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역사, 인간 그리고 뉴질랜드

세상 이야기

자본주의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상품화 (4/5) - 디지털 자본주의 이해하기 (9)

김 무인 2023. 8. 2. 17:43

 

역자 머리말

 

이번 챕터 번역을 하면서 아도르노가 1947년에 발표한 도구적 이성(instrumental reason) 비판을 다시 둘러보게 되었다. 번역에 앞서 나무위키를 중심으로 그의 도구적 이성 비판을  짧게 정리 해본다. 

 

누구나 쉽게 말하듯 우리는 ‘객관적’ 이성을 추구해야 한다. 그런데 초기의 객관적 이성은 ‘비판적’이고 ‘반성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사변적’ 이성이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 이 이성은 절대화, 형식화, 가치 중립화되면서 반성과 비판은 실종되고 주체의 효율성과 합리성을 제일 가치로 추구하는 이성의 도구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아도르노는 이런  경향에 반대하여 막스 베버와 같은 이들이 말한 학문과 이론의 가치중립이라는 명분을 내건  이성이 아니라, 그 속에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을 포함한 이성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테오도어 아도르노 (Theodor W. Adorno)(1903~1969)

 

그에게 있어 비판은 "지배적 이념이나 행동 방식 또는 사회적 상태를 순전히 관습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지적이고 실천적인 반성적 노력"이며, 생각의 '동기'와 '과정'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비판은 어떤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생산적'이지 않고 '부정적'이다. 우리는 흔히 대안이 없는 비판은 진지한 성찰을 결여한 것으로 치부하기 쉽다. 1980년 마거릿 대처가 들고나온 TINA(There Is No Alternative) 슬로건이 여전히 유효한 것도 결국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들이 대안으로 이어지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대안 없는 비판은 결국 무력한 불평불만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비판의 역할과 유용성은 대안을 동반하지 않아도 충분하지 않을까? 비판은 ‘부정적이기만’ 해도 존재 의미가 있다. 현재를 비판하는 사람은 미래 사회에 대한 대안을 선지자처럼 제시할 필요가 없다. 현재 사회의 옳지 않다고 판단되는 부분을 폭로하는 것만으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판 이론은 대안적 사고를 위한 전제 조건이지 준비 단계는 아니기 때문이다. 비판은 특정 대안 이데올로기를 염두에 두고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변증법적으로 ‘반’(Antithese)이 애초부터 특정 ‘합’(Synthese)을 전제 혹은 염두에 두고 등장하지 않는다. 비판이라는 반(Antithese)이 등장하고 이후 역사의 우여곡절을 거치며 예측하지 못한 합(Synthese)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도구적 이성에서 벗어나 비판적 이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아도르노의 외침은 이성이 곧  합리성과 효율성과 동일시되는 21세기 디지털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지속적 울림을 준다. 특히 ‘디지털 빨리빨리주의’에 매몰된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시각을 다투는 기술 발전 속에서 계속 돌아가는 경쟁이라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 이들에게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주변을 둘러보라는 말은 아날로그 꼰대의 봉창 두드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을 지 모른다. 80여 년 전에 이미 아도르노는 ‘빨리빨리’를 위한 합리성을 추구하는 도구적 이성만이 이성의 전부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2023년 한국 사회를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그의 도구적 이성에 대한 비판은 대안까지 수반했다. ‘비판적 이성’이 그것이며 이 ‘진정한’ 객관적 이성을 회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는 구체적으로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효율성과 합리성에 초점을 맞춘 도구적 이성에 올인한 한국의 주입식 교육 대신 철학적, 역사학적 그리고 사회학적 비판적 상상력을 위한 인문학에 대한 아도르노의 강조는 경쟁력이 없고 시장이 필요로 하지 않는 ‘쓸모없는’ 인력을 배출하는 학과는 통폐합하려는 한국 대학이 귀담아들어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하지만, ‘상품화’라는 쓰나미에 속절없이 무너져 가고 있는 한국 사회와 대학이 과연 이런 뜬금없어 보이는 일탈 행보를 보일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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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커뮤니케이션 정치경제학과 수용자상품론 (The Political Economy of Communication and the Audience Commodity Thesis)

 

이전까지 비상업화 영역이었던 곳으로의 자본의 세계적 침투는 커뮤니케이션 정치경제학을 많은 측면에서 사회비판 이론에 기원을 둔 다른 영역의 연구와 겹치게 했다. 정치경제학(그리고 보다 넓게는 사회 비판 이론 전반)에 대한 비판적 접근(가령, 네오막시시트)은 초기부터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연구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통상 스마이드(1960)가 커뮤니케이션 정치경제학의 창시자로 여겨지지만,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비판적 접근의 더 깊은 기원은 적어도 한편으로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1947), 다른 한편으로는 이니스(Harold Innis, 1951)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문화 연구와 정치경제학 둘 다 위 사상가들과 기원을 공유하는 한편,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그 안의 문화적 과정에 대해 기본적으로 이해를 공유했다.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커뮤니케이션 역할의 중요성 증가는 비판 이론과 커뮤니케이션 정치경제학 사이에 몇 새로운 융합점을 창출했다.

 

해럴드 애덤스 이니스(Harold Adams Innis)(1894 ~ 1952)​

 

커뮤니케이션 정치경제학에서 상품화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고찰하다 보면 우리는  최소한 두 보편적 측면이 있음을 알게 된다.  한편으로는, 커뮤니케이션과 기술은 모두 경제와 사회 전반의 상품화 과정을 지원한다. 상품화에 필수적인 도구적 합리화에서 기술의 역할은 특히 디지털화와 함께 명백해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상품화는 커뮤니케이션과 관련된 제도들에 침투하여 커뮤니케이션에 기초를 둔 일상적 사회 관행들을 잠식하기 시작한다. 두 측면 모두 커뮤니케이션과 미디어에 대한 맑스의 생각을 상세히 연구한 푸흐스(Fuchs)에 의해 강조된다. 그에 따르면, 맑스는 통신 매체는 가장 기본적 단계에서 거리를 뛰어넘어 생산을 조정하고, 메시지 소통을 가속하며, 다른 기관들 간 상품의 운송을 조정하는데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통신 매체는 또 더 근본적 의미에서 중요하다. 그것은 축적과 소비가 개발될 수 있는, 하지만 아직 개발되지 않은, 비상품화 영역으로의 자본 팽창을 도와준다. 따라서 이 통신 매체는  자본의 전체 순환 과정을 지원한다. 모스코는 이 절차를 공간의 제약을 극복한다는 의미에서 “공간화”(spatialization)라고 명명했다. 이 공간화 과정은 상품화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미디어 인프라와 콘텐츠라는 보다 좁은 의미에서 전송 기술이 민간기업에 의해 운영된다는 점도 맑스는 주목했다고 푸흐스는 지적한다. 이는 미디어 자체가 상품(인프라도 마찬가지)일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상품도 전송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디어는 “상품 판매를 촉진하는 광고 메시지의 전달자”라고 볼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상품 유통을 가속한다.   

 

커뮤니케이션 정치경제학과 비판적 커뮤니케이션 연구에 중요한 두 다른 개념은 노동(labour)과 청중(audience)이다. 노동 시장에서 노동력을 파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의 많은 중요한 전제 조건 중 하나이다. 정보화 사회에서 발생한 중요한 새로운 현상은 지식과 정보가 완전히 상품화됨에 따라 이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노동에 대한 필요성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커뮤니케이션 정치경제학에서 노동은 특히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형태(가령, 지식 노동, 정보 노동, 언론인 노동 등)로 분석되었으며, 이 분석은 대부분 모스코와 Catherine McKercher(2008)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러나 이번 챕터에서는 특히 두 번째 개념인 청중(수용자)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청중의 상품화는 자본주의 경제에서도 상대적으로 신선한 것이지만, 상품으로서 청중의 개념화는 자본주의 사회 상품화의 만연과 관련하여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Catherine McKercher

 

 

4.1 커뮤니케이션 정치경제학(비평)에서 청중 (Audiences in the (Critique of the) Political Economy of Communication)

 

청중에 대한 비판적 정치경제학적 접근은 이 토픽에 초점을 맞춘 주류와 축복식 커뮤니케이션 연구(celebratory communication studies)가 대부분 간과하는 이단적인 대안적 접근이다. 이같은 인식은 커뮤니케이션 정치경제학의 역사적 발전에서 소위 “사각지대 논쟁”(blindspot debate)이 가장 뜨거운 논쟁 중 하나이며, 청중이 어떻게 자본에 의해 도구화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여러 유용한 통찰이 있었음에도 형성되었다. 현대사회처럼 급격히 다른 기술적, 사회적 환경에서 최소한 간접적으로 지속된 이 오래된 논쟁과 통찰은 맑스주의에서 영감을 받은 비판적 커뮤니케이션 연구와 관련된 실천과 아이디어를 위한 귀중한 자원이다. 그러나 아마도 더 중요한 것은 사각지대 논쟁은 상품화가 사회 전반에 걸쳐 어떻게 퍼져나가는지,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이 완전히 정착한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이 상품화 과정을 어떻게 분석할 수 있는지에 대한 통찰력을 우리에게 제공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커뮤니케이션 연구에서 정치경제학(비평)에 의해 제공된 통찰력은 협소한 긍정적 접근을 뛰어넘어, 현재라는 역사적 시대에 대한 폭넓은 성찰을 제공할 수 있다. 

 

“사각지대 논쟁”으로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에서 상품화 이슈는 콘텐츠와 미디어 노동을 뛰어넘어 청중(수용자)에게까지 확산되었다. 이제 청중(audiences)은 학문적 관심이 집중해야 할 핵심 미디어 ‘상품’(goods)이 되었다. 사각지대 논쟁 이전에는 오직 콘텐츠만 미디어가 독자들에게 판매하는 핵심 상품으로 여겨져 왔다. “매스미디어는 상품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가장 중요한 산업 그리고 상업 조직이다”라는 인식은 비판적 이론가들에게 이미 널리 받아들여졌었다. 

 

스마이드의 수용자상품론이 처음 등장한 기념비적 논문, 'Communications: Blindspot of Western Marxism' ​

 

비판적 커뮤니케이션 연구의 역할에 대한 이런 중요한 재고는 스마이드(1977)에 의해 시작되었다. Mosco(2009)와 Eileen Meehan(1993) 모두 수용자(청중) 상품론을 처음 소개한 스마이드 논문이 비판적 커뮤니케이션 연구에서 근본적 변화를 이끌었다고 지적했다. 이제 비판적 커뮤니케이션 연구는 미디어 자체뿐만 아니라, 광고를 내보내는 모든 커뮤니케이션 회사를 그 연구 대상에 포함하게 된다. 이는 사실 커뮤니케이션 정치경제학에 의해 수행될 수 있는 분석 대상의 초기 급진적 확장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이 연구 범위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 정치경제학은 “사회생활에서 통제와 생존에 대한 연구”로 정의할 수 있다는 스마이드의 믿음에 의해 더욱 확장되었다. 이 정의에 따르면, 정치경제학은 여러 방식으로 사회 분석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한편, 가장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접근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ileen Meehan

 

스마이드의 이런 통찰은 이후 비물질적 노동과 탈포드주의 생산과 관련하여 변화한 프레임워크에서 중요하게 된 몇 중요 이슈들을 거의 예언적으로 예측했다. 따라서 새로운 미디어 기술, 특히 인터넷의 등장과 함께 스마이드의 획기적 주장과 그 지속적 유효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4.2 스마이드의 수용자상품론과 기술 변화 (Smythe’s Audience Commodity Thesis and Technological Changes)

 

수용자 상품 논쟁을 유발한 스마이드의 원 논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핵심 논제를 도출할 수 있다. 그의 핵심 논제들은 지금도 여전히 적절할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기술적 사회적 변화에 의해 사실 더 강화되었다. 

 

첫째, 청중(수용자)은 시장에서 제조되고 판매되는 중요한 상품이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청중은 실제 노동을 한다! 이것들이 “상품으로서 청중”에 대한 토론의 주요 출발점이다. 미디어 산업에 의해 생산되는 가장 중요한 상품은 제조된 후 광고주에게 팔리는 청중, 그 자체라고 스마이드는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중요성이 더욱 높아졌는데, 이는 유사한 이슈들을 다룬 다른 몇 가지 중요한 접근 방식에서 입증된다. 

 

이런 흐름은 특히 흥미로워 보인다. 왜냐하면 스마이드가 그 논문을 썼을 때 그의 상품으로서 청중이란 개념은 종종 천박한 맑시즘으로 치부되었고, 비평가들에 의해 환원주의 경제학으로 비난받았기 때문이다. 문화 연구가 지배적이었던 당시, 수익성 논리로 무장된 사업으로서 미디어라는 개념의 부활은 심지어 구식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1990년대 초, 스마이드는 실제로 그의 분석과 주장에 있어 훨씬 더 급진적일 수 있었다고 Eileen Meehan(1993)은 주장했다. 그녀에 따르면, 스마이드 논제들의 타당성은 역사와 실제 관행에 의해 완벽히 입증되었다. 

 

최근 이 논쟁을 새롭게 검토한 Daniel Biltereyst and Philippe Meers(2011)에 따르면, 실제로 미디어 콘텐츠는 기껏해야 무료 점심 같은 부차적인 것이 된다. 사실 미디어는 무엇보다도 프로그램이나 콘텐츠가 아닌 청중(수용자)을 생산한다! 이 사실은 이제 미디어는 ‘청중 채집자’(hunter-gatherers of the audience)가 되어 가고, 여가 시간은 이전에 알려지지 않은 영역의 상품화라는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중요한 요소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가 시간, 비근무 시간으로 간주되는 것들이 이제는 자본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면서 금전적 가치로 평가된다. 

 

흥미롭게도, 아도르노는 이런 과정들이 그의 논문 ‘Free time’(Freizeit)을 출간하던 1969년에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자유 시간은 그 단어의 반대로 되어 가고 있는데, 그 까닭은 자유 시간도 이윤 추구 삶의 연속이며 생산 과정에서 발견되는 유사한 규범과 속박에 얽매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는 취미 이데올로기(hobby ideology) 예를 통해 이를 설명한다. 이제 모든 사람은 취미를 가져야 하는 분위기인데, 그 취미는 아마 “쇼 비즈니스” 혹은 “레저 산업”에서 제공되는 취미일 수 있다. 따라서 자유 시간은 상당한 사회적 통제를 받으며 결국 모든 생활시간이 완전히 상품화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다. 

 

아도르노의 지적이 있고 10년 후, 레이먼드 윌리엄스(1980)도 아도르노와 유사하게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어떻게 생산 수단으로 간주되어야 하는지를 지적했다. 이는 특히 커뮤니케이션이 크게 발달하여 생산력의 중요한 부분이 된 현대 사회에는 더욱 그렇다. 

 

둘째, 이런 초기 발견을 바탕으로 더욱 중요하고 급진적인 이론이 스마이드로부터 나왔다. 그는 마치 아도르노와 윌리엄스의 사고방식을 이어가듯 오늘날 “대부분 사람의 노동 시간은 하루 24시간이다”라고 선언한다. 그의 이런 통찰 결과는 급진적이고 광범위한 것인데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이런 관찰이 시간이 흐를수록 입증되고 있다는 것이다. 스마이드의 노동 정의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의 화두는 사회 내 새로운 영역으로의 상품화의 급진적 확장이라는 근본적 논제를 우리에게 던진다.  

 

스마이드의 두 논제 - 청중은 상품이다, 대부분 사람의 여가 활동은 노동이다 - 는 통상적으로 노동력이 재생산되는 비노동 시간으로까지 노동 시간이 급진적으로 확장되었다고 간주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Sut Jhally and Bill Livant(1987)는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에 기반하여 이 개념들을 더욱 확장했다. 그들은 시청(watching)(노동의 한 형태로서)은 사실 공장 노동의 연장일뿐이며, 결코 이것을 메타포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라고 지적한다. 시청은 전체 미디어 경제 과정에서 필수적인 특정 형태의 노동이다; 노동자들이 그들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매하듯이 청중은 그들의 시청력(watching power)를 미디어 소유자에게 판매한다. 

 

Bill Livant(1932~2008)

 

따라서 여가(leisure)는 현대 자본주의 작동에서 점점 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여가는 자본에 흡수되어, 수익화와 금전적 가치로 환산되면서 청중은 (잉여)가치 추출이라는 유일한 목표를 위한 도구로 간주된다. 청중의 활동들(오디오 감상, 시청,  검색, “클릭” 등)로 창출된 가치는 자본가에 의해 전용되며, 그 대가로 청중은 다양한 유형의 콘텐츠라는 ‘무료 점심’을 제공받는다. 스마이드의 논제는 이미 언급했듯이 사회적, 개별적 인간 삶의 모든 측면이 상품화될 수 있으며 본인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바람직하게는), 알든 모르든 자본주의 축적 사이클에 편입될 수 있음을 가리킨다. 이제 일정 교환 가치를 추출하고 전용할 수 없는 인간 활동은 기본적으로 남아 있지 않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디지털 기술이다. 디지털 기술의 부상으로 유례없는 디테일과 측정, 계량화 그리고 통제의 추가적 합리화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Philip Napoli(2011)는 더 나아가, 인터넷 미디어 기업이 오늘날 사용할 수 있는 광범위한 데이터 옵션은  거의 모든 것을 측정할 수 있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이런 기술은 사용자(또는 마케팅 담당자 관점에서는 개별 소비자)에 대한 전례 없는 수준의 세부 정보를 수집할 수 있게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인터넷이 ‘우리 삶의  기본 틀(fabric)’이라는 카스텔의 주장은 사람들의 사생활 침해에 관한 한 받아들이기 힘들다. 

 

Philip Napoli​

 

새로운 디지털 기술 개발로 청중을 조종하고 측정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공한 핵심 변화는 다음과 같다: (a) 파편화(fragmentation); (b) 대외적으로 향상된 청중(수용자)의 자율성과 참여; (c) 소비에 대한 유례없는 통제; 그리고 (d) 유례없을 정도의 사용자와 청중에 대한 구체적 파악. 미디어 환경의 파편화와 이에 따른 청중의 파편화는 “롱테일”(long tail) 시나리오(다품종 소량 판매 소매 전략:역자 주)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청중은 점점 더 작은 조각들로 분할된다. 매스미디어 초기 특징인 “broadcasting”으로부터 위성티비, 인프라 민영화 그리고 규제 철폐로 가능해진 “narrowcasting”, 그리고 마침내 디지털화와 인터넷으로 가능해진 “pointcasting”로 이어지는 역사적 발전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포인트캐스팅은 “측정의 합리화”와 여러 다른 기술과 방식을 통해 잠재적으로 수익화가 가능한 모든 활동에 대한 완전한 계량화를 가능하게 한다. 인터넷 이용자들 (“cybernauts”라고도 불린다)은 이전보다 더 참여할 수 있고, 새로운 미디어 사용 방법에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터넷 정치경제학 관점에서 이런 계량화는 플랫폼 소유자가 이용자들의 활동과 선호도 그리고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다른 개인 정보에 대해 훨씬 상세한 파악을 가능하게 한다. 

 

인터넷의 혁명적 가능성에 대해 맹목적으로 상상하는 것은 이상주의적이다. 보다 유물론적 접근은 우리가 더 넓은 사회적 맥락을 고려해야 하며,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 사회의 비대칭성은 증가했으며, 불행히도 인터넷은 이를 완화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 오히려 디지털화는 권력을 가진 소수와 무력한 다수 간 격차를 더욱 벌리는 데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 사례는 의심의 여지 없이 구글이다. 이 기업은 수익의 대부분을 광고(특히 대표적 광고 제품인 Google AdWords)에서 얻는다. 이 과정에서 구글 이용자들은 전방위적으로 세분화된 후 상품화되어 이들과 관련된 특정 유형의 상품을 팔고자 하는 광고주에게 팔린다. 실제 구글은 (공식적으로) 3만 명의 직원을 고용하며, 일부 소규모 국가(예, 인구 2백만 명의 슬로베니아)의 연간 예산과 맞먹는 연간 수익을 올린다. 이 수익의 대부분은 경제적 감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이용자 사생활에 대한 심각한 침해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마테오 파스퀴넬리(Matteo Pasquinelli)(2009)와 Fuchs(2012)를 포함한 여러 학자는 구글의 자본 축적 과정에서 중요한 자원 중 하나가 www 콘텐츠 제작자들과 더불어 구글 플랫폼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무급 노동력이라고 지적한다. 결과적으로 구글은 두 그룹의 활동에서 잉여 가치를 추출할 수 있기 때문에 둘 다 착취한다. 

 

마테오 파스퀴넬리(Matteo Pasquinelli)

 

 

4.3 스마이드에 대한 Caraway의 비판과 정치경제학의 주제 (Caraway’s Critique of Smythe and the Subject Matter of Political Economy)

 

스마이드의 통찰에 대한 보다 강력한 최근 비판 중 하나는 Brett Caraway(2011)로부터 나왔다. 그는 스마이드의 기념비적 연구의 기본 전제부터 강력히 비판했다. 그의 비판이 다른  많은 비판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주제와 관련 유익한 참고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주제에 대해 맑스주의적 재검토를 하고 있다고 그가 주장하기 때문이다. 수용자(청중)상품론을 연구하는 학자 중 일부는 Caraway가 제기한 몇 비판에 대해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는 스마이드의 수용자상품론이 가치와 자유노동의 원천으로서 청중의 선택(co-optation)이 실현되는 과정을 과장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에 따르면, 청중의 활동은 자본가의 직접적 통제하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청중 상품 거래). 둘째, 첫 번째와 연관되어, 수용자 상품론은 특히 스마이드 자신과 더불어 주관성과 주체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결여하고 있다 (청중 권력과 무료 점심으로서 미디어 콘텐츠에 대한 논제). 셋째, 수용자상품론은 사용가치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 이와 관련하여 정치경제학의 인식론적 접근은 무엇이며 지지자들이 탐구하는 주제는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그 대답을 통해 그의 주장에 대해 반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Caraway(2011)는 “미디어 제품으로부터 추출한 사용가치에 대한 탐구는 생산 영역에서 자본가 지배의 한계를 입증했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자본론 1권에는 사용가치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맑스는 거의 오로지 교환가치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사용가치를 거의 관련 없는 부속 개념으로 치부하였으며, 심지어 교환가치를 그저 가치라고도 칭했다. 하지만 이것은 그가 ‘개인적으로’ 사용가치가 무의미하다고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가 작동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맑스는 심지어 “사용가치는 정치경제학의 탐구 범위 밖에 있다”라고 언급하기조차 했는데, 사용가치는 “상품의 필수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품의 사용가치는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사용가치를 위한 노동의 구체적 효용성과 명확한 유용성 역시 전제된다.”(맑스와 엥겔스) 

 

상품은 항상 사회적으로 유용한 가치를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그 실제 내용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제임슨, 2011). 특정 상품을 교환 가능한 상품으로 만드는 것은 정확히 그 상품의 ‘사회적’(혹은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사용가치의 특성인데, 이 특성은 동시에 그 상품을 구매하려는 소비자가 있는 한 그 상품의 내용을 전혀 상관없게 만든다; 기본적으로 사용가치가 있고 다른 사람이 원하는 한 모든 것은 상품이 될 수 있다. 사용가치는 상품에 상업적 내용물을 제공하며, 이는 상품을 “교환가치의 물질적 운반자”(material bearers of exchange-value)로 만든다. 

 

그러나 “분명히, 상품의 교환 관계는 상품 사용가치의 추상화로 특징지어진다. 교환 관계에서 하나의 사용가치는 적절한 수량으로 존재할 때만 다른 사용가치만큼 가치가 있다”(맑스, 1867). 교환 가치는 비율과 측정에 기초한 양적 관계이며, 우리가 관심 두는 레이디 가가의 최근 사치에 대한 가십이 될 수도 있다. 사회가 그런 사용가치가 소비할 만큼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한. 

 

다른 학자들, 특히 Jhally(1987)는 유물론적 인식론적 패러다임을 확고히 유지하면서도 상품 물신주의와 상징적 코드의 사회적 구성(상품에 의미가 어떻게 생성되는지)과 관련하여 사용가치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지만 스마이드 자신이 이 측면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고 해서(이는 맑스도 마찬가지다) 그의 접근 방식이 옳지 않다거나 그가 다른 관점을 무시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특정 관점을 제공했을 뿐이다. 맑스도 사용가치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교환에 집착했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이런 비판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불공평하기 짝이 없다. 정치경제학이 사용가치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 사용가치가 사회적으로 중요하지 않다(오히려 반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Brett Caraway

 

이제 Caraway(2011)의 두 가지 다른 비판 포인트로 눈을 돌려보자: 청중(수용자)은 과연 어느 정도까지 자본에 예속될 수 있으며 에이전시(주체)의 역할은 무엇인가? 스마이드의 분석에서도, Jhally와 Livant의 분석에서도, 청중 노동에서 묘사된 노동 과정이 자본가의 통제 하에 있다는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으며 사용가치가 청중으로부터 소외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어떤 시도도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감시의 새로운 기술을 거론하면서 자본이 이런 활동들을 어느 정도까지 자본의 축적 논리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지는 지속적으로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이어 “청중에 대한 정확하고 냉정한 측정은 허구”이기 때문에 새로운 감시 기술에 대한 효과는 상당한 회의적 시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보기에 Caraway가 제기한 문제들 대부분이 잘못되었다. 미디어 관련하여 자본가가 직접적으로 노동자를 통제하지 않는다는 그의 지적을 일정 부분 맞다. 그런데 전통적 생산 과정에서도 자본가는 노동자들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 미디어 소유주는 방송 콘텐츠로 청중의 관심을 “구매”할 수 있는데 노동자의 경우 콘텐츠 소비를 원한다면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다 (물론 티브이를 끄는 옵션은 항상 있지만 이 선택이 청중의 권력을 마법처럼 향상시킨다는 이상적 가정이다). 전통적 노동 과정과 비교했을 때, 청중과 자본가(미디어 소유주)와의 관계는 확실히 그렇게 다르지 않다. 노동자들도 공식적으로는 마치 청중처럼 누구를 위해 일할 것인지 고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두 경우 모두 그들의 옵션은 매우 제한적이다.

 

그리고 전통적 자본가들처럼 미디어 산업의 오너들은 그들이 무엇을 팔 수 있으며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는 얼마나 투자해야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계산은 아주 간단한 것이고, 만약에 그대로 실행되지 않는다면 그들의 사업은 살아남을 수 없다. 이 대목에서 신비화는 필요치 않다; 자본가는 그들이 운영해야 할 사업체 환경에 맞는 운영 방식을 적용할 뿐이다.  Caraway는 또한 스마이드의 논리에서 “청중은 상품의 판매자로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함으로써 독자를 오도하고 있다. 청중의 상품은 그들의 “자유 시간”인 레저 시간에 그들이 수용하는 콘텐츠에 대한 대가로 미디어 소유주에게 “파는” 추상적 시간이다. 이 거래에 포함된 사용가치는 사실 관련이 없지만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디지털화 시대의 사용가치는 미디어 소유주가 광고주에게 판매할 수 있는 청중의 개인적 특성(사회적 지위, 관심사 등, 또는 아주 간단히 말하면, 만약 청중이 덜 차별화되어 있다면 미디어 소유주는 청중의 관심을 판다) 그리고 가장 주목할 만하게도 디지털 환경에서 청중들이 만들어 내 콘텐츠이다.   

 

여기에서 맑스주의 분석에서 벗어난 것은 없다. Caraway가 보기에 노동이 상품이 되기 위해서 결정적으로 필요한 “청중과 광고주 사이의 공식적 계약, 협상 혹은 논의가 없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노동자가 그들의 노동력을 노동 시장에 내놓을 때 필요한 유일한 사전 조건은 자유롭게 그들의 착취자를 고를 수 있는 능력뿐이다. 실제로 Caraway가 언급한 모든 것은 대부분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인터넷에서는 종종 공식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협상들은 마우스 클릭이나 리모콘을 통한 사용 약관 및 개인 정보 보호 정책에 대한 동의 과정을 통해 진행된다. 미디어 콘텐츠의 소비자는 그들의 “고용주”를 바꿀 수 있고, 인터넷에서 사람은 자신이 웹사이트를 구축함으로써 쉽게 자영업을 시작할 수 있는데, 물론 구글이나 페이스북과 같은 지배적 주자들에 맞서 생존하는 데 엄청난 어려움을 겪는다. 

 

Caraway의 가장 큰 문제는 매우 다른 두 레벨의 논쟁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추상적 레벨과 구체적 레벨. 물론 두 레벨 모두 매우 중요하며 경향에 초점을 맞춘 추상적 논쟁은 구체적 현실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이뤄진다. 그러나 실제로 존재하는 일상생활에서 작동하는 특정 사례와 여러 메커니즘을 추상화하는 추상적 논쟁은 그 통찰력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구체적 현실과 특정 사례들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 맑스가 추상화를 시도하는 가장 분명한 이유는 아마도 구체적 현실 레벨로 낮추어 ‘모든 것’을 분석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분석은 특정 사례에 초점을 맞출 뿐이다. 이런 분석은 많은 새로운 지식을 가져올 수 있지만, 동시에 매우 적은 지식만을 가져온다. Collier(1994)가 지적했듯이, 구체적인 전체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이에 따라 종종 중요한 메커니즘과 해답을 간과하게 된다(우리는 기껏해야 설득력이 떨어지는 일반화만 시도하게 된다).

 

정치경제학이 추상화를 필요로 하는 것(경향에 초점을 맞추는 것과 더불어)을 이해하지 못하는 Caraway의 무능함은 “광고주들은 청중의 힘을 사는 것이 아니라 청중의 조작된 이미지를 사는 것이다. 그리고 비판적 학자들이 비판해야 하는 것은 이 이 조작이다”라는 그의 진술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는 진정으로 광고주가 그것을 모른다고 믿는가? 광고주들은 “실제” 청중이 아닌 청중의 근사치, 추상화, 통계 자료를 사는 것이다: (그들이 가진 데이터 때문에) 광고주가 구매한 청중에 대한 조작된 생각은 청중 대부분이 광고주가 계획한 방향으로 행동할 것이라는 기대와 관련이 있다. 추상적 논쟁에서 청중은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광고주는 파산한다; 추상적 추론에서 이 근사치는 합리적 구매를 위해 장기적으로 충분히 현실에 가까워야 한다. 

 

이런 모습은 구입한 노동력으로부터 충분한 잉여 가치를 추출할 수 있을지를 사전에 결코 알 수 없는 자본가와 매우 유사하다. 자본가는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을 만큼 노동력으로부터 충분한 잉여 가치를 추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자본가는 생산 과정에서 그가 고용한 노동자들을 결코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 최악의 경우 노동자들은 파업할 것이다. 미디어 소유주에게 최악의 시나리오는 청중들이 소유주가 만든 콘텐츠의 시청을 멈추는 것이다. 이 경우 미디어 소유주는 다른 콘텐츠를 내보내거나, 광고 수입에 맞추어 비용을 줄이거나, 파산할 것이다. 물론 추상적 접근은 주관성을 제거하지만 이것이 자본주의가 ‘실재’ 하는 방식이다: 합리화, 객관화, 추상화.

 

현재 대부분 사망한 스탈린주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떠나, 맑스 후기 저서 일부에서 드러난 주관성과 노동자 계급 권력에 대한 맑스의 명백한 관심 부족이 이들에 의한 세계의 점진적 변화에 대한 그의 무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 있는지는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그렇다면 맑스의 이런 무관심은 그의 일생의 실제 많은 행동과 모순될 것이다. 하지만 역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맑스가 분석할 수 있었던 것은 주관성에 대한 그의 관심 부족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특히 예속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 주체를 포함한 여러 다른 경향이 작용하는 추상적 레벨에서만 분석이 가능하다). 

 

맑스는 생산 과정에서 자본가가 어떻게 노동자를 착취하는지 보여주기 위해 자본주의와의 투쟁에 매우 중요한 구체적 현실의 다른 측면에 대한 추상화를 시행해야 했다. 추상화는 맑스와 스마이드 모두에게 자본주의가 어떻게 추상적 형태로 작동하는지에 대한 특정 관점을 제공해 주었는데, 이 관점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 역시 명백하다; 왜냐하면 이 관점에서는 사회생활의 방대한 부분이 배제된다. 추상화는 매우 중요하지만, 여전히 범위에 제한이 있으며 이는 추상화의 특징이다. 예를 들어, 스마이드는 ‘자동(automatic)’ 저항을 찾지 못했지만 실제로 주체(agency)를 무시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의식 산업(Consciousness Industry)으로부터 끊임없는 압력을 받는다; 그들은 엄청난 양의 소비재와 서비스에 둘러싸여 있다; 그들은 스스로 (청중) 상품으로 생산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삶과 에너지를 상품 형태로 재생산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결코 수동적이거나 무력하지 않다. 사람들은 자본의 강력하고 다양한 압력에 최대한 저항한다. 사람들의 타고난 능력과 사랑, 존중, 공동체 관계 그리고 창의성에 대한 필요에서 비롯된 개인과 집단의 저항은 매일 재생산된다. 즉, 핵심 영역(전 세계와 마찬가지로)의 주요 모순은 사람과 자본 사이의 모순이다. 그리고 현재 사람들은 이 모순의 주요 측면이다.”(스마이드, 1981)

 

따라서 스마이드가 주체(agency)를 무시했다는 Caraway의 생각은 타당하지 않다. 설사 스마이드가 주체를 무시했다고 하더라도 정치경제학적 관점(결과적으로 특정 인식론적 입장의 채택)에서 자신의 연구 결과를 도출한 학자에게 주관성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것은 의사가 화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혹은 배관공이 아니라 목수라는 이유로) 비판하는 것과 비슷하다. 누군가가 관점을 추가할 수는 있겠지만, 학자가 관점을 추가하지 않았다고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원칙적으로 사회과학이 특히 비판적인 여러 다른 관점과 다른 분야의 다양한 분석을 반드시 수용해야 하더라도 다른 접근법과 그 주제를 구분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사회 분석에 대한 기여가 크게 다를지라도 한 접근법을 다른 접근법과 단순히 혼합하는 것은 실수다.

 

많은 학자 - 맑스 자신도 아마 이 중 한 명일 것이며 그리고 ‘자본론’이 사실은 정치적 행동에 관한 저술이 아니라는 제임슨(2011)의 날카로운 지적에 동의하는 학자들 - 은 주체(agency)에 초점을 맞추는 것(예, 서로 다른 주체에 의한 저항과 사회 운동에 의해 생산된 (반대) 권력의 가능성)이 정치경제학의 지향점이 아니라는 것에 쉽게 동의할 것이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 정치경제학은 부의 재분배 문제를 다룸과 동시에 부가 실제로 어디(인간 노동)에서 기원하는지 명확히 알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함으로써 성공적 정치적 행동을 위한 핵심적 사전 조건의 하나가 ‘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된다’. 

 

네그리와 하트

 

만약 원한다면 그런 정치경제학적 관점을 급진적 정치 이론으로 보완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 네그리와 하트의 접근법이며 자율주의 사상이다. 그러나 주체(agency)와 주관성(subjectivities)은 정치경제학의 전형적 주제가 아니며 그런 적도 없었다. 그것들은 (급진적) 정치 이론의 주제이다. 개인적으로, 예를 들어, 네그리와 하트가 양자택일처럼 프롤레타리아를 무시하고 다중(multitude)에 집중하는 쉬운 길을 택했다고 사람들이 주장할 때 나는 혼란스럽다. 그렇지 않다. 맑스의 정치경제학 저술과 유사하게 네그리와 하트의 저술에서 프롤레타리아는 기술적 개념(맑스의 상품물신성 혹은 착취 개념처럼)으로 볼 수 있다. 이 기술적 개념을 정치적 개념으로 바꾸는 것은 이해 방식의 차이다. 예를 들어, 자율주의(autonomism)는 정치경제학 레벨에서 구성된 기술적 개념들에 대한 정치적 이해를 제공한다. 

 

다중(multitude)은 프롤레타리아와 모순되거나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 급진적 정치 이론에서 파생한 개념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한 개념(특정 학문 영역에서 도출된)을 다른 개념으로 보완하는 관계로 볼 수 있다. 이 개념들은 서로 다른 개념들을 배제하지 않는다. 나 역시 정치경제학적 관점을 유일한 올바른 접근법이라고 맹목적으로 옹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많은 경우 경향과 메커니즘에 초점을 맞춘 “객관주의적” 접근은 매우 해롭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치경제학적 관점의 기본 전제는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며, 그에 합당한 긍정적 평가가 주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정치경제학의 중심 개념에 대한 정치적 이해는 엄격하고, 기술적이고, 추상적이며, 비주관적인 비정치적 이해를 맑스가 우리에게 먼저 제공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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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맺음말

 

1947년에 도구적 이성 비판을 발표한 아도르노는 1969년 그의 에세이 ‘자유시간’(Free Time)을 통해 2023년 우리 무릎을 딱 치게 만드는 개념을 선보였다. Hobby Ideology. 대부분 선진국에서 주 5일 근무와 이틀 휴식이 평균이 되어가는 21세기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렇게 쉬어도 피곤하다고 말한다. 심지어 일한 날보다 더 피곤하다고 토로하는 이들도 있다. 내막을 들여다보면 이해되는 부분이 많다. 쉬는 날에 많은 이들은 ‘취미’ 활동을 한다. 그리고 그 취미 활동은 많은 경우 상업적 조직이 판매하는 취미 활동 상품을 구매하는 형식이다. 쉬는 시간은 이런 취미 활동 상품을 구매해야 알차게 보낸 것으로 간주된다. 여기에 인스타그램과 같은 소셜미디어는 이런 취미 활동 상품의 구매를 경쟁적으로 부추긴다. 이와 유사하게 휴일에는 상업적 조직이 판매하는 오락 내지 여가 상품을 구매하는 것을 많은 사람이 알찬 휴식으로 간주한다. 가령, 어린아이를 가진 가족은 놀이동산에 가거나 펜션에 가서 시간을 보내야 제대로 된 휴일을 보낸 것으로 간주한다.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혹은 단절을 의미할 수 있는 휴식 시간과 취미 활동이지만 여전히 주중 직장처럼 자본주의 손바닥 안을 벗어나지 못한 채 자본주의적 소비가 휴식과 취미 활동의 디폴트 모드로 정착하고 있다.  

 

우리가 티브이 혹은 유튜브를 시청하는 것이 휴식이 아니라 노동이라고 잘라 말하기에는 여전히 부담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뭔가를 ‘소비’하고 있는 것은 맞다. 따라서 ‘소비 노동’이라는 개념을 고려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