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역사, 인간 그리고 뉴질랜드

세상 이야기

자본주의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상품화 (5/5) - 디지털 자본주의 이해하기 (9)

김 무인 2023. 8. 26. 10:18

역자 머리말

 

‘Social Factory’는 사회적 공장으로 번역하기보다는 ‘사회공장’으로 번역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물리적) 공장의 전 사회 영역으로의 확장을 의미하기 때문에 사회의 공장화라는 측면에서 사회공장이기 때문이다. ‘Communication’은 대부분 ‘커뮤니케이션’으로 번역했지만, 문맥에 따라서는 ‘통신’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어의 ‘의사 전달’ 혹은 ‘의사소통’이라고는 번역하지 않았다. 주관적이겠지만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 혹은 뉘앙스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단어 ‘enclosure’ 역시 ‘인클로저’로 발음 표현을 그래도 사용했다. 13세기 영국에서 목축업의 대규모화를 위해 소규모 토지를 합병/몰수한 것을 시점으로 18세기까지 소유권이 명확하지 않았던 공유지의 사유화를 일컫는 이 용어는 이 논문에서는 현대 디지털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부와 대기업에 의한 소위 커먼즈의 민영화 혹은 상품화를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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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커뮤니케이션 자본주의와 사회 공장: 스며드는 상품화를 향해? (Communicative Capitalism and the Social Factory: Towards a Seeping Commodification?)

 

 

커뮤니케이션의 정치경제학과 포스트-노동자주의/자율주의 네오막시즘 (post-operaist/autonomist neo-Marxism) 간 핵심적 차이점은 후자는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을 벗어나 그 영역을 확장한다는 것이다. 또 후자는 주체(subjective agency)에 훨씬 더 큰 초점을 맞춘다; 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개별 주체이며, 가치 생산은 더 넓은 사회(예, 사회공장)로 확산하기 때문에 이 과정들에 대한 정치적 가능성과 인간의 저항에 대한 근본적 확장을 제공한다. 

 

상품으로서의 청중(수용자)(audience)에 대한 여러 고찰과 연구는 바로, 이 사고 방식과 직접 연결될 수 있다. 네오막시스트 학자들은 현대 사회에서 커뮤니케이션, 심지어 언어 능력 같은 것, 이 패권적 우위를 차지했기 때문에 상품으로서의 청중 개념은 커뮤니케이션 정치경제학에 대한 가능한 몇 연결 고리 중 하나만 제공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노동이 생산 과정을 유치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의도된 물리적 장소(즉, 공장, 제조 등)를 벗어나 더 넓은 사회로 확장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회공장”(social factory) 개념도 간접적으로 사회의 본격적인 상품화를 가리키는데 이는 수용자(청중) 상품 논쟁에 참여한 스마이드와 그 외 학자들의 입장과 상당히 유사하다.  

 

최근 조르조 아감벤(Agamben)(2000), 파올로 비르노(Virno)(2004), 티지아나 테라노바(Terranova)(2004), 크리스티안 마라찌(Marazzi)(2008), 안토니오 네그리(Negri)(1991), 네그리와 하트(Hardt)(2001), 조디 딘(Jodi Dean)(2008), 맛떼오 파스퀴넬리(Pasquinelli)(2009), 앙드레 고르츠(Gorz)(2010), 안드레아 푸마갈리(Andrea Fumagalli)와 산드로 메차드라(Sandro Mezzadra)(2010), 얀 물리에 부탕(Yann Moulier-Boutang)(2011)과 같은 여러 학자가 커뮤니케이션과 언어 능력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는 의사소통적, 인지적 혹은 심지어 기호 및 생물 언어적 자본주의의 변형에 대해 글을 썼다. 그들의 글은 심지어 인간 종족에 대한 ‘심오한’ 존재론적 명제로 볼 수 있다. 이들에 앞서 마우리치오 라자라토(Lazzarato)(1996)는 그의 비물질적 노동 개념을 통해 유사한 통찰을 보여주었다. 

 

이 중 고르츠(2010)는 이런 유형의 노동을 가장 면밀히 분석하였다. 고르츠는 비물질적 노동이 어떻게 패권적 노동 형식이 되었고, 현대 사회 가치 창출의 원천이 되었는지를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이 변화 때문에 사람들은 자본에 완전히 예속되어서, 그 자신 스스로 기업이 되어 가능한 많은 인적 자본을 보유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자기 기업가 정신으로 사람 전체와 삶 전체가 마침내 노동에 투입되고 착취된다. 삶은 “가장 소중한 자본”이 된다. 노동과 비노동 간 경계는 희미해지는데 이는 노동과 비노동 활동이 같은 기술을 활용하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삶의 시간 전체가 가치라는 손아귀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 통찰은 일견 상당히 기이하다. 노동 시간과 비노동 시간의 이런 얽힘은 전통적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전혀 흔한 현상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반대다. 자본주의 등장과 함께 자본에 의해 생산적이라고 여겨지는 것과 단지 인간 삶의 재생산을 위한 비생산적인 것 사이에 근본적 분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존 톰슨(John Thompson)(1967)이 지적했듯이 과업 지향적 노동과 ‘노동”과 “삶” 사이의 뚜렷한 구분이 가능하지 않은 것은 자본주의 이전 공동체의 특징이다. 이 공동체에서 사회적 교류와 노동은 서로 뒤섞여 있어 과업에 따라 노동하는 하루가 길어질 수도, 짧아질 수도 있으며, 노동과 ‘하루 시간을 보내는 것’ 사이에 큰 괴리가 없다. 

 

 

산업자본주의 시절 노동 시간과 자유 시간은 구분이 뚜렸했다

 

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역사적으로 시간으로 엄격하게 측정되어 왔다. 톰슨은 시간에 대한 이해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것뿐만 아니라, 시간에 대한 선형적 측정은 자본주의에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맑스주의 노동가치론의 전제 조건 중 하나는 노동자의 노동은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자본가들이 측정을 위한 여러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서 일부 학자들은 신테일러주의 혹은 디지털 테일러주의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는 추상 시간에 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에서 쉽게 측정될 수 없는 일자리가 증가하는 것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종종 이 신테일러주의가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피상적으로 되기 싶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에 그랬듯이 신테일러주의 특징은 노동력에 대한 효과적인 감시와 통제 수단이었다. 하지만 노동 시간과 자유 시간의 경계가 갈수록 흐릿해지면서 어려움이 증가하고 있다. 모이셰 포스톤(Moishe Poston)(1993)이 지적했듯이, “자본주의 산업 생산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가치는 생산된 ‘실질적 부’에 대한 척도로 점점 더 적절하지 않게 된다. …가치는 그것을 창출한 생산 시스템의 잠재력 측면에서 시대착오적으로 된다; 그 잠재력의 실현은 가치의 폐지를 수반할 것이다.” 이것은 “가치의 폐지는 노동 시간이 더 이상 부의 척도 역할을 하지 않을 것이고, 부의 생산은 더 이상 생산 과정에서 직접적 인간 노동에 의해 결정적으로 영향받지 않으리라는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포스톤이 보기에 “맑스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극복은 생산의 물질적 형식 그리고 사람들의 노동 방식에 대한 근본적 변형을 수반한다.” 

 

많은 노동이 생산 과정 혹은 전통적으로 생산 장소(예, 공장, 제조)로 여겨졌던 곳 이외의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역사적으로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그러나 과거의 그런 노동은 자본에 의해 비생산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백인 남성만을 “진정한 프롤레타리아”로 간주한 “진보적” 사회주의 운동에서도 종종 그렇게 여겨졌다. 그러나 그 장소들은 동시에 노동자들의 삶을 재생산하는데 중요했다. 특히 노동이 젠더 구분에 기초한 여성의 비생산적 가사 노동일 경우 더욱 그러했다. 

 

레오폴디나 포르투나티(Leopoldina Fortunati)(1989)에 따르면, 자본주의 생산 양식은 생산과 재생산으로 구분되는 이중적 성격을 갖는다. 후자는 가치를 갖고 있지 않지만(가정에서 수행되는 비임금 노동이기 때문에), 전자는 생산 과정에서 가치를 생산한다고 간주된다. 그러나 그녀는 이 전통적 논리를 뒤집고 재생산이 생산 과정의 필수적 부분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재생산은 자본주의 순환 사이클의 중요하고 필수적 부분으로서 가치 창출에 분명히 기여한다.” 재생산은 생산에 필수적인 노동력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간접적 임금 노동이다. 따라서 한 사람의 임금으로 두 명의 노동자가 착취되는 셈이다. 

 

 

1972년의 레오폴디나 포르투나티(Leopoldina Fortunati)​

 

이 개념은 오늘날 더욱 확장되었다. 예를 들어, 어슐러 휴즈(Ursula Huws)(2003)는 소비자에게 강요되는 수익성 없는 많은 과제를 가리키는 “무급 소비 노동”과 “소비 노동자”라는 용어를 만들어 이것들을 보통 사람들이 그들의 노동력(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들의 삶)을 재생산하기 위해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무급 노동 리스트에 추가했다. 이런 유형의 노동은 대부분 이 요구를 불균형적으로 강요받는 여성들에 의해 수행되면서 기존 젠더 관계를 재생산하게 된다. 이 주장의 핵심적 새로움은 자본이 이런 류 노동의 “경제적 외부성”을 축적 사이클에 편입시킬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노동의 개념화가 어떤 변화를 거쳐왔는지, 그리고 오늘날 노동의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 질문들은 오늘날 정치경제학이 직면해야 하는 중대한 도전으로 간주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아마도 전적으로 새로운 국면의 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의 구조적 변형에 초점을 맞추고 싶지도 않다.  여기서 우리가 집중하고 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중요한 질문, 즉 “어디까지” 상품화가 인간의 삶에 퍼질 수 있는지, 어디에서 무엇이 어떤 조건에서 상품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현재의 역사적 순간에서 상품화의 역할 뿐만 아니라 자본이 어디에서 잉여가치를 추출할 수 있는지를 분석할 때 스마이드의 초기 통찰과 네오막스시시트의 정치경제학 비판 간에 놀라운 합치점을 볼 수 있다. 이 두 학파에 따르면 상품화 과정에는 한계가 없으며 많은 비판적 커뮤니케이션 학자들이 자율주의적(Autonomist) 관점을 그들의 이론 체계에 합치시킨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만약 맑스가 오늘날 살아있다면 그의 주요 연구 업적은 자본론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론(Communications)이었을 것이다”라는 조지 거브너(George Gerbner) (1983)의 통찰을 이 두 학파는 공히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지 거브너(George Gerbner)(1919~2005)

 

현대 사회의 새로운 점은 자율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지식을 생산하고, 의사소통하고, 변화된 조건에 빠르게 적응하고, 참여하거나 협력하는 인간의 역량을 자본주의 축적 사이클에 포함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이들 역량은 개방적 동물로서 정치적 사회적 기관을 구성할 수 있는 인간 특유의 특성이다. 이런 특성들은 살아있는 노동으로부터 가치를 추출하는 역할을 하는 다양한 기술과 장치를 통해 동시대 자본에 의해 직접 “고용”된다. 이런 주장은 심지어 자본주의의 자연스러운 발전 경향으로 볼 수 있는데 이런 경향에서는 어떤 가치를 추출할 수 있는 영역을 식민화할 때 그 자체 한계를 설정할 수 없다. 

 

 

파올로 비르노(Paolo Virno)(1952~present)

 

이것은 맑스의 ‘그룬트리세’의 “기계 위의 파편”에서 영감을 받은 파올로 비르노(Paolo Virno)(1996)의 ‘일반 지성’(general intellect) 개념에 대한 재해석에 직접 적용될 수 있다. 비르노는 그의 사회적 존재론을 통해 포스트 포드주의 자본주의는 우리 인류를 특징짓는 모든 능력(즉, 언어, 추상적 사고, 유연성)을 동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비르노가 보기에 이런 능력은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능력은 아마도 모든 직장과 직업에 사용되는 특성들이다.  파스퀴넬리(2009)는 대신 ‘공동 지성’(common intellect)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 개념을 통해 그는 자본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으로 있는 능력을 실제로 어떻게 착취하며, 우리의 공동 사회적 생산을 어떤 비용도 지불하지 않은 채 전용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페데리코 치치(Federico Chicchi)​

 

페데리코 치치(Federico Chicchi)(2010), 크리스티안 마라찌(2010) 혹은 까를로 베르첼로네(Carlo Vercellone)(2010)가 지적했듯이, 금융자본주의는 경제 축적 사이클 전반에 걸쳐 확산될 수 있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금융이 이제 시작(생산)부터 끝(소비)에 이르는 경제 사이클 모든 단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금융자본주의가 전통적으로 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영역(즉, 공장의 울타리 뒤에서 교환가치를 생산)을 넘어 가치를 추출할 수 있는 주요 이유다. 이것은 동시에 상품화가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까를로 베르첼로네(Carlo Vercellone)​

 

 

 

5.1 두 번째 인클로저 운동: “... 고체인 모든 것이 상품으로 녹는다”? (The Second Enclosure Movement: “…and 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 Commodity”?)

 

 

18세기 영국의 인클로저

 

최근 수십 년간 발전해 온 상품화의 광범위한 확산과 심화는 우리 일상생활과 새로운 형태의 노동으로부터 이익을 추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커뮤니케이션, 정보, 문화, 창의성, 혁신, 지식, 연구 및 과학, 일상 활동 그리고 심지어 인간 감성에 대한 전면적인 상품화는 상품화를 수행하는 새로운 방식을 창출했다. 최근의 역사적 인클로저 물결 속에서 상품화되는 커뮤니케이션의 분야의 예속은 이전에 시장에서 생산되고 교환되었던 것들 그리고 그 영역과 구분되어야 한다.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은 특별한 상품이다.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적 특성은 결국 이들을 개방적이고 비경쟁적 공공재로 만든다. 더 나아가 사용되었을 때 더욱 가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메타 공공재로 정의될 수도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정보통신은 정치적 개입을 통해서 인클로저가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상품이 될 수 없다. 따라서 크리스토퍼 메이(May)(2010)가 보기에 이들의 상품화는 새로운 인클로저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제임스 보일(James Boyle)(1959~present)

 

한때 공공 영역의 한 부분으로서 사회의 커먼즈(commons)를 구성했던 영역에 대한 인클로저와 사유화를 제임스 보일(James Boyle)(2008)은 “마음속 커먼즈의 인클로저”라고 묘사했다. 그는 이것을 수 세기 전에 발생했던 첫 번째 인클로저와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진행된 경제적 동기를 추가한 두번 째 인클로저 운동으로 정의했다. 중요한 차이는 두 번째 인클로저는 정보와 문화적 자원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다. 마이클 페렐만(Michael Perelman)(2002)은 지식재산권(IPR)이 “역사상 가장 거대한 부의 재분배에 기여했다”는 표현으로 이 인클로저의 범위와 충격을 묘사했다. 몇 학자들은 새로운 제국주의 식민지 관행이라고 이 인클로저를 묘사했으며 데이비드 하비(Harvey)(2003)는 이 사유화 과정을 강탈에 의한 축적이라는 용어로 개념화했다. 이 용어는 원시적 축적이 다른 영역들을 자본주의 축적 사이클에 편입시키기 위해 종종 폭력적 과정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하비가 보기에 원시적 축적은 자본주의 등장 때만 발생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이 이미 작동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발생한다. 현재 상황의 경우   신자유주의적 질서와 다양한 커먼즈의 상품화라는 전형적인 “약탈적 축적 관행”이 그것이다. 

 

 

마이클 페렐만(Michael Perelman)(1939~2020)

 

이 두 번째 인클로저는 사람들의 역사, 문화와 문화적 유산, 개인과 지적 창의성, 유전적 물질 등(특히 특허와 지식재산권을 통해)을 그 대상으로 한다. 데이비드 베리(David Berry)(2008)가 보기에 “지난 10년간 심화된 생각과 표현에 대한 급격한 인클로저”는 임대인(rentier) 계급의 출현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심지어 “새로운 봉건주의”로 분류할 수 있다. 

 

 

데이비드 베리(David Berry)

 

데이비드 헤스몬달(David Hesmondhalgh)(2008)은 창의성과 지식의 소유를 가능하게 함과 동시에 새로운 유형의 제국주의를 가져온 지식재산권 시스템에 하비의 개념을 체계적으로 적용시킨 학자 중 한 명이었다. 그에 따르면 지난 수십 년간  “자본은 문화에 대한 유례없는 관심을 보여왔는데” 강력한 지식재산권은 이 문화 영역의 상품화를 가능하게 한 핵심이었다, 로버트 맥체스니(McChesney)(2013)가 최근 지적했듯이 저작권은 “문화에 대한 기업의 독점권을 보호하고 이익의 대부분을 미디어 대기업에 제공한다. 이들 대기업은 저작권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다. 저작권은 우리 공동 문화의 전면적 민영화를 촉진하는 주요 정책이 되었다.” 

 

 

로버트 맥체스니(McChesney)(1952~present)

 

정보, 커뮤니케이션, 문화 그리고 창의성 분야의 이 새로운 인클로저는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이 분야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생각하고, 이해하고, 표준화하고, 반영하고, 합리화하고, 제도화하고, 연구하고, 창조하고, 통합하고, 의문을 제기하고, 보존하고, 비판적으로 우리 사회, 우리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질서, 그리고 결과적으로 우리의 삶을 다루는 중요한 사회적 삶의 영역이다. 따라서 이 분야의 상품화는 민주주의 질, 민주적 참여, 그리고 우리 사회 공적 영역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무엇이든 상품화될 수 있고 축적과 수익성이라는 특정 이익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축적과 수익은 상품의 생산과 교환에서 자본의 유일한 목표이다. 이 관계에서 교환가치는 지배적이며 보편적 등가성과 도구적 합리성이 상품 형식의 예비 조건이다. 따라서 이런 경향의 중심 목표는 인간의 혜택과 민주주의 촉진이 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오늘날 정보의 상품화는 새로운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만들고, 기존 불평등을 심화시키면서 종종 개인 “뿐만 아니라” 사회와 공동체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지식재산권은 거의 모든 것을 커버할 수 있기 때문에, 특히 새로운 정보통신기술 덕분에 모든 것을 상품화하면서 더 넓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일찍이 이를 주목한 프레드릭 제임슨(Jameson)(1991)은 “정보통신기술은 오늘날 다국적 자본주의 전 세계 시스템의 왜곡된 형상을 더욱 심화할 뿐”이라고 설파했다. 그는 통신망을 글로벌 자본주의 시스템과 밀접하게 연결된 것으로 보았다. 이와 같은 통신의 상품화와 인터넷의 외관상 개방성은 모든 것이 비즈니스로 운영되어야 하고, 모든 것의 끝은 시장이 되어야 하는 신자유주의적 가치의 완벽한 반영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이런 초기 통찰은 컴퓨터 네트워크를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등장과 자본주의 시장의 지속적 세계적 팽창과 연계시킨 댄 쉴러(Dan Schiller)(2000)의 통찰과 매우 유사하다. 그는 ‘디지털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이용해서 인터넷이 이제 초국가적 시장 시스템의 핵심 커뮤니케이션 수단 중 하나임을 선언했다. 즉, 초국가적 기업 내에서, 그리고 초국가적 기업 간에 정보 공유를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자 불가결한 인프라가 된 것이다. 아르망 마틀라르(Armand Mattelart)(2000)가 보기에 초국가적 기업들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커뮤니케이션이 보편화되어 ‘반드시’ 완벽히 자유로운 상호작용이 이뤄져야 하므로 이러한 결과는 놀랄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네트워크-회사”의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상호 의존적 부분은 전체의 부분으로 작동할 수 없게 된다. “부분 간 상호운용성의 결여, 즉 자유로운 상호작용의 결여는 시스템에 대한 위협이다.”

  

 

아르망 마틀라르(Armand Mattelart)(1936~present)

 

디지털 상거래를 가능하게 한 인터넷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바로 기업 비즈니스의 수요였다. “사이버 공간은 단지 예시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 실제 중요한 부분으로서 더 큰 정치경제를 형성한다”는 댄 쉴러의 서술은 많은 면에서 제임슨의 초기 통찰을 강조함과 더불어 명확한 역사적 유물론적 해석을 제공한다. Eran Fisher(2010)는 디지털 담론은 신자유주의와 같은 논리를 따르며, 시장의 관점으로 사회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지적하면서 유사한 주장을 했다. 빈센트 모스코(2004)는 디지털화를 상품화에 직접적으로 연계시킨 최초 학자 중 한 명이다. 모스코가 보기에 사이버 공간의 출현은 사실 커뮤니케이션 과정 전체의 상품화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모스코(2009)에 따르면, 커뮤니케이션과 기술은 사회 전반에 걸친 상품화의 확대를 도와주는 데 특히 디지털화의 대두와 함께 그 역할이 선명해졌다. 

 

커뮤니케이션의 중요한 특성은 명확한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은 지속적이고  견고한 ‘것’(thing)이라기보다는 유동적인 과정이다. 이 특성은 ‘정보 흐름’(information flow)이라는 용어에 완벽하게 반영되어 있다. 커뮤니케이션은 어떤 견고한 것이든 스며들어 그것을 점진적으로 분해할 수 있는 지속적인 흐름이다. 비판적 커뮤니케이션 학자들은 이 사실을 힘들게 알아냈다. 자본에 의해 조직된 국제 커뮤니케이션 흐름이 뚫을 수 없는 경계와 같은 것을 건설하는데  주권을 가진 국가들이 엄청난 어려움을 겪는 문화적 제국주의 현상을 목도해서야 이들 학자는 이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테라노바(2004)에 따르면, 실제 문화 형성 과정을 완전 별개의 실체로 생각하는 것은 어렵다.  가장 큰 이유는 커뮤니케이션 과정의 상호적, 교류적 연결 특성 때문이다. 이 특성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채널과 정보통신기술에 의해 가능해진 기술적 상호연결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를 타고 흘러넘치며 그 네트워크를 넘어 순환하는 정보적 환경을 구성하는 정보 흐름의 “본성”에 기인한다. 마라찌(2008)도 유사하게 유연한 포스트 포드주의 사회의 모든 구멍으로  경제 관계가 흘러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1980년대 말에 이미 케빈 로빈스와 프랑크 웹스터(Robins and Webster)(1988)는 재생산과 (공식적으로는) “자유 시간”을 포함한 인간 삶의 모든 부분에 상품화가 침투하고 있음을 주목했다. 비슷한 시기에 모스코(1982) 역시 자본이 사적 인간관계에 침입했음을 지적했다. 앙드레 고르츠(1982)도 자본이 “자유 시간”에까지 손길을 뻗으면서 과거 인간의 상상으로 남겨졌던 인간 활동에서도 이제는 이익을 추출할 수 있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모스코(1989)는 이전까지 자본주의 시장 밖에 있었던 영역으로의 상품화 확장에 대해 연구하면서 광범위한 상품화와 집약적 상품화를 구분했다. 그에 따르면 광범위한 상품화는 지역 시장으로부터 글로벌 시장으로의 확장을 의미하고 집약적 상품화는 상품 형태가 이제 가정, 학교, 여가 등과 같은 사회적 재생산 분야에까지 확장되는 것을 의미한다. 모스코가 글을 쓸 당시도 유례없는 수준의 시장 침투가 관찰될 정도로 이 두 유형의 상품화는 명백히 증가했다. 모스코는 상품화와 새로운 인클로저(주로 정보에 대한)를 당시 사회 변혁을 주도하는 핵심적 힘으로 보았기 때문에 ”정보화 사회” 대신 ‘the Pay-Per Society”(사용자 지불 사회)라는 용어를 선택했다. 



 

5.2 스며드는 상품화 (A Seeping Commodification)

 

 

압도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인클로저와 이 분야에 대한 집중적이고 광범위한 상품화는 이 챕터의 마지막 관찰로 이어진다. 우리는 지금 상품화의 확장 방식에서 질적 변화를 목격하고 있다. 이 질적 변화의 핵심적 이유는 모든 단계에서 자본주의 축적 과정에 편입되는 커뮤니케이션 자체의 특성 때문으로 보인다. 커뮤니케이션은 필연적으로 사회의 모든 영역에 퍼져있는데, 이는 특히 우리 삶의 사소한 일상에도 스며들 수 있는 새로운 정보통신기술과 더불어 디지털 네트워크의 확장과 연관이 있다. 따라서 커뮤니케이션의 일부 매우 유사한 특성은 상품화가 정보, 커뮤니케이션, 문화(문화 생산, 유통, 소비 포함)를 완전히 잠식할 때 유래할 수 있다. 그레이엄 머독(Murcock)(2014)도 디지털 기술 찬양론자들에 대한 최근 비판에서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 그에 따르면 그런 무비판적 학자들은 “이처럼 증가하는 일상생활의 미디어화(mediatization)가 추상적 움직임이 아니라는 것을 잊기 쉽다. 미디어화는 상품 문화로의 일반화된 그리고 매우 구체적 통합 과정의 일부다.”

 

통신망의 확대와 디지털화는 지금까지 자본주의 시장에 의해 훼손되지 않았던 영역으로 상품화를 확장하고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인프라를 제공했다. 이 인프라 기반 위에서 질적으로 새로운 상품화 과정 유형인 ‘스며드는 상품화’(a seeping commodification) 개념을 제안할 수 있다. 스며드는 상품화 개념의 핵심은 현재의 역사적 시대에서 상품 형식이 사회와 인간 삶의 모든 틈새와 활동으로 스며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스며드는 상품화는 최근 수십 년간 자본주의 축적 사이클에 완전히 흡수된 커뮤니케이션의 특징적 활동을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묘사해줄 수 있다. 상품화는 문자 그대로 과거에는 시장에서 교환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영역에까지 스며들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생명공학 기술의 부상에서 (상품화된) ‘게놈’ 혹은 개인 데이터의 통계적 수집의 중요성만 생각해도 된다. 이들은 새로운 정보커뮤니케이션 기술로 무장한 새로운 침입적 형식의 감시를 전제로 한다. 아니면 이제 국가, 지역 사회 혹은 심지어 대학교 부서까지 대상으로 하는 공격적 기업 브랜딩을 생각해 보자. 후자의 황당한 사례 중 하나는 ‘지속발전 가능한 코카콜라 강좌’를 운영하는 슬로베니아의  IEDC-Bled 경영대학원이다. 마찬가지로 어처구니없는 것은 싱글 클릭 구매 방식에 대한 아마존의 특허, 미국 올림픽 위원회의 “올림픽” 단어에 대한 상표권, 마이크로소프트의 더블 클릭 특허 혹은 영국 프리미어 리그 축구 경기 결과에 대한 저작권 주장(몇 년 동안 지속되었다가 유럽 사법 재판소에 의해 부정됨) 등이다.  

 

스며드는 상품화 과정의 결과 중 하나는 우리 눈앞에서 많은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자본의 추가적 확장을 위한 문을 열어둔다는 것이다. 이는 커뮤니케이션과 정보가 어떠한 견고한 경계도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이제 커뮤니케이션과 정보는 포스트 포디즘 생산 과정의 중요한 부분은 물론 사회의 거의 모든 기관, 과정 그리고 사물의 구성 부분이 되었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1925~2017)

 

포스트모더니티의 중요한 특징이 정확히 말하면 유동성(fluidity)이라는 것은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2000)은 매우 적합한 비유인 “유동적 현대성”(the liquid modernity) 개념을 통해 사회는 한편으로는 그대로(‘현대 자본주의’)로 남아있지만 동시에 사회 전반에 걸쳐 끊임없는 변화(‘유동성’)가 일어나고 있음을 주장했다: 이는 지속성과 변화의 공존을 의미한다. 따라서 커뮤니케이션의 유동성은 상품 형식, 시장 교환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적 관계가 요구하는 엄격한 경직성을 수반한다. 

 

커뮤니케이션은 이제 인간 삶의 모든 측면에서 필수적으로 되었기 때문에 상품화는 모든 사회에 파급되어 이전에까지는 순결했던 영역과 관계에 조용히 스며든다. 상품화 경계와 한계 설정 이슈는 댄 쉴러(2007)에 의해 면밀히 관찰되었다. 그는 정보화된 디지털 자본주의하에서 커뮤니케이션 학자들이 미디어의 좁은 분야에만 집중하는 것은 이제 거의 불가능해졌다고 강조했다. 전통적으로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연구가 관심을 두었던 영역들은 이제 생명공학과 같은 다른 영역들과 중첩되기 시작했다.

 

“정보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미디어 기반 산물의 좁은 섹터에 의존하거나 동일시되지 않는다.  정보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광범위한 (그리고 여전히 결정되지 않은) 범위에 걸친 정보의 사회경제적 변형과 동시에 이뤄진다. 이전에 간과되었던 생산 영역에 상품 관계가 부여됨에 따라 새로운 형식의 유전자 및 생화학 정보는 예상치 않게 다른 더 친숙한 장르와 동등성을 획득한다. “    댄 쉴러(2007)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런 과정들에서 중요한 깨달음은 많은 경계가 지속해 붕괴하고 이 과정들이 무한하고, 유연하며, 지속해 변화할 수 있는 영역과 과정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친밀한 영역, 사적 영역, 공적 영역 간 그리고 이전의 저널리즘과 PR과의 구분이 붕괴하고 있다. 대중 커뮤니케이션과 광고도 마찬가지로 융합되기 시작하고, ‘가상’과 ‘현실’의 이분법은 분해되면서 갈수록 의미가 없게 된다. 우리는 또한 주권 국가들 사이의 엄격한 분리와 세계질서가 자본 흐름을 위한 국경의 해체로 인해 사라진 것을 인지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공공 소유와 사적 소유 간 분리도 공공-민간 공동 소유권 형태와 최근 민간 부채의 사회화를 통해 해체되기 시작했다. 또한 디지털 감시를 통해 자본 사이클에 우리의 가장 사적 정보가 포함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감시를 통해 인터넷 사용자의 개인적 특성과 그들의 일상생활 활동을 상품화로 이끄는 새로운 유형의 계량화 및 데이터 측정(소위 “빅 데이터)이 가능해졌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같은 분해 과정이 매우 상이한 생산과 재생산 영역 간 혹은 여가 시간과 노동 시간 간에도 발생하고 있다. 이들 간 경계는 과거 매우 명확했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서서히 붕괴하면서 이제 모호해졌다. 

 

허버트 실러(Herbert Schiller)(1989)는 수십 년 전에 이미 이런 변화를 알아차렸다. 그는 그때 이미 사회의 다른 영역들과 부분들의 경계가 어떻게 흐려지기 시작했는지 주목했다. 이런 변화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모든 사회 공간에 스며들기 시작한 기업 자본의 공격이었다. 더 나아가, “규제 완화, 민영화, 그리고 시장 관계의  확대가 경제의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쳤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상품화가 사회생활의 새로운 영역을 포섭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이 상품화  경향에 종속되지 않은(혹은 아직은 그렇지 않은) 영역도 자본주의 시장의 이 경향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개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시장의 힘에 의해 주도되지 않는 프로젝트와 활동조차도 효율성, 일부 공공 프로젝트의 진정한 “사용가치”(실제로는 시장에서의 교환가치), 경제주의적 근거 등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개념들을 통해 그것들의 존재를 정당화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콜린 크라우치(Crouch)(2004)가 지적한 바와 같이 전 세계의 정부는 점점 더 공공 서비스 조직과 상업적 조직 사이에 선을 긋지 못하고 있다. 이들 정부는 부주의하게도 민간 기업의 방식을 모방하려 하고 산하 부서에 민간 기업처럼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크라우치가 보기에 이런 경향은 그가 말하는 포스트 민주주의(post-democracy)의 도래에 기여한다. 포스트 민주주의는 평등주의가 결여되고 기업 엘리트들의 증가하는 힘 때문에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다. 도구화된 계량화 논리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특징이다: 뭔가를 하기 위한 정당성이 직접적 또는 최소한 간접적으로라도 자본주의 시장 논리와 연결되어야 한다. 

 

 

 

 

커뮤니케이션의 전반적 상품화로 인해 임대 자본주의 등장부터 새로운 형식의 노동과 가치 생성 방식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새로운 딜레마, 모순, 갈등 및 적대 관계가 등장하고 있다. 이 모순들은 아마도 새로운 자본주의 발전 국면으로의 전환 계기가 될 수 있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를 의미할 것이다. 월러스틴(2001)이 경고한 바와 같이, “오늘날의 부르주아 계급은 이미 새로운 생산 방식을 지배하는 ‘x’로 변신하여 그들의 구조적 위기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중”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부르주아의 이런 새로운 변신은 피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완벽히 막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이 침입적 사회 변화 과정의 다면성과 모순성은 주로 대안적 사회운동과 같은 특이성과 정치적 주체성이 자본주의의 총체적 식민화에 반대하는 삶과 행동의 공동 공간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역사의 교훈은 불도저와 같은 자본의 힘은 순진하게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자본주의의 멈출 수 없을 것 같은 행진이 제대로 된 체계적 저항 없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상품화하려는 경향이 있더라도 자본은 결코 모든 사회적 영역을 종속시킬 수 없다. 자본은 설사 커뮤니케이션에서 비롯되고 또 결과가 나오는 모든 것을 상품화할 수 있다 하더라도 잠재적 창의성과 미덕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언어 능력은 식민화할 수 없다. 모든 영역으로 확장된 상품화는 또한 “100%의 점근선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간다. 일단 우리가 이 곡선의 상위 영역에 있게 되면 각 추가 단계는 세계적 이윤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고, 따라서 자본 축적가들 사이의 내부 경쟁을 매우 치열하게 만든다.” 이런 상황은 현재 사회 질서에 대한 대안이 더 시급하고 실현 가능한 것처럼 보일 때 성장의 한계, 경제 위기, 그리고 결과적으로 새로운 정치적 혼란으로 이어진다.  

 

비록 지금까지 상품 형식의 지배에 종속되지 않았던 많은 영역에 대한 자본주의의 식민화가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지만, 스며드는 상품화는 절대적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 변동성과 경계의 결여로 매우 모순적인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갈등과 모순은 사회적 현실의 모든 단계에서 나타날 수 있고, 자본을 위한 기회처럼 보이는 것은 종종 자본을 파괴할 수 있다. 존 홀러웨이(John Holloway)(2010)는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방법으로 “크랙 캐피탈리즘”(crack capitalism)를 논했다. 홀러웨이의 ‘새로운 혁명 문법’에서 균열들(cracks)은 자본주의의 논리를 좌절시키고 반대적 사회관계를 창출하는 공간이다. 이 균열들은 종종 사회적 총체성의 지배적 역학에 작은 파열을 생산하여 상품화라는 과정들을 반대로 돌리려는 단순하고 작은 반란 행위들이다. 

 

 

 

 

커뮤니케이션은 상품화될 수도 있고 동시에 억압에 대항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의 유동성과 경계의 결여는 단점이자 기회가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디지털 영역은 극도로 상품화되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적 관계를 거부하고 반대적 관행을 위한 새로운 공간을 제공한다. 정치 운동은 적극적 형태의 반란을 준비하고 있으며, 커뮤니케이션, 문화 그리고 정보에 대한 자본주의 조직을 뛰어넘는 이론적 대안과 실천적 적용 모두 실재하고 있다. 이런 대안들과 더불어 조직의 새로운 형식과 가능성도 등장한다. 레이먼드 윌리엄스(1980)는 모순은 이데올로기 충돌이 시전되는 상부구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모순은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지배적이지만 대안적 생산 조직의 저항에 부딪히고 있는 정치경제 하부구조에도 존재한다. 

 

따라서 구체적 역사적 맥락에서 하부구조는 획일적이거나 정적인 것으로 이해되서는 안 된다; 반대로 역동적이고 모순적이다. 이는 대안적 생산관계가 더 넓은 자본주의 환경에서 등장하거나 이미 존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적대적 투쟁은 커먼즈를 위해 싸우는 운동들에 의해 가장 잘 예시된다. 이들 운동은 상품화에 역행하고, 자본주의에 반대하며, 공적/사적 이분법을 뛰어넘어서는 하나의 가능한 미래에 대한 대안적 비전을 제시한다. 닉 다이어-위데포드(Dyer-Witheford)(2007)의 표현을 따르자면, “자본주의의 세포 형식이 상품이라면 자본을 넘어선 사회의 세포 형식은 커먼즈이다.”



 

6 결론(Conclusion)

 

 

이 글에서는 해결되지 않는 딜레마들 그리고 대답보다 많은 질문이 제기되었다. 그 질문 중 하나는 분명 노동의 개념(범주)에 관한 것이다: 역사적 현재 상황에서 노동은 무엇을 포함하는가? 오늘날 흔히 ‘레저시간’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특정 노동 유형이라는 주장에 대해 많은 이들은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글의 목적은 역사적 현상, 소위 자본주의 사회 맥락 내 노동에 대한 초역사적, 인류학적 혹은 본질주의적 정의를 내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특정 노동 유형 혹은 그 산물이 우리에게 사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과 상관없이 ‘자본이 무엇을 노동으로 간주하는가?’이다. 정치경제학과 그 비평 모두 무엇보다도 노동에 대한 도덕적 정의보다는 기술적 정의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자본주의 예속에 대한 근본적 정치 저항이 가능하다. 상품의 소유자를 위해 추가적 교환가치를 생산하는 활동을 일종의 노동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 이는 맑스의 저작에서 인용한 마르쿠제의 정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노동을 다음처럼 정의했다:”상품생산에서 잉여가치를 창출하거나 ‘자본을 창출’하는 활동”. 이런 의미에서 생산성은 항상 자본에 의해서만 정의되는 개념이다.

 

지금은 좀 더 구체적 해답은 기다려야 할 시간이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차원 모두에서 지난 수십 년간 큰 변화가 일어났지만, 이 변화에 대해 우리는 납득할 만한 답변도 철저한 분석도 부족했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 제기된 문제와 딜레마를 통해 이 변화의 몇 지표가 제시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과 사회생활의 모든 단계를 관통하면서 사회의 다른 영역과 부분에 스며드는 상품화를 다룬 추가 연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 통합 경제시스템으로 발전한 자본주의의 구조적 경향은 삶의 모든 물질적 사회적 측면을 상품화하여 가치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인간 삶을 그 축적 사이클에 통합시킨다: 말뿐만 아니라 말하는 능력(logos)까지, 우리의 느낌과 감성뿐만 아니라 이들 활동을 위한 인간 전반의 능력까지. 이 경향은 도구적 합리화와 세부적 계산이란 경제적 사이클에서 벗어난 인간 삶은 단 1초도 허락해서는 안 되도록 강제하고 있다; 모든 인간 활동은 이 사이클에 포함되어야 하며 사회생활의 모든 측면은 면밀히 측정되어야 한다.”

 

맑스는 우리 사회생활을 위한 상품형식과 교환의 중요성을 보여 줄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상품화 단계는 이것보다 훨씬 더 나아간다; 그것은 거의 모든 인간 접촉과 관계를 잠식하고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그것은 미디어에서 커뮤니케이션을 도구화할 뿐만 아니라, 인간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침범한다. 상품이 사회 위에 군림하기 시작하면 사용가치의 잠재적 독립성은 사라진다; 사회적으로 유용하지만 교환가치가 없는 것들은 무가치해지고, 없어도 되며, 무의미한 것이 된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다소 추상적 개념일 수 있는 사회적 커뮤니케이션뿐만 아니라, 민주적 삶의 근본적 영역이다.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은 단지 ‘많은 상품 유형 중 하나’로 볼 수 없다. 그것들은 우리가 자유롭고 민주적 사회라고 생각하는 것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기 때문이다. 

 

 

Hanno Hardt (1934–2011)

 

Hanno Hardt(2004)가 강조했듯이, 설득력 있는 대부분의 민주주의 정의에서 커뮤니케이션은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하지만 모든 커뮤니케이션 과정이 “경쟁의 강압적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거대하며 상호 연결된 세계적 상품 체인으로 바뀐다면 과연 모든 사람에게 커뮤니케이션 권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생산(지식 노동)부터 컨텐츠, 인프라 그리고 마침내 청중이라는 이름의 인간에 이르기까지. “창의적이고 지적 작업이 대량 생산으로 바뀌고, 개인의 생각은 예측성과 반복성이 상업적 성공의 열쇠인 시장의 요구에 따라 이데올로기적 검열을 거칠 때 자유는 있는 것일까?” 주요 커뮤니케이션 채널과 표현의 자유가 사실상 독점(또는 기껏해야 과점)되고 소수의 엘리트가 소유할 때 자유는 있는 것일까?. 사회적 불평등이 역사적 정점 중 하나에 있을 때 자유는 있는 것일까?. 

 

처음부터 비판 이론은 도구적 이성 그리고 인간과 인간 이성의 도구화를 반영 혹은 비판하지 않은 실증주의적 세계관과 맞서 싸워왔다고 말할 수 있다. 비판적 이론가로서 우리의 임무는 이런 과정에 대한 설득력 있는 비판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자본주의 역사상 전례 없어 보이는 총체적 상품화의 결과로서 도구화와 경제주의적 합리화가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월러스틴(1991)을 믿는다면 이러한 과정에는 적어도 한 가지 긍정적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총체적 상품화는 결국 시장의 장막을 제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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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맺음말

 

과거 대학에서 파트타임으로 공부할 때 교수로부터 중국 유학생들의 표절(plagiarism)이 큰 문제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중국유학생에게 직접 들은 것은 아니지만 인터넷에서 중국 유학생의 표절에 대한 인식이 한국을 포함한 다른 자본주의 국가와 다르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소위 믿거나 말거나 식인데 중국에서 한 개인 혹은 집단의 지식은 세상에 공표됨과 동시에 공공 지식이 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논문식 용어로 표현하면 개인의 지식과 정보는 커먼즈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발견과 고찰이더라도 이미 공공재가 되었으므로 굳이 출처를 밝힐 필요가 없다는 유추적 논리가 가능하다. 

 

이런 논리는 단지 정보와 지식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 창작품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에는 한국을 포함한 해외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무단 복제물이 인터넷에 범람하고 있는 상황으로 알고 있다. 물론 중국에도 유료 극장과 유료 OTT가 있기 때문에 이런 무단 복제물을 위 표절 사례처럼 단순히 저작권에 대한 중국인의 다른 인식으로 그 배경을  단순화할 수 없다. 오히려 무료로 복제하여 유통함으로써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날로 먹으려는 심보가 결정적 동인일 것이다. 그럼에도 위 중국의 사례는 나에게 근본적이며 규범적 질문을 던진다.

 

정보와 지식 그리고 더 나아가 문화 창작품 등은 궁극적으로 사유화될 수 없는 공공재로서 동네 공원처럼 모든 대중이 언제든지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커먼즈의 영역으로 남겨두는 것이 정상일까?  저작권(copyright)과 지식재산권(intellectual property rights:iprs)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논문에 나오는 많은 저자들처럼 디지털 정보 자본주의 시대에 커먼즈의 사유화와 이후 지속적 자본 축적을  가능하게 하는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 부르주아를 위한 악법일까? 

 

그렇다면 넷플릭스에 유료 가입하지 않고 불법 복제물을 보는 사람을 경멸시하는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의 많은 대중은 현대 정보 자본주의의 각국 정부와 부르주아에 의해 가스라이팅 당한 걸까? 현재의 신자유주의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 이후 새로운, 가령 민주사회주의가 도래했을 때 현재와 같은 인클로저 방식의 저작권이나 지식재산권을 폐지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개인 혹은 집단에게 주어질 물질적 당근이 눈앞에서 보이지 않아도 개인과 집단의 창의성이나 노력은 여전히 발휘될까? 개인에게 주어지는 저작권이나 지식재산권의 형식을 포기하고 대신 사회적 비용으로 돌린다면 커먼즈의 증대와 활성화에 기여를 한 개인과 집단에 대한 적정 보상은 어떤 형식이 가능하며 또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할까? 

 

신자유주의 시대다. 전 세계적으로 사회적 불평등이 개인의 능력과 노력 차이가 결정적 원인으로 이해되는 시대다. 특히 현재 한국은 약육강식 정글 법칙이 노골적으로 작동하면서 각자도생할 수 밖에 없는 사회가 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저작권과 지식재산권은 열심히 노력한 사람과 집단에 대한 적절한 보호조치로 여겨지는 듯하다. 뛰어난 다른 신자유의주적 인간의 노력을 쿨하게 인정하자는 분위기다. 이러다 보니 미국 서부 개척 시대에 무주공산에 먼저 달려가 펜스를 치면 자기 땅이 될 수 있다는 믿음에 남보다 더 빨리 가기 위해 말을 빨리 몰던 영화 속 카우보이의 모습이 겹친다. 당연히 한번 펜스를 치면 대대손손 부귀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펜스를 수단과 방법을 빨리 치려는 시도는 2023년 한국에도 노골적으로 기승하고 있는 듯하다.  최근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한 티브이 프로가 왜곡되고 기만적인 내용으로 방송을 내보낸 피프티피프티라는 한국 걸그룹의 논란이 그 예다. 빌보드에서 한번 히트하면 전 세계적으로 저작권료만으로 몇십억을 어렵지 않게 벌 수 있는 듯하다. 그러다 보니 어쩌면 평생 혹은 후세에 이르기까지 계속 황금알을 낳을 저작권 그리고 상표권이라는 거위를 차지하기 위한 멤버 본인들, 부모들 그리고 주변인들의 추한 싸움으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