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 머리말
이 글의 원문에는 ‘commodity fetishism’이라는 용어가 수시로 등장한다. ‘Commodity’는 ‘상품’이라는 한국어로 주저함 없이 번역할 수 있었는데 ‘fetishism’은 주저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이번 글의 번역 용어, ‘물신성’(物神性)이란 어려운 용어 대신 ‘페티시즘’이란 단어가 더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페티시즘이라고 번역했을 때 문제는 페티시즘이라는 용어가 갖는 두 가지 의미 중 물신숭배라는 의미가 아닌 다른 의미, 즉 성적 페티시즘을 먼저 연상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학문을 하지 않는 일반 현대인에게 페티시즘이란 용어는 사람이 아닌 물건이나 특정 신체 부위 등에서 성적 쾌감을 얻으려는 경향으로 먼저 다가갈 것이다. 이런 연유로 이번 글에서 fetishism은 물신성으로 번역한다.
통상 원시적 종교에서 사물에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숭배할 때 우리는 물신성 혹은 물신숭배라는 개념을 적용한다. 맑스의 상품 물신성 역시 정확히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상품’이라는 인간 생산품이 마치 인간보다 우월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행세하고 많은 이들이 이를 믿고 따르는 현상이다. 참고로 영어판 위키피디아의 정의 혹은 간단 요약은 “상품 물신성은 생산과 교환의 경제적 관계를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가 아닌 사물들(화폐와 상품)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적 관계로 이해한다”이고, 한국판 위키피디아의 경우, “ 사회적 관계가 인간 대 인간이 아니라 시장에서 교환되는 돈과 상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을 일컫는 용어다. 상품이 물신숭배 됨으로써, 사람들은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경제적 가치가 객관적이고 고유한 가치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된다”이다.
번역하면서 ‘뭐, 다 아는 이야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하고 또 하나’라는 생각도 드는 한편, 역설적으로 글에 등장하는 많은 저자들의 한결된 통찰이 장황하게 느껴질 정도로 모든 것이 상품으로 구성된 현대 상품 세계에 위기의식 없이 - 있어도 상당히 무뎌진 - 익숙해져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런 나 자신을 보면서 다시 한번 “깨어있는 사회학적 상상력”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너무도 당연시하며 무심히 지나치는 일상을 역사와 사회라는 드넓은 시공간 속에 위치시키며 이를 조감도처럼 바라보고 이해할 줄 아는 날카로운 상상력이 우리 곁에는 항상 필요하다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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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상품의 교환과 사회적 전체성 (The Exchange of Commodities and Social Totality)
아래의 짧은 요약은 맑스에 충분히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불필요해 보일 수 있지만, 그의 전체 주장에서 교환, 등가, 상품이 갖는 역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자본주의 생산 과정에서 생산된 제품들은 필연적으로 상품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상품들은 다른 상품들과 교환 관계에 놓이는데, 이 관계는 시장을 통해서만 구현이 가능하다. 이 과정을 통해 상품은 완성된다: 상품의 사회적 특징, 사회적 수요로 인한 상품의 교환 능력, 그리고 시장은 이들 상품을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만약 제품들이 시장을 통해 교환될 수 없다면 그것들은 실제 생산자에게만 유용한 제품들이 되어, 생산 과정에서 실제 생산자들만을 위한 사용가치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 그러나 자본가가 이들 제품을 생산하는 가장 큰 이유는 대부분의 경우 시장에서 가격 형태로 표현되는 교환가치의 창출에 있다. 보편적 등가를 위한 이들 제품의 교환 능력 - 이 능력은 잉여 가치의 추출을 비교적 간단하게 만든다 - 이 이들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노동자를 고용하는 유일한 이유다. 설사 어떤 것이 사회에 매우 유용할지라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교환가치가 없다면 자본가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이런 것들은 대신 기껏 해 봐야 자본주의 사회의 다른 지원 시스템(예, 복지 국가)이 케어할 것이다.
더 나아가, 제품(상품)을 시장에서 파는 사람은 자본가 계급이기 때문에 노동자는 생계 수단으로써 이 제품들을 구입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노동자는 본의 아니게 자본의 축적 사이클 그리고 자본주의 시스템 전체의 재생산을 돕게 되며, 결과적으로 자신에 대한 착취를 영속화한다. 결과적으로 노동자는 생산 수단으로부터의 분리를 재확인함으로써 의도와 상관 없이 기존 계급 관계의 유지에 도움을 준다. 따라서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에서 피할 수 없는 필수적 부분으로서, 이는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라는 재산 관계에 기초하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현대 사회와 자본의 역사는 물론 사회적으로 형성되었지만, “거의 자율적인 발전 논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은 일정 정도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시스템은 그 시스템을 구성하는 개별적 주체의 통제를 벗어난 역학 관계를 생성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특히 맑스가 상품에 부가된 “비물질적” (교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명확해진다. (교환) 가치는 비록 비물질적이지만 주관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객관적인 동시에 시공간에 따라 지속해 변한다. 왜냐하면 상품은 특정 사회 유형에 따라 달라지는 사회적으로 유용한 (그리고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술의 발전이나 자연환경 등과 연계된 생산성의 등락 때문에 (교환) 가치는 변한다.
맑스가 말한 것처럼, “교환가치는 우연적이고 순전히 상대적인 것처럼 보인다. 결과적으로 상품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교환가치로서 본질적 가치는 용어상 모순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주장을 더 들어보면 이런 생각은 천박한 경제학의 전형적 주장인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상품의 가격은 변동하지만, 가치나 시장에서의 표현(가격과 화폐를 통한)은 임의적인 것으로 볼 수 없다. 그것들의 공통 분모는 전체 자본주의 경제의 맥락 속에서 객관화된 (추상적) 노동의 양이다. “상품의 사용가치에서 객관화된 노동 시간은 사용가치를 교환가치, 즉 상품으로 전환시키며 그 가치의 정확한 크기를 측정하는 기준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자신은 특정 상품을 만들기 위해 사회적으로 얼마나 많은 노동 시간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실질적 영향력을 거의 행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상품 세계에서 이것을 결정하는 것은 시장의 힘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노동자는 시장에서 다른 노동자들과 직접적 인간관계를 맺지도 않는다. 이 모든 관계는 상품 간의 객관적인 양적 관계(보통 화폐 형식으로 표현)로 표현되는데, 이 물질적 베일 뒤를 살펴봐야 갈등이 발생할 수 있는 생산의 적대적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맑스의 주장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주장의 전체성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관되게 변증법적 접근법을 유지해야 한다. 이 접근법을 통해 우리는 자본주의 질서의 총체적 측면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즉, 상품, 가치 혹은 추상적 노동과 같은 매우 추상적 개념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총체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개념들은 모두 그것들에 영향을 미치고 조건을 형성하는 시스템의 세포 부분들이다. 따라서 이 개념들이 서로 혹은 더 넓은 경제적 사회적 시스템으로부터 분리된다면 적절하게 분석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전체성에 대한 이런 요구는 변증법의 요구 사항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맑스의 주장은 세계적이고 포괄적이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것은 상품 형태 자체에 집중하면 그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놓칠 것이라는 점이다: 상품은 사실 객관적 사회적 관계이다. 상품이 다른 상품과 교환 관계를 맺고 상품 세계의 일부가 된 완전히 발전된 사회적 분업을 가정할 때, 우리는 축적 과정의 다른 부분 역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런 상품의 교환가치가 실현되고 “측정”되는 순환 영역 (상품은 “직접적’으로 측정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항상 다른 상품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측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품이 교환관계에 편입되기 전까지는 특정 상품이 생산되는데 필요한 사회적 노동 시간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다. 한편 생산 영역은 임금 노동이 이런 상품들을 생산하는 곳이다.
우리가 볼 수 있듯이, 상품들의 교환이 자율화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완전히 상품화된 사회를 위해서는 특정 사회 구조가 자리 잡고 작동해야 한다. 에티엔 발리바르(Etienne Balibar)의 표현을 따르자면, “노동 생산물(즉, 상품)에 대한 교환 가치를 부여하는 생산과 유통 구조는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며, ‘발전된’ 상품의 보편적 등가 형식인 화폐의 존재는 그 구조에 필요한 기능 중 하나이다(2007).” 이 모든 개념과 관계는 발전되고 제대로 작동되어야 한다.
2.3 등가성과 실제 추상화 (Equivalence and the Real Abstraction)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 상품 형태의 출현은 본질적으로 일시적이었다. 루카치가 지적했듯이, 그 이유는 교환가치가 아직 자체적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채 사용가치와 직접적으로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생산의 목적은 사용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며, 공급이 수요를 초과했을 때만 교환 수단이 된다.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 끝없는 (자본) 축적이 가능하게 된 것은 ‘상품’이 성공적으로 사회에 침투하여 지배적 형식이 되었을 때였다. 그렇기 때문에 루카치는 “상품은 전체로서 사회의 보편적 개념이 되었을 때 그 왜곡되지 않은 본질이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발전은 인간의 활동과 노동이 객관화되고 인간의 소망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인간을 소외시키는 자율성으로 인간을 통제하는” 현대 자본주의 등장 이전에는 가능하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인간 노동의 필요한 추상화는 상품에 포함되고 경제에서의 추상화 과정은 완성된다. 이전 생산 양식의 목표는 특정 공동체 관계 내에서 개인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사용가치의 생산이었지만,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유일한 목표는 “교환가치의 생산, 즉 가치를 위한 가치의 창출”이 된다. 레오폴디나 포르뚜나띠(Leopoldina_Fortunati, 1989)에 따르면, 이런 변화는 “개인이 여전히 가치 창출의 유일한 원천임에도 불구하고, 상품, 교환가치를 사용가치로서의 개인보다 우선순위에 올려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발전은 특정 종류의 합리화가 필요하다. 루카치(1971)에 따르면 이 합리화는 ‘계산이 되고 계산이 될 수 있는 것’, 즉 불평등한 것들(사용가치) 간의 등가성(교환가치)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방법인 합리적 측정 수단에 기반을 두고 있다. 존-레텔(1972)은 이 합리화를 수학적 추론의 한 종류로 이해했다. 이런 수학적 추론은 교환 추상화(그는 이것을 객관적 지식과 “정확한” (exact) 과학과도 연계시켰다)와 연결된다. 이런 발견은 만약 교환 과정이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한 사회 내에서 자체 재생산되려면 등가성의 완전 보편화가 이뤄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완전히 발전된 등가성은 동등하지 않은 것들 사이에서 이룩되어야 한다. 동등하지 않은 것들이 시장에서 교환되기 위해서는 특정 기본적 특성들을 통해 그것들이 측정 가능하고 따라서 비교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맑스의 가치 이론에서 이 특성들은 ‘추상적 노동’과 ‘노동 시간’이다). 이 발견은 맑스의 분석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추상적 개념들로서 모든 자본에 내재한 ‘상품’, ‘추상적 노동’ 그리고 ‘가치’라는 자본주의 세포 형식들로 우리를 다시 안내한다. 위 세 개념은 가정 추상적 의미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필수적 부분들이다.
추상화(abstraction)는 사회 분석을 위한 사고 과정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이고 사실에 기초한 추상, 즉 “사고 속 추상이 아닌 시공간에서 작동할 수 있는 추상”이다. 이 추상화는 여러 근본적 개념을 통해 발전한다: 교환 추상화, 상품 추상화, 노동 추상화, 시간 추상화 등 (존-레텔, 1972). 맑스가 지적했듯이, “완전한 의미에서 다른 종류의 노동 간 동등성은 오직 그 노동들의 실질적 불평등으로부터 추상화를 진행할 때, 그 노동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특성들, 소비된 노동력과 추상화된 노동, 로 환원될 때만 가능하다”(맑스, 1867). 그의 이런 주장은 추상적 노동을 넘어 다른 범주로 더 확장될 수 있다. 마르쿠제(1955)에 따르면:
“추상화는 그 대상이 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에 의해 변증법적 방법에 적용된다. 우리는 심지어 추상화는 자본주의 자신의 작품이며 맑시즘의 방법론은 오직 이 과정을 따라갈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는 구체적 노동의 추상적 노동으로의 지속적 환원을 통해 구축되고 영속화된다는 것을 맑스의 분석은 보여준다. 자본주의 경제는 점진적으로 구체적 인간의 활동과 필요에서 벗어나 복합적 추상적 관계를 통해서 개인의 활동과 필요를 통합한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노동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일 때만 의미를 가지며, 노동자 간 관계는 사물들(상품)의 관계로 변한다. 상품 세계는 ‘허위적’(falsified)이고 ‘가려진’(mystified) 세계다. 따라서 이 세계에 대한 비판적 분석은 먼저 이 세계를 구축하는 추상화를 천착하고 그 이후 실제적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추상적 관계를 넘어서야 한다. 즉 두 번째 단계는 진정한 구체성이 회복되기 위한 추상으로부터 추상화 혹은 허위적 구체성의 포기 단계다.“
이 개념은 앞에서 언급한 존-레텔과 같은 학자들에 의해 더욱 발전된다. 추상성은 각기 다른 사회 제도 형태로 나타나는데 주된 형태는 화폐라고 존-레텔은 지적한다. 그는 또 “추상성은 우리가 지각하지 못한 채 현실에서 지나간다. 왜냐하면 상품 교환은 다른 모든 것에 비해 매우 실제적인 것이이지만, 특히 대부분 거래는 물질적 대상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상화는 사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현실 행위로부터 나오는 것일지라도 여전히 사고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교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추상화를 보라: 상품에 대한 어떤 실질적인 물리적 변화는 발생하지 않거나 최소화되며, 교환된 상품에 대한 어떤 양적 차이도 허용되지 않는다; 변한 것은 상품소유권의 사회적 상태뿐이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채 추상화가 진행된다는 것은 아마도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것 중 가장 중요한 현실적 결과일 것이다.
2.4 상품의 물신성 (The Fetishism of the Commodity)
맑스의 물신성(페티시즘) 개념은 이전 장에서 언급한 과정들의 정점이다. 그의 물신성 개념은 ‘자본론’ 1권에서 완전히 확장, 발전한다. 데이비드 하비(2010)는 물신성 개념이 “자본주의 정치경제의 베일을 벗겨내는 데 필수적인 도구”라고 주장한다. 상품 생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물신성은 자본주의 생산 과정의 구조적 특징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푸흐스(2011)가 주목했듯이, “제품의 상품 특성은 그 제품이 계급 관계 속의 인간 노동에 의해 생산된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상품 물신성의 개념화에 중요한 몇 근본적 주장은 이미 앞에서 간접적으로 언급이 되었는데 얼마나 복잡한 개념인지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물신성은 상품 생산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한편, 상품은 등장부터 감각을 초월한 “형이상학적 섬세함과 신학적 미묘함”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맑스가 언급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물신성은 감각적이며 초감각적 혹은 사회적인 것일 수 있다 (맑스, 1867).
서트 잘리(Sut Jhally, 1987)가 강조한 바와 같이, 어떻게 그리고 왜 물신성이 등장했는지를 설명하는 두 가지 흐름이 있는데 이들의 초점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상품의 교환; 두 번 째는 임금 노동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 (더 정확히 말하면 사회 계급으로서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와의 관계). 이 두 흐름은 이미 충분히 분석되었다. 몇 비판적 커뮤니케이션 학자들은 그들의 연구에서 상품 물신성(commodity fetishism)을 다루었다. 잘리는 물신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간단히 말해서, 물신성은 사물의 의미가 사물의 물리적 존재에 내재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의미라는 것은 의미 체계에 편입됨으로써 생성되는 것이다. .. 맑스에게 상품 물신성은 가치는 실제로는 인간에 의해 생산되는 데, 마치 가치가 사물에 내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상품 물신성은 사회적 과정을 자연화(naturalise)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사물을 그 안에 가치를 내재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치는 인간이 생산한 것이다. .. 맑스가 보기에 상품 물신성과 상품 신비성(mystery of the commodity)은 가치가 노동의 결과가 아닌 상품 자체가 그 가치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허구적 모습과 관련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물신성 이론은 사실 신비화 이론이다.”
사회에서 상품 형식의 보편화와 함께, 상품 생산은 사회적 분업으로 서로 독립적으로 일하는 개인 혹은 그룹에 의해 수행된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생산의 사회적 관계가 오직 교환을 통해서만 표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미 강조했듯이 이 사회적 관계는 물질적 베일, 즉 상품 자체 뒤에 가려져 있는 것이다. 이 물질적 베일은 단순히 사회적 관계를 가리는 것만이 아니라 생산과정(생산수단 소유자와 착취당하는 노동자 사이의 적대적 관계의 현장)에서 상품을 생산하는 추상적 노동 역시 가린다. 이것이 물신성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그레이엄 머독(Murdock, 2011)은 믿는다: 사람들(상품의 소비자들)은 상품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망각한 채, 이들 상품이 가져다줄 편리함과 즐거움을 만끽할 뿐이다. 물질적 베일은 착취적 노동 조건, 노동 과정 혹은 노동 환경 악화에 대한 어떤 논의도 막는다. 상품을 구매하거나 소비할 때 모든 관심은 오직 쾌락의 대상으로서 상품 자체에 집중된다. 이것은 예를 들어 디즈니 만화책의 주요 이데올로기 요소 중 하나라고 Dorfman과 Mattelart(1975)는 주장한다:
“생산 과정은 그 기원에 대한 언급과 마찬가지로 삭제되었다; 생산과정에서의 노동자, 물질(상품) 그리고 환경은 존재한 적이 없다. 여기서 실제로 삭제된 것은 상품의 기원 그리고 상품을 생산 과정과 연결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다…. 상품 자체는 무죄다. 상품은 조그마한 보상을 요구하는 노동자에 대해 조금의 의구심도 갖지 않는 순수 잉여의 세계이다. 부르주아 체제의 모순 속에서 탄생한 프롤레타리아는 최고 입찰자에게 ‘자유롭게’ 그들의 노동을 팔고 그 노동을 산 입찰자는 그 노동을 자신의 사회적 계급을 위한 부로 전환한다. 디즈니 세계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자신들이 만든 사회에서 추방되어 모든 적대감, 갈등, 계급 투쟁 그리고 결국에는 계급 개념 자체가 종식된다.“
따라서 상품 물신성은 통상 이데올로기라고 정의되는 것의 대표적 예가 될 수 있으나, 상품 물신성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무시하거나 잊을 수 있는 환영이 아니라, 실제 존재하는 것이다. 상품 물신성은 자본주의 사회에 불가피한 객관적 실체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상품 물신성은 상품이 생산되는 순간 상품에 부착되기 때문이다. 이런 관찰은 특히 노동의 세계적 분업과 글로벌 시장이 활성화된 현재 상황에 더욱 유효하다. 이 물질적 물신성 구조는 시장 뒤편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것을 가린다: 노동을 착취하는 특정 사회적 관계. 위에서 언급한 외관(상품 세계)과 본질(생산의 사회적 관계)의 차이점은 여기에서 그 전체 모습을 드러낸다. 따라서 맑스가 주장한 추상화와 변증법의 힘은 특히 이 상품의 물신성 특징을 통해 그 위력을 발휘한다: 맑스는 추상화와 변증법의 중요 특성은 사물의 단순 외관을 뛰어넘는 능력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상품 물신성의 중요한 여파는 상품이 인간, 즉 상품을 생산한 주체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자신만의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상품은 단지 인간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을 억압하는 능동적인 객관적 주체가 된다. 하비가 강조하듯,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를 조종하는 것은 우리 중 누구도 개별적으로 통제하지 않는 시장의 힘”이다.
상품 물신성 이슈는 사실 지속적인 이데올로기 문제에 대한 “대안적” 접근이다. 20세기 맑시즘의 이데올로기 비판적 분석에서는 최소한 두 학파가 존재했다. 하나는 상품 물신성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들은 상품 형식을 물질적 단계(사회 도식의 하부-상부구조 모델)에서 발전하는 실제로 존재하는 물질적 베일로 이해한다. 이 흐름에는 루카치, 아도르노, 존-레텔 혹은 포스톤(Moishe Postone)이 포함된다(이들 중 일부는 이 출발점으로부터 물화(reification) 혹은 소외(alienation)와 같은 개념을 발전시켰다). 하부-상부구조 도식에 대한 이런 접근법은 주요 커뮤니케이션 연구, 특히 스마이드(Smythe)와 그의 수용자 상품(audience commodity) 논쟁에 참여한 학자들에 의해 채용되었다.
알튀세르와 지젝이 속한 또 다른 학파는 초점을 거의 오로지 이데올로기적 단계와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기구들에 맞추었다. 이들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하부구조에 의해 결정이 되기는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생산 수단의 소유주에 의해 상부구조 레벨로 발전한다 (즉, 권력을 가진 계급이 상부구조 레벨에서 이데올로기를 정의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상부구조에 “법적, 정치적, 종교적, 예술적 혹은 철학적, 즉 삶의 이데올로기 형식”이 포함된다는 맑스의 주장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부구조와 상부구조를 연관 짓는 접근 방식도 있지만, 이 학파의 접근법은 전자 학파의 접근법과 매우 다르며 상품 물신성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 이 학파에게 이데올로기는 순전히 상부구조의 문제인 데 반해, 전자 학파에게 이데올로기는 상품 교환으로 생성된 물질적 베일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유래한 물질적 하부구조의 한 부분이다.
전자의 접근법은, 예를 들어, 윌리엄스(Raymond Williams)의 하부구조와 상부구조 모델에 대한 재해석 혹은 그람시안의 헤게모니 개념에 훨씬 가까워 보이면서 이데올로기 개념에 실용적 대안을 제공해 준다. 그람시안적 의미에서 상품 물신성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간의 일상적 활동을 통해 재생산된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또 다른 한편 하부구조는 갈등이 없거나 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접근법은 광범위하게 물질적 하부구조, 즉 생산력, 생산관계 그리고 단계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적대감을 포함한다. 이는 하부구조가 상부구조의 전제 조건이면서 상부구조보다 더 근본적이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하부구조는 상부구조의 기능을 제약하지만, 상부구조의 기능을 결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중요하게도 이 물질적 단계는 상부구조의 의식을 형성하고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상부구조가 “진정한 기반”인 물질적 하부구조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적어도 알튀세르가 초점을 맞추는 것과 비교했을 때 사회에서 실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고 주장한 맑스의 입장과 훨씬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에 쓰인 그의 유명한 정의를 통해서 맑스는 “물질적 삶의 생산 양식이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지적 삶의 전반적 과정을 제약한다”라고 지적함과 동시에, “인간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그들의 의식이 아니라 그들의 의식을 결정하는 사회적 존재이다”라고 통찰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하여 존-레텔(1978)은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의 관계를 연구하고 상부구조에 위치한 의식의 물질적 기반을 함께 형성하는 생산력과 생산관계 간의 관련성을 밝히려는 중요하고 정확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 관련성은 하부구조에 견고한 지지대를 제공할 것이며, 상품 생산 사회에서 이 관련성은 상품 자체에 대한 제대로 된 분석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 상품 물신성을 출발점으로 삼는 전자 학파의 경우 한 사회의 신비화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것은 물질적 베일이며 이 물질적 베일은 실제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계급 적대 관계를 의식하면서 상부구조의 정치 기구들을 장악함으로써 이 갈등을 해소하려고 하지만, 만약 물질적 단계의 기본적 구조가 변하지 않는다면 이 갈등은 해소될 수 없을지 모른다 (예를 들어, 상품 형식의 지배와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 이것은 실제 존재하는 사회주의 사회에도 중요하다.
2.5 개인화의 핵심 주체로서 교환 (Exchange as the Key Agent of Individualisation)
맑스의 근본적 존재론적 입장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이었지만 그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그의 시대에 이미 완전한 개인화가 이루어지자, 맑스는 개인이 자연과의 연결고리에서 떨어지면서 자연에서 해방된 것처럼 보이는 자유 경쟁의 사회가 도래했음을 인정했다 (맑스의 용어를 따르자면, “노동자를 땅과 농경지 그리고 그 땅과 농경지의 지주에게 속박시키는 관계의 해체”). 사회적 관계가 현저하게 바뀌면서 개인들은 그들이 제한되고 뚜렷한 인간 그룹의 일부였던 이전 역사적 시대와 비교했을 때 상당 부분 서로 독립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맑스에 따르면, 개인화(individualisation)는 17세기 이후의 지배적 철학이 주장한 것처럼 인간 본성에서 기인한 인간의 천부적 특성이 아니다. 개인화는 결단코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다. 맑스에 따르면 인간은 역설적으로 “사회의 한 중심에 있을 때만 자신을 개인화(individuate)할 수 있는 동물이다. 사회 밖에 존재하는 고립된 개인에 의한 생산은… 마치 함께 살면서 서로 말하지 않는 개인들이 발전시킨 언어처럼 모순적이다.” 홉스봄(2011)에 따르면, “인간이 그의 원래 생산의 자연조건으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은 따라서 “인간 개인화의 한 과정”으로 볼 수 있으며, 교환은 이 과정의 중요한 주체 중 하나이다. 이렇듯 인간은 상품 교환 과정을 통해서만 개인화할 수 있는데 이 과정은 자기 강화의 과정이다.
잭 바바렛(Jack Barbalet, 1983)이 지적하듯, 초기 저술에서 맑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관계는 비사회적이라고 주장했다; 맑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시대에 인간은 독립적이고 비사회적 존재의 외부적 관계로 변모한다 (이 상태는 리버럴 개인주의의 전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맑스의 생각이 더 발전하면서 그는 주장을 바꿨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관계는 내용 면에서 봉건 사회의 관계와 다르지만, 사회적 관계의 한 특정 형식일 뿐이다.”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시대는 사실 가장 발달된 사회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특히 교환의 특성과 상품이 사회에서 수행하는 역할 때문이다.
물론 상품 거래는 자본주의 정치경제 등장 이전에 지배적이었던 다양한 유형의 도덕 경제처럼 특정 사회적 혹은 호혜적 의무를 수반하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상품 형식은 “개인화된 사회의 기초일 뿐만 아니라 개인은 사회적 관계가 없는 존재라는 관점의 뿌리이기도 하다.” 이는 특히 리버럴리즘, 자유의지론 그리고 다른 개인주의적 세계관의 지배적 존재론적 전제이기도 하다.
3. 모든 것의 글로벌 상품화: 그 긴 역사 (The Global Commodification of Everything: The Long History)
“자본주의의 장점은 그 팽창(축적, 전용 그리고 제국주의의)의 역동성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이 역동성은 운명적이고 필연적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팽창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면 시스템은 정체되고 망한다; 시스템은 그 팽창 과정에서의 모든 것을 흡수해야 하며 그 과정의 외부에 있는 모든 것을 내부화해야 한다.”
프레드릭 제임슨(2011)
자본주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끝나지 않는 (글로벌) 상품화의 역사이기도 하다. 1858년의 맑스가 이미 언급했듯이, “세계 시장을 창출하려는 경향은 자본 개념 자체에 직접 부여된 것이다. 모든 한계는 극복되어야 할 장벽으로 다가온다.” 오늘날 지속적 상품화 과정과 연결된 이슈들은 과거처럼 사회과학의 변방에 머물지 않는다. 현재 진행형인 이 상품화 이슈는 이제 보다 대중적인 미디어 담론과 주류 학계 모두에게 중요해졌다. Andreas Wittel(2013)에 따르면:
“상품화는 실제 현상이고, 자본주의 시장은 갈수록 강력해지고, 확산하고, 패권적으로 되며, 자본주의 시장 논리는 공동체 논리를 식민화하면서 파괴하고, 시장은 화폐 수단과 화폐 교환이 지금까지 통제하지 못했던 영역과 삶의 측면들마저 점점 더 집어삼키고 있다는 관찰에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는 듯하다.”
그러나 ‘상품화’(commodification)라는 용어는 많은 분석에서 ‘금융화(financialization)’, ‘시장화(’marketization)’, ‘수익화(monetization)’ 혹은 간단히 ‘화폐의 통치(the reign of money)’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대체되었다. 예를 들어, 랜디 마틴(Randy Martin, 2002)은 돈이 인간 삶의 수단이자 최종 목표가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일상생활의 금융화’라는 개념을 전개했다. 그에 따르면, 금융화는 기업 세계에 국한되지 않고 일반인들의 가계에도 침투하여 그들이 자본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음에도 마치 그들이 자본가가 된 것처럼 계속 행동하게 한다. 동시에 현대 일반인들은 금융 리스크 (과거에는 전문가들만 다루었던) 를 그들의 가정과 일상생활에서 받아들이고 있다. 많은 사람의 삶은 끝없는 경영대학원 과정이 되어가고 있으며, 가능한 모든 순간은 돈을 버는 기회로 전환할 필요가 있게 된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마틴만이 아니다.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2012) (‘정의란 무엇인가’의 그 마이클 센델이다: 역자 주)도 유사한 질문을 던진다. 끊임없이 팽창하는 시장을 보면서 그는 묻는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자본주의 확장 논리를 방치한 채, 그 확장 능력에 엄격한 제한을 부여하는 것이 환상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센델은 이 개념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경제학이 갈수록 삶 전체를 지배하면서 제국의 영역이 되어가고 있다”고 한탄한다. 이는 “거의 모든 것을 사고팔 수 있으며, 시장이 유례 없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 의견에서 공통으로 강조된 것은 이런 “시장화된” 관계들이 이 관계에 굴복한 사람들의 의식 혹은 자율적 결정에 의해 구축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런 관계는 사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개인들 삶의 일부가 되었고, 어떤 가시적 강요 없이 개인들 일상을 잠식해 들어갔다. 20여년 전만 해도 결코 자명하다고 여겨지지 않았던 인간 주체의 시장에의 종속이 오늘날에는 거의 논쟁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사회적 상품화의 압도적 강화로 인해 합리주의적 계산과 측정은 인간 활동과 관계의 일부가 되었고, 동시에 교환 가치의 등가성과 사실적 추상성은 많은 인간의 일상생활 방침의 기준이 되었다.
비판적 커뮤니케이션과 사회 연구는 사실 오래전부터 이런 사회적 변혁을 인식해 왔다. 30년 전에 허버트 실러(Herbert Schiller, 1984)는 “기업 권력과 기업 사고방식의 침투가 이제는 너무 넓게 퍼져서 비즈니스 성과에 대한 계산법이 거의 자동으로 개인의 목적과 성취에 대한 측정 수단이 되었다”라고 설파한 바 있다. 비판적 커뮤니케이션 연구를 포함한 맑스주의와 다른 급진적 정치경제학에서 이 과정은 자본주의 사회 내 상품 형식과 상품화의 역할에 대한 분석 이론 틀 안에서 분석됐다.
그러나 위 완곡어법과 달리 상품화 개념은 외관을 뛰어넘어 보다 넓은 사회에 존재하는 자본주의 관계의 구조적 원인을 들여다보게 함으로써 보다 폭넓은 개념이 된다. 상품 형식은 맑스가 지적하듯이 자본주의 세포 형태 중 하나이며 자본주의에서 “상품의 집합”은 “부의 기초적 형식”으로 간주한다. 다양한 사회적 과정과 영역의 상품화는 자본의 끝없는 세계적 축적을 가능하게 하면서 역사적 자본주의의 결정적 특징이 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 중 하나는 상품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생산 과정에서 생산되므로 우리는 (무)임금 노동 과정, 생산관계 그리고 착취 관행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점이다(맑스, 1867). 더 나아가 자본주의 생산에서 상품은 필연적으로 시장을 겨냥해 생산되고 시장에서 교환된다.
3.1 자본주의: 많은 머리를 가진 히드라 (Capitalism: The Many-Headed Hydra)
자본주의 시스템은 오직 한가지 목표만을 가지고 있다: 자본 축적. 자본의 축적은 자본을 가진 사람에 의해 이뤄진다. 이 자본 축적이 가능하려면 사람들 간 특정 관계를 맺은 특정 유형의 사회가 필요하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아주 오랜 기간 우리 일상에 자리 잡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한 대안을 생각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자본주의는 수많은 어려운 장애물을 극복하면서 발전한 시스템이다. 이매뉴얼 월러스틴(1983)은 사회 시스템으로서 자본주의가 왜 등장했는가를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처음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고 토로한 바 있다. 자본주의 지지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시스템은 자연적 시스템이기는커녕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자본은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자본을 축적한다. 자본가들을 쳇바퀴의 다람쥐처럼 더 빨리 달리기 위해 빨리 달린다.”
월러스틴이 강조한 바와 같이, 자본의 전반적 순환 시스템은 현대 이전까지 완성되지 않았다; 시스템의 몇 연결 부분은 빠졌었다. 다른 말로, 여러 과정이 시장을 통해 실행되지 않았는데 이는 곧 이들이 상품화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따라서 월러스틴에게 역사적 자본주의는 무엇보다도 서로 다른 사회적 과정들의 광범위한 상품화 과정이며, 이 과정을 거쳐 복잡한 상품 체인을 구축하면서 탄생한 시스템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세계적 체인이 되었다). 이 과정은 단순한 교환 과정이 아니라, 생산, 유통 그리고 투자 과정의 상품화 과정이기도 하다.
상품은 단지 자본주의의 축적 과정의 전제 조건일 뿐만 아니라 상품은 실제로 자본의 “이전 역사”이므로 엄격하게 말하면 “아직 자본은 아니다”라고 프레드릭 제임슨(2011)은 주장한다. 하지만 제임슨의 이 주장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도 부분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인다. 상품 형식은 자본 축적을 위한 지속적 전제 조건일 뿐만 아니라, 가장 근본적 단계에서 잉여 가치의 추출을 가능하게 하는 자본 축적에서 항상 존재하는 필수적 부분(원시적 축적과 유사하다)이기도 하다. 제임슨 자신도 강력히 지지하는 변증법적 관점에서 자본주의 축적 과정을 살펴보면 상품을 교환과 잉여가치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사적으로 이 둘은 동시에 발전해야 한다). 상품 형식은 자본 축적의 모든 사이클 영역에서 불가결한 세포 형식이다. 그리고, 예를 들어, 생산 과정은 일차적으로는 중요하게 보일지 몰라도 자본주의는 상품화를 통해 자신을 재생산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 상품화 없이 자본주의는 더 이상 팽창할 수 없다.
제임슨의 의견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는 상품화가 지배하는 역사적 사회에서 상품화는 기존 사회에 대한 지속적 비판을 위한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도 지적한다. 그레이엄 머독(2006)이 ‘거의 모든 것의 상품화’에 대해 저술한 적이 있는데 월러스틴과 제임슨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실제로는 모든 것이 상품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제임슨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화는 보편화되는 경향이 있으며 이에 따라 우리는 상품 형식의 지배를 예측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월러스틴도 “세계적 차원의 축적 과정은 모든 것에 대한 상품화를 통해 발전하고 있다”라고 지적한다.
머독은 어떻게 “오로지 완전히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상품의 생산과 마케팅이 성장과 이익의 중심 원동력”인지 설명한다. 이에 따라 자본주의에게 세계 시장은 결정적 발전이며 (홉스봄, 2011), 지난 수십 년에 걸쳐 마침내 자본주의는 모든 잠재력을 실현하면서 자본의 지배하에 모든 것이 흡수되는 보편화된 전체성을 구축했다(Hardt and Negri, 2001). 상품화 과정은 원시적 축적(혹은 강탈에 의한 축적)과 더불어 이 자본주의의 팽창에 결정적이다. 지속적 팽창 없이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위기에 놓이게 되기 때문에 지속적 팽창은 피할 수 없는 숙명 같은 것이다. 상품화가 그 자신만의 이미지로 세계를 재구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어슐라 휴스(Ursula Huws, 2003)는 사회 변화를 이해하는데 이 과정이 중심적이라고 지적한다. 그녀에 따르면, 상품화를 통해 “시장에서 판매하기 위해 새롭고 갈수록 표준화된 제품을 생산하려는 자본주의 경제의 경향은 생산 규모에 비례하여 증가하는 이익을 창출할 것이다.”
그러나 칼 폴라니(Karl Polanyi, 1944)가 강조했듯이, 시장에서 서로 다른 유형의 상품 판매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허구적 상품’(commodity fiction)이 또 지속해 필요하다. 이 허구적 상품에 대한 필요성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극단적 인위성을 지속해 상기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특정 영역에서 시장 관계가 여전히 성장 단계에 있고 아직 상품 교환에 종속되지 않았을 때 이 허구적 상품에 대한 필요성은 분명해진다. 폴라니가 명명한 봉건제로부터 자본주의 사회로의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에서 새로운 경제 관계의 성공적 작동을 위해서는 새로운 허구적 상품이 필요했고 대표적으로 노동력, 화폐 그리고 토지가 이에 속한다.
한편, 포스트모던 사회로의 현재 진행형 변혁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이전까지 비상품화 제품, 과정 혹은 행위들이 갈수록 사라지는 역사적 시대를 경험하고 있다. 이것들 모두는 좋든 싫든 경제적 합리화 명분에 매몰된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1947)는 상업화 과정을 지적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이런 발전을 예상했었다. 그러나 그들조차 자본이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을 식민화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못한 듯하다. 그러나 실제 인간 삶의 거의 모든 면은 잠재적 투자 대상 혹은 시장 기회로 이해될 수 있다.
그동안 문화적 생산, 공공 영역 그리고 창의성, 혹은 더 넓게 말하자면 사회적 상징을 그 축적 사이클에 포함하지 않았던 자본주의는 처음에는 문화와 인간의 예술적 창의성만을 산업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단순히 상징, 대중적 표현과 아이디어뿐만 아니라 지식과 정보도 오늘날 지속적으로 상품화되고 있다. 지식과 정보는 포스트모던 사회 자본주의의 필수적 부분이다. 크리스티안 마라찌(Christian Marazzi, 2008)가 지적하듯이,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은 원자재일 뿐만 아니라 노동 도구이기도 하다. 정보와 지식은 이제 다른 것처럼 매매가 되는 상품이 되었고, 이에 따라 문화와 정보 영역에서 자원의 집적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허버트 실러(Herbert Schiller, 1989)는 이것을 ‘의식 산업’(consciousness industry)이라고 부르면서, “다양한 이유에 기반한 이익 추구 동기 부여의 이 영역으로의 진입 - 역사적으로 그동안 청정지대였다 - 이 이제는 당연시 여겨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새로운 민간 기업들이 등장했고 대부분의 경우 이들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한편 이런 민영화와 상품화 과정은 그동안 역사적으로 인간 사회에 속했던 지식의 새로운 독점을 가능하게 했다.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상품 형식이 수행하는 역할에 대한 기 드보르(Guy Debord, 1970)의 설명은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 중 하나로 남아있다. 그는 인간 삶 전체에 대한 상품의 지배를 거론하면서 상품 세계를 통해서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을 먹여 살리는 영구적 아편 전쟁으로 상품 형식의 역할을 묘사했다. 모든 것은 세계 시장에 편입되고, 자본주의 경제와 그 도구적 합리화가 요구하는 규칙을 만족시키기 위한 방식으로 모든 것이 변한다. 상품은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적이기 때문에 상품은 경제 전체와 사회 모두를 자율적으로 지배할 수 있다; 따라서 사회생활은 완전히 식민화된다. 이 식민화 광경은 드보르에게는 사실 “상품이 사회 생활을 총체적으로 장악한 순간이다. 상품과의 관계는 그냥 눈에 뜨이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상품의 세계이다.”
모든 것이 이 상품화 늪에 빠졌고, 상품 세계의 완벽한 지배는 이 상품화 늪을 통해 완성된다. 드보르의 초점은 적어도 매스미디어와 이미지로 넘쳐나는 사회를 간접적으로 향했다. 그리고 불과 수십 년 후에 대부분 학자는 우리가 완벽히 매개화된(mediatised)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다시 드보르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우리는 이런 현상들에서 “우리의 오랜 적, 상품”을 인식해야 한다 .
드보르의 현대 생활에 대한 이런 비평이 쓰인 50여 년 전에는 이 비평이 과장으로 보였을 가능성이 꽤 크다. 그러나 인간의 사회성, 감성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등이 상품이 되면서 교환되는 오늘날과 같이 완전히 발전된 포스트모던 사회를 보면서 드보르의 통찰이 정확했음을 우리는 인정하게 된다. 상품화의 팽창은 이제 공장을 뛰어넘어 일상생활의 다른 영역에 미치고 있다. 따라서 아주 넓은 의미에서 커뮤니케이션으로의 상품화 확장은 이 이슈가 반드시 커뮤니케이션 정치경제학의 중심 주제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능한 연구 대상 범위를 넓히고 이런 침입적 과정에 대한 비판을 동시에 제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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