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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의 자본주의는 어떻게 형성이 되었는가?
책 ‘A land of milk & honey’에 대한 요약 및 독후감 시리즈: 약속의 땅에서의 약탈 편
많은 사람이 뉴질랜드는 국가의 성립 과정에서 다른 정착민 사회 국가들 - 미국이나 호주 등 - 과 달리 유러피안 정착민과 원주민인 마오리 간 폭력적 충돌이 없었거나 상대적으로 매우 적어 John Key (전 국민당 정부 수상) 말마따나 평화적으로 정착이 이루어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로 생각될지 모른다. 유러피안 정착민이 도착하기 전 인구가 천만 명을 웃돌던 북미 원주민(Indians)은 유러피안 정착민의 이주 탓에 1900년에 불과 30만 명 밖에 남지 않았고 유러피안 정착민의 이주가 시작되던 1788년 이전에 25만 명을 웃돌던 호주 원주민(Aborigines)들의 숫자가 1920년에 6만 명 이하로 떨어졌다는 역사적 사실은 이 과정에 정착민들이 들여와 전파시킨 유럽의 질병과 더불어 원주민에 대한 대량 학살이 있었음을 능히 짐작게 한다. 이런 명백한 식민자들의 폭력 행사와 비교해서 많은 이들은 ‘뉴질랜드는 그 정도는 아니지 않지 않나?’라고 생각하며 John Key의 인식에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기본적으로 궤를 같이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뉴질랜드도 위 정착민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유러피안들이 들여온 질병과 그들이 식민화 과정에서 행사한 폭력으로 선장 James Cook이 방문했던 1769년 10만 명이었던 마오리 인구는 유러피안 정착 이후 1896년 42,000명까지 떨어졌다. 반면 같은 해 실시된 센서스에 의하면 정착민의 숫자는 70만 명이 넘게 된다. 그러나 유러피안에 의한 Aoteroa의 식민화 과정의 가장 큰 문제는 어쩌면 역사적 비극 중 하나로 여겨질 수 있는 이 질병과 학살의 과거가 아니라 21세기 현재 New Zealand의 사회적 경제적 기본 구조가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즉 경제적으로 현재에도 뉴질랜드의 가장 큰 수출 품목인 낙농제품과 고기를 생산하는 뉴질랜드 농축산 자본주의의 기본 틀과 사회적으로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마오리 주변부화의 구조적 틀이 이때 완성이 된다.
마오리 인구가 역사상 가장 최저로 떨어진 이 시점에 뉴질랜드 자본주의의 등뼈(backbone)인 축산업의 기반을 파케하 정착민들은 어떻게 마련할 수 있었을까? 바로 축산업의 필수 불가결의 요소인 ‘땅’을 이 기간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정착민들은 무주공산의 땅을 점유하고 개간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마오리가 부족(iwi) 혹은 씨족(hapu)의 집단 형식으로 소유하고 있던 땅을 강제적으로 뺏거나 기만적으로 구매하는 방식을 통해 마오리들의 땅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1840년의 와이탕이 조약에 의해 마오리 땅에 대한 독점적 구매 권한을 가진 식민 정부는 파케하 정착민으로부터 땅을 소유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압력을 지속해서 받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1860년 Taranaki의 한 부족장이 땅을 팔겠다고 했다가 부족 내부 반대에 부딪히자 식민 정부는 이를 빌미로 전쟁을 일으켜 제한적 승리를 거두게 된다. 승리의 전리품은 바로 반란군으로 낙인찍힌 전쟁에 참여한 부족들(심지어 참여하지 않은 부족도 포함됨) 땅의 ‘몰수’였다. 몰수는 말 그대로 매매가 아닌 탓에 이 마오리 부족들은 반란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3백만 에이커가 넘는 땅을 아무런 대가 없이 뺏겼고 이 땅은 식민 정부를 거쳐 파케하 정착민에게 매각된다. 이 시기, 몰수에 의한 마오리 토지 수용이 폭력적이었다면 그 후 이어지는 마오리 땅의 소유권을 가져오기 위한 식민 정부의 전략은 아직 부족 공동체 사회를 살던 마오리의 치명적 급소를 제대로 때린 매우 치밀한 것이었다.

파케하 정착민들 혹은 식민 정부가 마오리 땅을 사들이는데 가장 큰 어려움이 마오리 땅이 부족 혹은 씨족이라는 공동체의 소유이기 때문에 이들 부족 혹은 씨족들은 구성원의 만장일치가 아니면 땅을 팔지 못한다는 것을 간파한 식민 정부는 이 전통적으로 내려온 마오리의 공동소유 개념과 시스템을 파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 1865년에 원주민 토지 법원 (The Native Land Court)을 설립해서 마오리 토지의 부족 공동명의를 개인 명의로 전환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예를 들어, 부족 명의의 토지를 부족원 중 대표 혹은 피신탁인에 해당하는 10명의 개인 명의로 이전하는 형식이다.
문제는 부족의 이해관계를 대표해야 할 이들 피신탁인들이 실제로는 부족의 동의 없이 직권으로 땅을 매매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 노린 파케하 정착민들은 이들을 각종 기만술수를 동원해 이들로 하여금 땅을 팔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 가령 이들이 상환능력이 없음을 알면서도 이들로 하여금 사채를 빌려 쓰게 한 후 상환 만기일이 도래해도 여전히 빚을 갚지 못하는 상황 - 으로 몰고 가 결국 땅을 구매한다. 그 결과 1861년과 1891년 사이에 1/6의 몰수를 포함해서 북섬 마오리 소유 땅은 2천2백만 에이커로부터 1천1백만 에이커 혹은 80%로부터 40%로 줄어들었다.
이 과정은 마오리에겐 이중으로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하나는 물론 땅이 더는 자기 것이 아니라는 현실이고 다른 하나는 이 소유권의 상실 과정이 이전처럼 본의 아닌 식민정부의 무력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의 선택으로 이 소유권을 넘겼다는 사실이다. 즉 파케하 정착민들의 회유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이들이 친 덫에 걸려 조상 대대로 내려온 부족의 땅을 자신이 팔아버렸다는 자책감 그리고 자괴감이 이들을 지배하였을 것이다.
이 원주민 토지 법원에 이어 식민 정부는 또 다른 카드를 준비한다. 1891년 집권하여 여성참정권 허용 및 노후 연금제 도입 등으로 칭송을 듣는 당시 Liberal 정부는 원주민 토지법 (Native Lands Act of 1892)을 제정해 마오리 토지의 매입을 신속하게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결과 310만 에이커의 땅이 마오리로부터 파케하로 넘어오게 된다. 첫 번째 단계의 무력(전쟁)을 통한 마오리 땅의 몰수와, 두번째 단계의 원주민 토지 법원을 통한 마오리 땅의 기만적 구매는 세번 째 단계인 원주민 토지법을 통한 마오리 땅의 매입으로 완성되었다. 그 결과 19세기 말에 마오리는 1840년 이전 자신들이 소유하던 땅의 15%만 소유하고 나머지 85%는 파케하가 소유하게 된다.
이 19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마오리 땅의 체계적 박탈과 그 소유권의 파케하 정착민으로의 이전은 이 토지의 대대적 목초지 전환으로 이어지면서 뉴질랜드의 농축산 자본주의의 틀을 마련한다. 이후 토지라는 캐피탈(capital)을 획득한 파케하와 그 후손은 자본가 지위를 현재까지 만끽하는 반면 아무런 캐피탈도 남겨진 것이 없는 대다수 마오리와 그 후손은 자신의 노동 외에는 팔 것이 없는 사회 하층부 무산계급 노동자 지위로 전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19세기 후반 영국 식민정부의 마오리 땅에 대한 체계적 소유권 박탈과 그에 이어지는 파케하 정착민들의 토지 획득이라는 ‘자본의 원시적 축적’ 과정은 오늘날 뉴질랜드 자본주의 틀을 마련함과 동시에 마오리에 대한 구조적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의 근본적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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