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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는 여전히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We Still Need Feminism in Aotearoa)
*Feminism은 여권 신장 운동으로 번역될 수 있으나 정확한 정의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기 위해 영어 단어를 원용한다.
여성운동의 성과와 과제 (The Achievements and Unfinished Tasks of the Women’s Movement)
Julia Schuster
2012년 1월 13일, 영국의 저널리스트 Harriet Walker는 New Zealand Herald를 통해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당연히 우리는 여전히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이는 이제 여성이 완전한 성적 평등을 만끽하고 있으므로 페미니즘이 이제는 필요하지 않다는 포스트 페미니즘 시대의 도래를 선언하는 대중들에 대한 반박이었다. 대중들의 지적은 맞다: 뉴질랜드 여성은 남성과 같은 법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 투표하고 학교에 다니고 대학 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같은 종류의 일에 대해서 남자 동료들과 같은 급여를 받을 권리와 그 급여를 소지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배우자를 자신이 골라 결혼할 수 있고 또 이혼을 선택할 수도 있다. 현재 시점에서 보면 법이 여성을 남성과 다르게 취급해야 한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하지만 항상 이랬던 것은 아니다. 위의 모든 권리들은 여성에게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 여성들을 그 권리들을 위해 투쟁해야 했다.
그러나 현대 뉴질랜드 여성들이 남성들과 같은 법적 권리를 향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스트들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법적 평등은 양성간 정의(gender justice)를 구축하는 한 부분일 뿐 아직도 다른 많은 부분들이 빠져 있다. 예를 들어, 여성의 낮은 평균 소득과 가사 일에 대한 높은 책임은 양성간 정의의 달성이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글은 현재 진행 중인 두 페미니스트 운동 - 여성의 정치적 영향력 증대와 여성을 향한 폭력에 대한 저항 - 을 이용해서 뉴질랜드 여성 운동의 역사, 업적과 도전을 포함해서, 를 논한 다음 남은 과제를 알아본다.
논의에 앞서 두 용어 개념이 명확해질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feminism)’과 ‘여성운동(the women’s movement)’. 페미니즘은 양성간 정의를 요구하는 세계관(worldview)으로서 양성평등(gender equality)의 추구, 양성간 공평(gender equity)을 위한 노력 혹은 가부장제(patriarchy) 폐지에 대한 소망을 수반할 수 있다. 많은 학자들 그리고/혹은 여성 운동의 멤버들은 페미니트스 가치들의 특정화에 대해서 반대한다; 따라서 페미니즘에는 여러 분파가 존재한다. 리버럴, 급진적, 사회주의적, 무정부주의적, 초국적 그리고 탈식민 페미니즘 들은 페미니즘의 이런 여러 입장을 대표한다.
덧붙여, 페미니스트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문화적 가치들에 의해 형성될 수 있는 까닭에 예를 들어 마오리, 퍼시픽, 파케하 그리고 아시안 버전의 페미니즘 간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블랙 페미니즘, 여성주의(womanism) 그리고 제 3세계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이 문화적 그리고 글로벌 상황들을 가로질러 다른 관점들을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페미니즘의 여러 세대들은 그들의 특정 역사적,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상황에 대응하여 페미니즘에 대한 각자의 해석들을 발전시켜 왔다. 따라서, 페미니즘이 여성 운동들의 목표에 영향을 미쳤지만 여성 운동들의 다원성은 이 운동들이 그 목표와 실천에 있어 다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성 운동은 동성애 해방 운동, 반인종차별 운동, 환경 운동 그리고 반자본주의 운동과 유사한 사회 운동이다. 이 운동들 중 몇은 정체성 정치(가령 동성애 해방 운동은 동성애자로서 정체성을 밝힌 사람들의 권리를 향상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에 초점을 맞춘다; 다른 운동들은 자본주의 혹은 환경 파괴와 같은 사회적 조건들을 문제삼는다. 여성 운동은 가부장제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될 수 있다. 또 ‘여성’을 대신해서 주장을 하기때문에 정체성에 기초한 운동으로 종종 묘사되기도 한다. 여성들을 같은 정치적 목표를 공유하는 집단적 그룹으로 다루는 것은 이들 페미니스트의 요구를 위한 커다란 지지 그룹을 창출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이글은 ‘단합된 여성동료(united sisterhood)’라는 사고는 조심스럽게 다뤄져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모든 여성이 같은 종류의 차별에 노출되거나 사회적 자원에 같은 접근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여성들 사이에 정치적 관심은 다양하고 심지어 서로 모순될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여성 운동은 다양한 사람들 그룹의 이해를 대변해야 하는 어려운 과정을 가지고 있다.
여성의 정치적 권한 부여 (Women’s Political Empowerment)
뉴질랜드 국회의원의 오직 30%만 여성이다. 지방 정부의 여성 대표들도 비슷하게 낮은 비율이다. 이는 여성들이 정치 조직에서 충분히 대표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최소한 두 가지 측면에서 페미니스트들의 우려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첫째, 이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여성들이 국회의원이 될 기회를 놓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고; 둘째, 과거 여성운동의 성공은 정치 과정에서 여성들을 위한 목소리를 강하게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정치적 담론에 영향을 미치고 대중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대표자리가 필요하다. 페미니스트의 이슈들에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서는 이에 참여할 활동가와 로비스트를 필요로 한다: 탄원서는 가능한 많은 지지자들의 서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법률은 정책입안자의 협조 하에서만 바뀔 수 있다. 남자들이 페미니스트 주장을 지지할 수 있다는 (그리고 자주 한다)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증가하는 ‘여성의’ 정치적 대표는 양성간 정의를 달성하고 확고히 하는데 필수적이다. 심지어 오늘날 정치에서 여성의 불완전한 대표성도 오랜 기간에 걸친 페미니스트의 투쟁 결과임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다.
세계적으로,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제1물결 여성운동은 여성참정권의 실현으로 유명하다. 뉴질랜드의 경우, 1893년의 총선에서 세계 최초로 여성에게 투표권을 허락한 나라였기 때문에 기념비적 의미를 지닌다. Kate Sheppard와 Kate Edger같은 여성 참정권론자들은 탄원서를 이용해서 그들의 주장에 대한 뉴질랜드 대중들의 지지를 호소했으며 결과적으로 여성참정권법을 의회에 제출하게 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이 것은 사회 변혁을 위한 특별히 과격한 접근이 아닐 수 있지만 당시에 여성의 공식 정치무대에의 참여는 특별한 것이었다.
마오리 여성들도 유러피안 여성들과 함께 참정권 운동에 동참했지만 여성참정권 운동은 파케하에 의해 주도되었다. Meri Te Tai Mangakahia는 문헌에도 이름이 등재된 이 운동의 지도부에 속한 몇 안되는 마오리 중 한 명이었다. 덧붙여, 수 많은 마오리 여성들이 1892년과 1893년의 탄원서에 서명을 하였다. 여성참정권 운동에 대한 마오리의 상대적 참여 부진은 유러피안 참정권론자들의 많은 마오리 전통들(예, Ta Moko (얼굴 문신 :역주))에 대한 반대 그리고 그들 조직의 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유러피안 기준을 따라야 한다는 요구 조건때문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 책에는 덜 자주 기록되었지만 마오리는 유러피안 주류 참정권 운동과 별개로 마오리 의회, Te Kotahitanga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위해 투쟁했고 그 결과 1897년 이를 달성했다.
참정권 부여는 그들의 아버지와 남편의 투표에 의해 ‘대표’되어지기보다는 여성들이 직접 민주적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후 그들이 새로이 쟁취한 권리를 행사했던 19세기 여성들은 여자를 정치적으로 무능력하다고 치부한 당시의 지배적 대중 담론에 대항하는 중요한 행동을 실천에 옮긴다. 여성 참정권 비판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참정권이 부여되면 선거날 아이가 아프면 좋은 엄마는 집에 머물 것이므로 오직 ‘그들 중 가장 최악의 여자들, 거칠고, 중성화된 “잘 나아가는” 여자들만 그 권리를 행사할 것이다.’ 이런 반대론자들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1893년 그들의 첫번째 선거에서 남자들 참여율 70%보다도 훨씬 높은 85%의 투표율을 보였다.
여성들이 참정권을 위해 모이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곧바로 더 폭넓게 여성의 권리 강화에 관심을 갖게 된다. 여성 기독교인 금주 연합(Women’s Christian Temperance Union: WCTU) - 참정권론자들에게는 중요한 조직 - 은 공격적으로 여성들에게 페미니스트의 사상을 받아들일 것을 권장했고 또 어젠다를 확장하여 여성 재소자에 대한 지원, 영양에 대한 교육 그리고 미취학 아동 돌봄 서비스를 제공했다. WCTU는 또 매춘법의 변경과 남녀 동등한 이혼권리 추구를 위해 로비작업에 관여했다. 1884년, 참정권이 주어지기 전, 의회는 기혼 여성이 자신 명의의 재산을 소유하고 자신의 소득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했으며 1880년대 말에는 여성이 학교 뿐만 아니라 주류허가 위원회와 자선단체 이사회의 위원이 될 수 있게 허락했다. 1919년에 여성들은 완전한 시민권의 징표로 여겨지는 의회 피선거권을 쟁취한다.
많은 시간이 흐른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에 서구 전역과 공산권 일부가 정치적 봉기와 학생 시위에 휩싸이게 된다. 당시 반전 그리고 반인종차별 운동에 정치적으로 매우 활동적이었던 뉴질랜드 여성들은 이 운동들이 남성에 의해 주도되는 것에 갈수록 실망했다. 북미와 유럽 여성단체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뉴질랜드 여성들은 그들이 관심을 가지는 주제들(가령 출산과 낙태의 권리, 동등한 급여, 여성에 대한 폭력 등)을 토론하기 위한 모임을 조직했다. 페미니스트 집단들의 등장은 여성들이 다시 정치 공간에 목소리를 낼 수 있고 낼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 제2물결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1985년 여성부(Ministry of Women’s Affairs: MWA)를 신설함으로써 제4기 노동당 정부는 여성들의 관심사가 정치 과정에 반영되도록 제도화하였다. 여성부의 역할은 다른 정부 부서에서 기획한 정책과 법안이 여성에게 미칠 영향에 대한 조언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 노골적인 페미니스트 이상에도 불구하고 여성부는 시간이 흐르면서 폭넓은 양성간 정의 추구로부터 여성의 지도력 함양 지원과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상황을 향상시키는 보다 좁은 집중으로 후퇴해야만 했다. 여성부는 뉴질랜드 여성의 이해와 당시 정부의 이해 사이에서 져글링을 해야만 했다. 양성간 정의를 추구하기 보다는 경제 성장을 보다 강조하는 이후 정부들의 신자유주의적 지향점을 고려할 때 여성부의 노동시장을 겨냥한 프로그램은 21세기 초 정부들의 정책 목표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1993년에 뉴질랜드의 선거제도는 FPP(지역구 기반 선거제도: 역주)에서 MMP(비례제 비중이 대폭 강화된 선거제도:역주)로 바뀌었다. 당선되기 위해서는 정당의 리스트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해야 했지만 FPP에 비해 여성이 국회의원이 될 가능성은 높아졌다. 새로운 선거제도는 작은 정당들에게도 선거에 참여할 동기 부여가 되었고 이에 따라 다양한 정당의 리스트 후보가 등장하면서 여성들 당선 가능성을 높였다. 예를 들어 1996년 선거에서 여성 의원의 비율은 21%에서 29%로 증가했다. 이런 면에서 2011년 FPP 재도입 찬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반대쪽 결과가 나온 것은 페미니스 입장에서는 다행스러운 것이었다. FPP 하에서는 여성들 의원 숫자가 다시 줄어들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제5기 노동당 정부시절에는 여성들이 정치계를 ‘접수’한 것처럼 보였다: 수상 Helen Clark, 7명의 장관, 의회대변인, 대법원장, 총독이 모두 여성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계속되는 신자유주의 어젠다로 인해 이들 여성의 페미니스트 잠재력은 억제되었다. 신자유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정치 전략들은 개별적 에이젼시와 시민의 개인적 책임을 지지하였지만 예를 들어 그룹으로서 여성을 대신하는 그룹 로비에는 관심이 적었다. 이처럼 정치 지형이 양성간 정의에 비협조적임에 따라 중요한 보직에 많은 여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오늘날, 젊은 여성은 또래 남성에 비해 전통적 형식의 정치에 관심이 적다. 이 것은 여성 정치인들(Helen Clark과 Julia Gillard - 전 호주 여자 수상:역주)이 외모와 여성성으로 비판받은 것을 생각해볼 때 놀랄 일이 아니다. 또 다른 이유로 젊은 여성들은 남성이 지배하는 정치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대신에 그들은 그들의 정치적 견해를 나누기 위해 자신들만의 플랫폼(예, 블로그나 잡지)을 개발했다. 2015년의 ‘포니테일 사건(Ponytail Incident)’은 이 역학관계를 신랄하게 드러냈다: 수상 John Key는 본인이 여러 차례 싫다고 의사표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식당 여종업원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따라서, 그는 그녀의 의사표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셈이다. 그녀는 이후 블로그에 이에 관해 포스팅을 했고 John Key는 사과했다. 그러나 정치지도자가 젊은 여성의 사적 공간을 그 같은 방식으로 침범하는 것에 대해 무감각한 것은 페미니스트들의 우려 대상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의 전쟁(Fighting Violence against Women)
뉴질랜드는 선진국 중에서 가장 높은 배우자에 의한 폭력이 신고되는 나라이고 1/4이 넘는 여성이 일생 동안 가정폭력 그리고/혹은 성적 폭력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놀랍지 않게 이 문제는 여성 운동 초기부터 어젠다로 취급되었다.
참정권론자들 시대에 뉴질랜드 여성들에게 가정폭력은 넓게 퍼진 경험이었다. 많은 남성들의 과음이 가정을 안전하지 않은 장소로 만드는데 기여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더 안좋은 것은 이 당시에는 여성이 이혼 소송을 제기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참정권론자들은 투표권을 획득하면 음주를 금지하는 법률안에 대한 국민투표에 참여해서 음주를 불법화하면 결과적으로 여성들에 대한 폭력이 줄어들 것이라고 희망했다. 이런 이유로 참정권 운동은 금주 운동과 긴밀히 협조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여전히 심각했음에도 정책 입안자들에게는 주 관심사가 되지 못했다. 1970년대 제2물결 운동이 일어날 때에도 관계 당국은 가정폭력은 사적 문제이므로 경찰이나 법안을 통한 국가개입이 필요하지도 정당화될 수도 없다고 보았다. 이에 대응하여 제2물결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적 정부의 개입을 기다리기보다는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풀뿌리 지지를 제공했다. 1973년에 그들은 크라이스트처치에 최초의 여성피난처를 설립했으며 강간피해자 지원서비스를 시작했고 그들의 이슈를 가지고 길거리에 나섰다. “Take Back the Night(그 날밤을 떠 올려라)” 행진 - 지금도 계속된다 - 은 여성이 폭력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대중들에게 매년 상기시켜주고 있다.
1970년대 여성에 대한 폭력에 대처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전략에 관련해서 에스닉 그룹 간의 차이는 중요했다. 여성의 권한 부여를 마오리 자주권과 폭넓은 마오리 공동체(남자 포함)와 연계시키는 집단주의적 마오리 접근 방식에 비해 파케하의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는 여성을 그들의 이해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져야 하는 개인으로 파악했다. 따라서 파케하 페미니스트의 폭력 희생자에 대한 전략은 희생자 개인들에 대한 지원에 초점이 맞추어진 반면 마오리접근 방식은 폭력이 발생한 가정과 공동체의 필요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이 전략적 엇박자는 종종 협업을 방해했고 페미니스트간 마찰(또한 레즈비안과 스트레이트 페미니스트 간 혹은 사회주의와 리버럴 페미니스트 간에도)은 점차 커져갔다. 이 마찰은 1978년 Piha에서 열린 Women’s Liberation Conference에서 극에 달하면서 제2물결 운동의 풀뿌리 기초를 심각하게 손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로 법의 개정을 통해서 폭력 희생자들을 위한 중요한 페미니스트 업적들이 그 뒤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1982년 가정보호법은 경찰이 가정 내 분쟁에 개입할 것을 요구했고 1985년 범죄법은 결혼 관계에서도 강간이 처벌가능한 범죄임을 인정했다. 1995년의 가정폭력법은 보호 명령을 제도화한 또 다른 중요한 성공이었다; 가정폭력의 법적 정의에 심리적, 성적 그리고 물리적 폭력을 폭넓게 수용하게 하였고; 누구나(동거인과 보호자 포함)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입법에 대한 초점은 풀뿌리로부터 공식화된 정치로라는 여성 운동 방향 전환의 결과였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여성부에 합류했고 다른 운동가들은 지방 정부, 노조 그리고 시민 사회단체에 합류함으로써 정책변화를 위한 로비활동에 나섰다.
1980년대의 신자유주의 방향에 있어 변화는 또 페미니스트 전략에 영향을 미쳤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줄이기 위한 단체들의 활동 - 신자유주의의 우선 고려 사항이 아니다 - 은 재정 지원을 확보하기가 갈수록 어려웠다. 최소한의 재정지원이라도 받기 위해서 많은 여성 조직들이 비공식적 조직 방식을 버리고 대신 정부와의 계약을 기대할 수 있는 서비스 제공 - 피난처 혹은 법률 자문같은 - 에 힘을 쏟게 된다. 1990년대 초에 여성 난민들은 자체적으로 National Collective of Independent Women’s Refugees 를 결성했다. 그러나 도움이 필요한 여성과 어린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들의 능력은 재정적 수단에 크게 제약받게 된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 미디어를 장식한 경찰들에 의해 자행된 성폭력 - 가장 유명하게는 Louise Nicholas 사건 - 은 성폭력 희생자들이 관계 당국으로부터 도움을 요청할 때 직면하는 어려움에 대해 대중들의 토론에 불을 붙였다. 이 사건은 제3물결 페미니즘에 또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다. 서브컬처 - Riot Grrrl 혹은 Girl Power 같은 - 는 미국과 영국의 제3물결에 부채질을 했다. 초기에 제3물결은 자신들의 엄마 세대와 차별화된 자신들만의 페미니즘을 창조하고 싶다는 주로 젊은 여성들의 바람을 반영하였다. 이 새로운 물결의 많은 정치적 관심 사항은 제2물결의 요구사항(예를 들어 성적폭력과의 전쟁 그리고 정치적 지도력에 있어 남성 지배의 종식)과 유사했으나 접근방식은 달랐다. 제3물결 페미니즘은 포스트구조주의의 페미니스트 이론에 영향을 받았는데 이 이론에 따르면 성적 정체성은 서로 별개의 이분법적 카테고리로 볼 것이 아니라 유동적 연속체(fluid spectrum)로 봐야 한다. 이 이론에 따른 제3물결의 가부장제에 대한 이해는 단지 여성만 사회적 권력과 자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자, 성전환자, 간성(intersex) 그리고 사람들과 일치하지 않는 성(gender)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이런 권력과 자원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제3물결의 행사와 정치적 주장은 여성만 배타적으로 다루는 경우는 거의 없다.
뉴질랜드의 제3물결은 다른 나라에 비해 출발이 늦었지만 1990년대 후반 시작된 이후부터 여성에 대한 폭력은 여전히 페미니스트 이슈의 핵심으로 존재했다. 예를 들어 제3물결 페미니스트들은 ‘강간문화’에 집중적으로 초점을 맞추었다. 강간문화는 성적 폭력을 가볍게 여기고, 변명하고 용서하면서 가해자보다 희생자를 비난하는 경향을 가진 사회를 말한다. 예를 들어 ‘그녀가 원했어요’는 이 강간문화에서 가장 흔한 진술 중 하나이다. 이 문화에 항의하기 위해 2011년부터 2013년까지 뉴질랜드 여러 도시에서 페미니스트들이 SlutWalk 행진에 참여했다. 또 2013년에 다른 행진과 온라인을 통한 행동주의를 야기시킨 ‘Roast Buster’ 사건은 경찰과 경찰 관련 당국이 다시 한번 젊은 여성의 성적폭력 신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강간 문화의 실상을 우울하게 보여주는 예였다.
그러나 SlutWalk같은 몇 제3물결 행사들은 강간문화의 경험에 있어 에스닉 차이를 무시했다는 페미니스트 공동체 자체 내 비판을 받았다. 마오리와 퍼시피카 여성 폭력 희생자들은 그들의 피해사실에 대한 인정을 받고 회복을 위한 도움을 받는데 있어 파케하 여성 피해자와는 다른 장애물에 부딪혔다. 아시안 피해 여성들도 활동가 블로그 Mellow Yellow에 묘사된 것처럼 같은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 페미니스트의 막내 세대 역시 그 전 세대가 그런 했던 것처럼 여성의 다양성이란 도전과 계속 씨름하고 있다. 여성운동이란 환경 속에서 이 도전을 해결하기 위해 현대 페미니스트들은 종종 교차성 이론 (intersectionality theory) - 다른 형식의 차별들(가령 성차별, 인종차별 그리고 동성애 혐오)은 특정 상황에 맞는 방식으로 상호 교류를 하기 때문에 분리된 원동력(dynamics)으로 생각될 수 없다는 이론 - 을 이용한다.
페미니즘은 단지 여성들만을 위한 것인가? (Is Feminism Just For Women?)
참정권론자들에게는 자신들이 의회에 법안을 제출할 수 없었기 때문의 남성 동료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이 같은 남성에 대한 개방성은 1970년대에 약해졌는데 여성 페미니스트들이 가부장적 사회 내에서 남자에 의해 지배받지 않는 작지만 정말로 필요했던 보금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여성만의 (women-only)’ 공간을 의식적으로 창출했기 때문이다. 폭력의 희생 경험이 있는 많은 여성들게 남성의 배제는 그들의 안전감을 증가시켰으며 어떤 경우에는 온전한, 종종 레즈비언, 분리 공동체 - 크라이스트처치의 Piccadilly St 같은 - 가 등장했다.
양성간 정의 혹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반대하기 위해서는 여성일 필요는 없다. 캐나다 남성그룹에 의해 여성에 대한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한 국제적 운동의 일환으로 1991년 시작된 White Ribbon 프로젝트가 2004년 뉴질랜드에 소개되었다. 이 캠페인의 주장은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폭력의 가해자는 대부분이 남성이므로 이 행동을 멈춰야 할 사람은 남성이고 또 남성들은 다른 남성들로부터 조언을 듣고 따를 가능성 높다는 것이다. 나아가 비록 그 숫자가 여성만큼 많지는 않지만 많은 남성 역시 특히 성적 폭력과 가정폭력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오늘날 몇 페미니스트 조직들은 남성들을 고용하고 같이 일을 한다. 여성만의 공간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1970년대처럼 흔하지는 않다.
위에서 언급한 제3물결의 성 정체성에 대한 이해에 따라 많은 현대 페미니스트 행사와 조직은 모든 성에 개방되어 있다. 또한 누가 여성만을 위한 공간에 입장할 수 있는가에 대한 기준의 변화도 최근 몇 년 사이에 있었다. 초기 생물학적 특성에 따른 남녀 구분은 특히 높은 폭력을 경험한 성전환 여성에 대한 차별로 많은 제3물결 페미니스트에 의해 비판받았었다. 따라서 Auckland Women’s Centre같은 여성만을 위한 공간도 여성으로 ‘자기정체성’을 밝힌 모든 사람들을 환영한다고 문구를 바꾸었다.
결론(Conclusion)
뉴질랜드 여성운동은 세번에 걸친 페미니즘의 3물결을 통해 여성을 위한 커다란 업적을 이루었다. 그러나 여성은 여전히 의회에서 충분한 숫자의 의원을 갖고 있지 못하고, 젊은 여성은 공식 정치로부터 멀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여성부는 지속적으로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과의 관련성을 입증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추가로 남성 폭력의 희생자 숫자는 여전히 높고, 피난처에 대한 재정지원은 늘 충분치 않았으며 관계 당국의 폭력 희생자에 대한 적절한 지원은 반복적으로 실패해 왔다. 여성에 대한 명백한 차별은 이제 법규상에서 찾아보기 힘들지 모르나 여성에 대한 교묘한 차별은 존재한다 - 폭력이나 정치적 참여를 떠나서. 예를 들어, 뉴질랜드 여성은 자신의 신체에 대해 완전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예, 안전하고 합법적인 낙태); 노동시장에서의 유리천장; 자녀 양육과 노인 부양을 위한 대부분의 무급 가사노동. 여성들의 다양성을 고려할 때 페미니스트들의 투쟁은 아마 내부 갈등에 의해 괴롭힘을 당할 것이다. 허지만 이런 것들이 양성간 정의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는 사실로부터 우리의 시선을 분산시킬 수도 시켜서도 안된다; 우리는 뉴질랜드에 여전히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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