의 전락; 마오리 관습의 체계적 파괴; 그리고 이 ‘새로운’ 땅에서 진행 중인 자본주의 생산 양식. 백인 정착민 사회와 그 사회적 제도 그리고 자본주의 정치 경제의 발전과 함께, 토지는 노동력 - 마오리, 파케하, 퍼시피카 그리고 최근의 이민자들 포함 - 에 대한 진행형 착취의 한 구성 요소가 되었다. 오늘날, 뉴질랜드는 빈곤을 촉진하고, 착취, 기회주의 그리고 탐욕을 지지하는 세계 자본주의 시스템 내에서 계급에 기반을 둔 사회가 되었다.

 

그러나, 억압적 계급관계는 억압받는 자들의 계급의식 고양에 따라 항상 도전받고, 바뀌고 파괴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사회적 부당함에 대한 저항은 사람들을 위한 나은 조건들을 가져온 변화들과 더불어, 국가 제도들 내에서 (노조와 사람들의 곤경을 인식하는 정당들을 포함해서) 혹은 완전히 시스템 바깥에서 (사회 정치적 운동과 자본주의 외부에서 해결책을 구했던 다른 급진적 운동) 성장해 왔다. 패권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그것은 지속적 위협 하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지배 엘리트들의 주 공포는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어떤 ethnicity이든 상관없이) 특권과 불리라는 지배적 시스템의 종료를 가져오는 것이다. 비판적 사고를 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권력을 가진 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틀과 경계의 바깥에서 생각하고 우리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우리 공동체에 이바지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기존의 시스템에 대한 대안이 진정 불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