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역사, 인간 그리고 뉴질랜드

뉴질랜드 이야기

다른 인종(에스닉 그룹)간 결혼 역사: 뉴질랜드

김 무인 2020. 2. 26.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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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다른 인종(에스닉 그룹)간 결혼 역사



머리말 

 

당분간 다른 인종 간 결혼(intermarriage)에 관해 공부하고자 한다. 교민들의 자녀가 실제로 다른 에스닉 그룹의 배우자와 결혼을 하는 사례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목도를 하면서 한인 교민에게 다른 인종 혹은 에스닉 그룹과의 결혼이 차지하는 의미와 뉴질랜드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다른 인종 간 혹은 다른 에스닉 그룹 간 결혼의 사회적 역사적 의미를 좀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 

 

뉴질랜드 이족결혼(exogamy 혹은 intermarriage)의 역사를 간단히 정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정리는 뉴질랜드 정부 부서 Manatu Taonga Ministry for Culture and Heritage에서 운영하는 뉴질랜드 소개 웹사이트 Te Ara – The Encyclopedia of New Zealand 의 Intermarriage편(https://teara.govt.nz/en/intermarriage)을 번역하는 것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여담으로 Te Ara는 뉴질랜드 정부판 Wikipedia 정도로 이해하면 적당하지 싶다. 학문적으로 보았을 때 그렇게 깊이 있고 체계적이지 않은 대신 일화(anecdote)식의 스토리가 많고 매우 간략하다. 그만큼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용어정리

 

다른 글에서도 적합한 한국 용어 찾기의 어려움을 몇 차례 토로한 적이 있는데 이 주제 역시 처음부터 어려움을 겪는다. 다른 인종 간 결혼(interracial marriage)이나 다른 에스닉 그룹 간 결혼(interethnic marriage) 모두 이족결혼(exogamy)의 한 종류인데 인종 간 결혼은 생물학적 이족결혼(biological exogamy)에 해당하고 다른 에스닉 그룹 간 결혼은 문화적 이족결혼(cultural exogamy)에 해당된다. 하지만 이족결혼 개념은 규범적(normative) 개념이 강하다. 가령 근친상간(incest)이 유전자의 열성화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유전자 그룹과의 혼인을 장려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소속 집단의 사회적 관습 측면에 영향을 받는다는 측면에서 현대의 개인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다른 인종 간 혹은 에스닉 그룹 간 결혼과는 의미를 달리한다. 그리고 이족결혼이라는 용어를 부득이 사용하지만 적합한 용어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구심이 든다. 

 

인종(race)과 에스닉 그룹(ethnic group)은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반드시 구분되어야 하는 개념이다. 결혼과 관련하여 예를 들자면 한국 남자와 미국 백인 여자의 결혼은 다른 인종 간 결혼이자 다른 에스닉 그룹 간의 결혼이다. 다시 말하면 황인종이며 한국 문화를 가진 남자와 백인종이며 유럽 문화를 가진 여자와의 만남이다. 반면 한국 남자와 일본 여자의 결혼은 다른 에스닉 그룹 간의 결혼이지만 다른 인종 간의 결혼은 아니다. 한국문화를 가진 남자와 일본 문화를 가진 여자의 만남이지만 인종적으로 같은 황인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장 포괄적으로 쓰일 수 있는 개념은 서로 다른 에스닉 그룹 간 결혼이겠지만 부부라는 두 인격체의 모임이라는 특징 탓에 부부의 에스닉 차이보다는 인종적 차이가 훨씬 도드라지게 보이게 마련이다. 가령 같은 나라, 같은 문화권에서 태어나 성장을 했다 하더라도  백인과 흑인의 결혼은 이들의 문화적 공통점에도 인종적 차이 때문에 이족결혼(exogamy)의 범주에 여전히 들어가는 식이다.



초기 이족결혼(Early intermarriage)

 

유러피안 정착 초기 파케하와 마오리의 결혼은 ‘마오리를 문명화하는’ 수단으로 권장되었다.

 

부족사회

 

이족결혼(intermarriage)은 통상 다른 인종(races), 언어 혹은 ethnicities의 파트너들 간의 관계로 정의된다. 또 만약 서로 다른 부족(tribes) 구성원 간의 결혼 역시 이족결혼으로 정의될 수 있다면 유럽인들 정착 이전의 마오리 생활에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중요한 부분이다. 결혼은 마오리 부족사회에서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기능을 차지했었으며 약혼을 뒤집거나 정치적 갈등을 일으키거나 혹은 잘 균형 잡힌 관계를 뒤집을 수 있는 어떤 행동도 좋지 않게 받아들여졌다. 마오리 고위 가족들 간에서 부족 간 결혼은 정치적 동맹을 강화하고 평화협정과 자원을 통합하는 데 이용되었다. 

 

 

유럽인과의 최초 조우

 

마오리와 비 마오리 간의 관계 형성은 이들 두 그룹 간의 초기 접촉부터 활발했었다. 방문 선박의 선원들은 통상 마오리의 관습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현지 마오리 여성과 교제(liaison)를 나누었다. 선원들은 보통 옷들과 다른 물품들을 선물로 제공하면서 현지 공동체의 감독하에 미혼 여성들과 관계를 맺는 것으로 제한되었다. 후일 선교사들은 이런 관계를 비록 일부는 ‘일시적 결혼’의 형태를 갖추었을지 몰라도 매춘이라고 묘사했다. 선원들과 마오리 여성 간의 관계는 종종 열정적이어서 때로 일부 선원은 배우자를 찾아 배를 버리고 탈주할 정도였다.

 

 

파케하-마오리

 

1890년대부터 뉴질랜드에서는 배에서 내려 아예 마오리와 함께 살기 시작한 남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파케하-마오리라 불렸는데 이들은 이들이 유럽인의 지식과 기술을 제공하고 중재자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기에 마오리 공동체에서 환영받았었다. 이들의 뉴질랜드 생활에서 이족결혼, 종종 부족장의 딸과, 은 그들에게 보호막을 제공하기에 일상적인 방편이 되었다.

 

 

포경선원과 무역상

 

이족결혼은 무역시대에 필요한 부분이었는데 새 정착민들에게 정치적,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생존을 보장했기 때문이다. 마오리로서 유럽인과의 결혼은 다른 부족과의 결혼보다 덜 위험했다. 왜냐하면, 포경선원 혹은 무역상과의 결혼은 부족의 새로운 구성원이 늘어나는 한편 땅과 자녀가 여전히 부족 소속으로 남기 때문이었다. 결혼은 포경선원 혹은 무역상에게 역할,기대 그리고 의무를 안겼다. 그들은 명예를 지켜야 하고, 친절해야 하며 고위직 혹은 부족장 가족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며 공동체에 부와 특혜를 가져다줄 것을 기대받았다.

 

 

최초 공식 결혼

 

Ngapuhi 부족 출신의 Maria Ringa와 덴마크 출신 포경선원이자 무역상인 Philip Tapsell이 1823년 선교사 Thomass Kendall의 주관하에 결혼했는데 이는 공식적으로 뉴질랜드에서 정착민과 마오리 간의 최초 공식 결혼이었다.  그러나 이 결혼은 신부가 결혼날 사라지면서 채 하루가 가지 않았다. 신랑은 그 후 부족장 가문의 두 여성과 연이어 결혼한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서로 다른 인종 간 결혼은 항상 안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포경과 무역시대에 이루어진 결혼은 교회법에 따라 강제되었든 마오리의 관습법에 따라 강제되었든지 간에 대부분 일부일처제였고 지속적이었다.

 

 

식민사회의 이족결혼(Intermarriage in colonial society)

 

선교사 반응들

 

초기 선교사들은 마오리와 유러피안들 간의 결혼에 대해 항상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특히 목사 Henry Williams는 여성이 세례를 받지 않았다면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다. 파케하와 마오리의 최초 결혼이었던 1823년 Phillip Tapsell and Maria Ringa 의 결혼을 반대했던 목사 Samuel Marsden은 Tapsell의 세 번째 마오리 여성과의 결혼을 주관했는데 그는 이후 이에 대해 ‘뉴질랜드에서 더욱 기독교적 관습과 방식들이 성행한다면 원주민들이 더 문명화될 것이며 합법적 결혼이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문명화된’ 삶의 권장

 

Marsden의 결혼이 마오리의 삶을 ‘문명화’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시각을 식민관료들도 이후 받아들이게 된다. 이에 따라 파케하와 마오리 간 법적 결혼을 장려하기 위해 1860년에  Half-Caste Disability Removal Act가 통과된다. 이 법의 통과로 1860년 이전에 파케하와 마오리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그들 부모가 정식 결혼을 했다면 아무런 법적 장애를 받지 않게 된다. 이 법률은 또한 파케하와의 결혼에 따라 마오리 여성은 땅의 소유권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토지 취득

 

전통적으로 마오리 여성은 그들의 부모로부터 토지를 물려받았다. 이런 이유로 파케하들에게는 마오리 소유주들이 팔기를 원하지 않는 땅을 취득할 수 있다는 희망하에 마오리 여성과의 결혼을 바라게 된다. 이 파케하 남성 중에는 토지 소유권을 획득하자마자 자신의 아내를 버리는 자도 있었다.  거주 치안판사이자 정부 토지관리인인 Gilbert Mair는 그의 아내 Anagera Patara를 통해 Whakatane 근처의 Ohope의 자연 보존구역의 소유주가 되었는데 이후 그는 그 땅을 팔았다. 

 

 

변화하는 이족결혼 패턴

 

1840년대 이후 마오리 여성과 정착민들은 계속 동거하고 성적 접촉을 하면서 마오리 관습하에 결혼하였다. 일부 커플은 영국법하에 결혼하기도 했다.

 

체계적 식민화는 이족결혼 방식에 몇 가지 변화를 가져왔다. 더 많은 파케하 여성들이 도착하면서 결혼대상자로 등장하게 되자 일부 파케하 남성들은 사회적 지위와 식민사회의 진입을 추구하기 위해 마오리 아내와 자녀들을 팽개치었다. 정착민과 ‘혼혈(half-caste)’ 여성 간의 결혼이 발생하기 시작했으며 몇 이족결혼 부부가 뉴질랜드에 이민을 오기도 했다. 비록 적은 숫자이지만 파케하 여성이 마오리 남성과 결혼하기 시작했다. 파케하 여성이 마오리 남성을 원할지 모른다는 생각은 보편적인 생각이 아니며 조롱과 분노를 유발했다. 

 

1877년 Tuapeka Times는 이전에 흔하던 유러피안과 마오리 간 결혼이 지난 10,20년 사이 더는 흔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보도한다; 사실 이는 Hobson의 결정이었다. 유러피안 여성들보다 유러피안 남성들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을 때  초기 정착민들은 검은 피부의 원주민 여성과 결혼을 하거나 총각으로 남아야 했었다. 이 시기, 이족결혼은 사회의 모든 계층에서 이루어졌는데 많은 정착민이 도착하면서 줄어들었다.

 

 

마오리 동화

 

1870년대부터 센서스 관리들은 이족결혼과 성공적 동화는 궤를 같이한다고 주장했다. 마오리는 ‘죽어가는 인종(dying race)’이고 비 마오리와의 생물학적 동화는 그들의 운명으로 여겼다. 

 

심지어 20세기 초 저명한 마오리 지도자들, 가령 Sir Maui Pomare, 은 이족결혼이 마오리 생존의 길을 열어주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지도자들은 이족결혼이 마오리의 흡수와 최종적으로 소멸에 이르게 할 것이라는 관료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Te Rangi Hīroa (Sir Peter Buck)  는 ‘미래 뉴질랜더의 특징에서 마오리 인종의 가장 뛰어난 특징들은 영속할 것이다’라고 예측했다. 마오리-파케하 간 결혼은 관대하게 받아들여졌으며 20세기에 접어들며서  동화를 향한 강력한 힘과 인종적 조화의 표시로 축하받기까지 했다. 

 

 

아시안과 달마티안(Dalmatian)과의 이족결혼

 

반아시안 편견

 

마오리와 유러피안 간 이족결혼은 폭넓게 수용되었지만 19세기 말 과학자들은 이족결혼은 각 ‘인종’의 최악의 특질을 물려받은 ‘잡종(hybrids)’ 인종을 창조할 것이라는 이론을 만들었다. 특히 ‘아시안(Asiatics:Chinese)’과 백인 여성과의 결혼이 가장 우려 대상이었다. 중국인과 인디언은 둘 다 ‘외계 인종(race aliens)’으로 알려졌다. 그들은 동화할 의지가 없으며, 궁핍한 생활 방식으로 저임금도 마다치 않으며 특히 파케하와 마오리 남성의 아내와 딸들을 탐내는 이상한 관습과 비도덕적 습관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됐다.

 

 

아시안의 이족결혼

 

20세기 중반까지 뉴질랜드의 중국인과 인디언은 대부분이 남성인 ‘총각사회(bachelor societies)’였다. 애초 그들은 영구 정착민이 될 의향을 가지고 도착하지 않았는데 1881년 이민 정책의 강화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것 혹은 가족들을 뉴질랜드에 데려오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따라서 아시안 이민자들은 같은 에스닉 그룹의 여성을 만나 결혼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결국, 많은 아시안 남성들은 파케하 혹은 마오리 여성과 결혼하였다. 중국 남성과 결혼하는 여성은 ‘중국인 자체보다 더 나쁘고 불쾌한(vile) 것 중에 가장 불쾌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1886년 크라이스트처치의 한 주민은 ‘중국인 남성은 백인 여성을 몹시 탐내고 간혹 결혼을 하기도 한다'고 하면서 뜻밖에 '중국인 남성은 매우 친절하고 다정다감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덧붙였다.

 

 

마오리와 원예농업(market gardeners)

 

많은 중국인은 금광에 일하기 위해 뉴질랜드에 왔다. 금 채광 업이 쇠퇴하면서 일부는 주요 도시 주변의 원예농업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까지 많은 사람이 아시안 소유의 원예농장에서 일하는 마오리 여성의 안부를 걱정함에 따라 원주민 장관 Apirana Ngata는 이 이슈에 대해 조사위원회를 발족하기에 이른다. 이 조사 결과 3쌍의 마오리 여성과 중국 남성 간 ‘합법적 결혼’과 밝혀지지 않은 수의 사실혼 관계가 드러났다. 조사위원회는 이어 ‘마오리,중국인 그리고 인디안 같은 열성 인종들 간의 무차별적 교류는 잡종 인종의 탄생으로  단순히 마오리 인종의 가족과 국가적 삶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전반적 삶을 필연적으로 악화시킬 것이다’라고 보고한다. 그러나 한편 이 위원회는 마오리 여성은 임금을 더 주기 때문에 백인 고용주보다 중국 혹은 인디안 고용주 밑에서 일하는 것을 선호하는 것도 밝혔다.

 

 

달마티안(Dalmatian)의 이족결혼

 

19세기 후반 또 다른 독특한 소수민족은 Far North의 달마티안 고무채취 인부들(gum diggers)이었다. 초기 중국인과 인디언처럼 이들 달마티아(현재 Croatia의 일부) 출신 이민자들도 압도적으로 남성이었으며 특히 마오리 같은 현지 여성과의 결혼이 보편화하였다. 달마티안 고무채취 인부와 마오리 여성 간 결혼이 공식적으로 기록된 것은 1891년이었다. 마오리 여성과 결혼한 고무채취 인부 중 한 명인 Lovro Petricevich는  마오리어에 능숙했으며 그가 죽었을 때 현지 관습에 따라 그의 아내 marae에 묻혔다. 그의 딸 Dame Miraka Szaszy는 오클랜드 대학을 처음으로 졸업한 마오리 여성이었다.

 

달마티안과 마오리 커플의 후예들은 그들의 혼합된 문화적 언어적 유산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2010년 3월 오클랜드 서부에서 열린 11번째 Tarara Day는 Te Waipareira marae와 크로아시아 문화 사회(Croatian Cultural Society) 공동 주관으로 개최되었다. ‘Tarara’는 달마티안 후손들을 가리키는 마오리 용어이다. 

 

 

 

20세기 이족결혼

 

마오리의 도시 이주

 

마오리의 도시로의 이주는 20세기 초부터 시작되어 1960년대까지 이어진다. 이 때문에 마오리는 비 마오리 인구와의 접촉이 매우 증가한다. 당시 정부관료는 ‘잡혼(miscegenation) (인종 간 결혼을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용어) 비율을 동화와 융화 정책 성공의 정확한 척도로 보았다. 1936년 센서스 리포트에 의하면 ‘잡혼은 빠른 속도로 증가했는데 몇 세대 안에 유러피안과 마오리 인구 간의 구분은 현저하게 약화할 것이 자명하다’라고 밝힌 바 있다. 1968년의 에스닉 이족결혼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1890년부터 1960년까지 마오리들 ‘outmarriage(다른 인종과의 결혼)’의 현저한 증가가 있었다.

 

 

이족결혼에 대한 반대

 

뉴질랜드 사회의 일부는 이족결혼에 대해 반대했다. 1880년부터 1930년대까지 오클랜드에서 랍비(유대교에서 말하는 현인:역주)로 활동했던 Samuel Goldstein은 그의 신도가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으며 비유대인과 결혼을 하면 그 신도를 예배당에서 추방했다. 그의 후계자 랍비인 Astor는 뉴질랜드의 작은 유태인 공동체를 약화시킬 것이라는 이유로 동화와 이족결혼에 반대하는 태도를 취했다.

 

1990년에 뉴질랜드 중국 역사가 Bickleen Fong은 ‘나는 내 자녀가 중국인과 결혼하기를 선호합니다… 결혼에서, 가족 간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같은 인종 혹은 같은 문화적 계급의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에게 중국인과 결혼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이건 피부색 혹은 인종적 차이가 아니라 문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2000년대 이족결혼

 

1950년대부터 유럽과 남태평양 군도로부터 새로운 이민자가 뉴질랜드에 정착하고 뒤를 이어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아시안 이민자가 들어오게 된다. 그들의 관계 형태는 뉴질랜드의 갈수록 다문화하는 특징을 반영한다. 이들의 이족결혼을 통해 탄생한 자녀는 더욱 이족결혼할 가능성이 크다.

 

이족결혼의 결과, 혼합된 ethnicity의 인구가 많아지면서 이들과 결혼할 확률은 갈수록 높아진다. 이족결혼을 통해 탄생한 자녀는 자신들이 어느 에스닉 그룹에 속할지를 결정할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파케하 아버지와 마오리 엄마를 둔  Sir Tipene O’Regan은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두 문화가 나의 문화적 잠재력을 배로 증가시킨다는 것을 배웠다. 혼혈이라는 것은 나의 정체성 감각을 배로 증가시키는 것이지 반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