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역사, 인간 그리고 뉴질랜드

세상 이야기

이번은 바꿀 수 있다 - 코로나바이러스 시리즈 7

김 무인 2020. 4. 2.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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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머리말

코로나바이러스 위기가 장기화함과 동시에 하루하루 상황이 변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시사적 상황에 대한 접근은 다른 미디어에 맡기고 이 블로그에서는 나의 관심사인 이 위기에 대한 역사적 사회적 의미에 대해 집중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사태의 진전을 보고 있노라면 꼰대 질이 되었든 조언이 되었든지 간에 참견하고 싶은 마음에 역자 머리말 지면을 빌려 현재 진행 상황에 대해 내 생각을 개진한다.

 

마스크 문제다. 3월 31일 자 온라인 미디어 newstuff 의 뉴스 (https://www.stuff.co.nz/national/health/coronavirus/120682536/coronavirus-should-you-be-wiping-down-your-packages-post-and-groceries)에서 Otago 대학 미생물 및 면역학 선임 강사(senior lecturer) James Ussher는 마스크가 이번 코로나 사태의 예방 관련 불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그에 의하면,  “오히려 장갑과 마스크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잘못된 확신을 심어줄 수 있고, 제대로 착용하거나 제거하지 않으면 감염 위험이 오히려 높아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마스크를 조정하기 위해 얼굴을 만지거나 마스크를 제거할 때 손을 씻지 않은 오염된 상태에서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뉴질랜드를 떠나 서구의 , 심지어 WHO를 포함, 그동안 지켜왔던 마스크에 대한 선입견을 그대로 보여주는 발언이다. 며칠 전 포스팅에서도 이런 서구의 마스크 선입견에 대해 의견을 피력한 바 있는데 뉴질랜드의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가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는 현 상황에서 소위 보건 분야 전문가 자격으로 미디어에 저런 인터뷰를 했다는 것에 분노에 가까운 감정이 든다.

 

당장 그의 의견에 반박할 의견을 제시한다. 4월 2일 자 CNN의 인터뷰에서  University of California의 미생물학 전문가 Adrien Burch는 서구의 마스크 논란에 대해 명확히 지적한다 ( https://edition.cnn.com/2020/04/01/asia/coronavirus-mask-messaging-intl-hnk/index.html ). "마스크가 ‘효과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여러분은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그럴듯한 증거를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왜냐면 그런 증거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 Otago 대학의 James Ussher는 정확히 Burch의 말처럼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 논리를 치명적 전염병의 위험에 노출된 자국민들에게 소위 전문가라라는 이름으로 아무런 임상 검증 자료없이 권고한 것이다.   

 

또 나의 주의를 끄는 부분은 이 주류 미디어에 올라온 기사를 교민사회 미디어가 그대로 아무런 여과 혹은 부연 코멘트 없이 내보냈다는 점이다 (https://www.nzkoreapost.com/bbs/board.php?bo_table=news_all&wr_id=34791). 위 기사를 읽은 교민 독자 중에도 ‘어? 이건 아닌데’ 라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다. 4월 2일 현재, 유럽 각국과 북미는 한 달여 전까지 고집했던 서구의 고질적 마스크 기피증에서 180도 태도를 전환하여 의료인들을 위한 마스크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을 위한 마스크 구입에 사활을 걸고 있는 현상이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서구는 코로나바이러스 발원지 중국으로  대표되는 아시안 국가들의 미개한 국민이 과학적 효과가 없음에도 Orientalism적 자기 위안을 위해 착용한다고 속으로 비웃었었다. 먼 과거 이야기가 아니다. 불과  며칠 전 이야기다. What an arrogant Occidentalism it was!!! 이런 부모 혹은 형제 나라가 지금 하루가 다르게 변했음에도 막내 백인 정착민 국가 뉴질랜드는 이미 사망선고가 내려진 마스크 무용론을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이 저토록 맹목적으로 붙잡고 있는 현실이다.

 

보건의료 지식 문외한인 본인이지만 현재 태도를 돌변한 서구의 언론을 포함해 가용한  정보에 의하면 마스크를 착용했을 때와 그렇지 않았을 때 바이러스 전염병 예방 효과에 정확히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한 계량적 임상시험 결과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유추할 수 있는 임상 결과는 있다. 그렇다면 나와 같은 일반인도 지난 몇 달간 마스크 착용이 국가 차원에서 권장되고 일반화된 아시안 국가들의  코로나바이러스 확산 세가 그렇지 않은 서구권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사실을 봤다. James Ussher는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을 때 마스크를 착용했을 때보다 감염 빈도가 낮아 더 많은 인간의 생명을 구한다는 임상 결과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입을 다물라. 당신의 침묵이 오히려 사람을 구하는 길이다. 당신의 충고 탓에 지금 어디에서 구할 수 있는 생명이 유명을 달리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길 바란다.  

 

토마토가 빨개지면 의사의 얼굴이 파래진다는 서양 격언이 있다. 전 국민의 마스크 착용으로 코로나바이러스의 감염이 축소됨으로써 의사들 그리고 제약업계의 상업적 이득이 줄어들까 봐 저런 발언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지금 바이러스 백신이 개발이 코 앞의 미래에 있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주장이 100%로 과학적 근거를 갖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수 많은 국가와 사람들에 의해 마스크 효과가 간접적으로 증명되는 이 시점에서 저런 주관적 아집에 가까운 발언을 한 것에 지극히 실망한다. 더 나아가 이런 발언을 기본적 필터링 혹은 논평 없이 올린 교민 미디어에도 실망을 표시한다. 다시 말하지만 서방 국가 중에서 막내 축에 속해 형님 북미/유럽 국가들이 변하기 전에는 변하지 않으려는 Occidental West 의 굼벵이 막내 국가, 뉴질랜드의 처량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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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글로벌 위기는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은 할 수 있다. (The last global crisis didn’t change the world. But this one could)

 

William Davies

The Guardian, Tue 24 Mar 2020 

 

 

 

스마트폰과 인터넷의 확산은 글로벌 대중을 탄생시켰다. 2020년 3월 19일 뉴델리 기차역 앞의 사람들.  

(출처: Jewel Samad/AFP via Getty Images)

 

단어 “위기(crisis)”는 결정 혹은 판단을 의미하는 그리스 단어 “krisis”에서 유래했다. 이 어원에서 우리는 또한 비평가 (critic)와 치명적 상황(critical condition)과 같은 파생어를 얻었다. 위기는 좋게 끝날 수도 나쁘게 끝날 수도 있지만, 핵심은 위기의 종말은 기본적으로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위기를 경험한다는 것은 일시적 가상 세계를 산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겪는 위기의 심각성은 언제 그리고 어떻게 이 위기가 끝날지 모른다는 절대적 불확실성에 기인한다. Imperial College의 시나리오 - 이 리포트(이전에 소개한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사망과 보건진료 수요를 줄이기 위한 비약품적 개입(NPIs)의 효과’(Impact of non-pharmaceutical interventions (NPIs) to reduce COVID19 mortality and healthcare demand):역자 주)의 예상 수치로 말미암아 (영국)정부는 상대적 느슨한 접근을 뒤늦게 바꾸었다 - 를 따르면 갈수록 강화되는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로부터 우리가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백신인데 문제는 내년 여름까지 상용화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이 긴 기간 동안 적용될 수 있는 종합 대책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고 더 나아가 그 정책들을 실행한다는 것은 더 상상하기 힘들다. 

 

이제 우리는 깊은 글로벌 경기 침체, 노동 시장의 붕괴 그리고 소비자들의 소비 증발 사태를 불가피하게 겪을 것이다. 2008년 가을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시작: 역자 주)에 정부의 행동을 촉진한 공포는 은행 시스템이 받쳐 주지 않는 한 돈이 더는 현금지급기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집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돈도 돌지 않으리라는 것이 명확해지고 있다. 소규모 비즈니스가 종업원들을 놀라운 속도로 해고하는 와중에 미국 아마존(Amazon)은 10만명의 직원을 (코로나바이러스 위기 기간) 추가 모집한다는 광고를 냈다. (아마존은 우리와 먼 세상에 있으며 끊임없이 성장하는 플랫폼의 거인 중 하나다)

 

1970년대는 광범위한 이데올로기 축의 이동을 통해 위기의 미래에 대해 영감을 제시함으로써 이후 대부분 좌파로부터 주도권을 빼앗았다. 이 위기는 크게는 자본주의 케인즈주의 모델의 내재적 모순(생산성 향상보다 빠른 임금 상승과 그로 말미암은 성장 저해)과 지배적 사업모델의 대대적 개편: 융통성없는 무거운 제조업에서 발 빠르게 소비자의 취향에  대응할 수 있는 유연한 상품 제조업으로의 전환. 

 

1970년 대에는 또 중요한 공간적 측면이 있다. 자본은 전통적으로 상징적인 거점이었던  영국 북부와 미국 중서부를 버리고 (국가의 도움으로) 매혹적인(slick) 도시, 가령 뉴욕과 런던, 의 금융 산업 지구로 향했다.

 

(영국에서) 대처(Thatcher)가 집권한 이후 지난 40여 년간, 많은 좌파는 이데올로기의 역전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 속에 1970년대의 후계자를 참을성 없이 기다렸다. 그러나 심각한 정치적 동요와 사회적 고통에서도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는 근본적 정책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데 실패했다. 실제로는 은행권을 구제하기 위한 공적자금의 투입 이후 대처식의 자유시장 세계관은 영국과 다른 유로지역에서 더욱 지배적이 되었다. 2016년의 정치적 동요(국민투표로 영국이 Brexit를 결정한 해:역자 주)는 현 상태(status quo)의 타파를 겨냥했지만, 그에 대한 대안은 없었다. 하지만 이 2008년의 금융위기와  2016년의 Brexit 위기는 지난해 말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진짜의 예고편에 불과했다.

 

이번 위기의 중심에는 이 위기가 불황(recession)이라고 보다는 전쟁(war)으로 느껴지기에 충분한 잔혹한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벌써 2020년 그리고 그 이후 여파가 1970년대의 위기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를 보고 있다. 첫째, 전염이 글로벌 자본주의의 경로 - 사업목적 여행, 관광 여행, 무역 - 를 따르지만, 그 근본적 원인은 경제 외부에 있다.  이번 바이러스로 말미암은 황폐화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가장 기본적 특성 때문인데 그 어떤 경제학자도 이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 높은 수준의 국제적 연결성 그리고 대부분 인간의 노동시장에 대한 의존. 이것들은 고정환율과 단체교섭이 기본이었던 케인즈주의 특성들이 아니다.  이것들은 자본주의 특성들이다.

 

두번째, 이 위기의 공간적 특성은 자본주의의 전형적 위기와 다르다. 슈퍼부자가 피신하는 벙커와 섬에 상관없이 이 유행병은 경제적 지형에 근거해서 차별하지 않는다. 이 유행병은  “지식에 기초한 노동(knowledge-based work)”이 궁극적으로 얼마나 온라인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 명확해짐에 따라 도심(uburn centres)의 평가절하(devaluing)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바이러스가 서로 다른 시간에 서로 다른 장소에 도달했음에도 지난 몇 주에 걸쳐 드러난 두드러진 점은 인간 행동, 관심 그리고 공포의 공통성이다. 

 

사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의 확산은 그동안 우리가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글로벌 대중(global public)을 탄생시켰다. 9.11 사건 당시 세계에 퍼져있던 Nokia 모발폰이 동시에 울리면서 즉각 텔레비전을 볼 것을 권유한 것이 한 예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는 다른 곳에서 발생하는 구경거리가 아니다: 지금 당장 당신의 창문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모든 경험이 포착되고 공유되는 소셜 미디어의 시대에 딱 부합된다.

 

이 공통된 경험의 강렬함(intensity)은 현재 이 위기가 불황이라기보다는 전쟁(war)으로 느껴지게 하는 냉혹한 이유다. 결국에 정부 정책입안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가로 평가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의료서비스에 과부하가 걸리면서 살릴 수 있는 사람을 못 살리면서 현대 문명화의 표면하에 가려져 있는 끔찍한 관측이 등장할 것이다. 이 직접적이며 본능적이고 치명적인 위협은 지금 이 순간을  2008년 혹은 1970년대처럼 느끼게 하기보다는 우리의 집단적 상상력에 존재하는 다른 상징적 위기처럼 느끼게 한다 - 바로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역자 주). 삶과 죽음의 문제는 정책 수립에 있어 지금껏 보아왔던 경제 정책과 달리 훨씬 급진적 정책을 요구한다. 이는 Rishi Sunak(영국 재무상: 역자 주)이 만약 기업이 직원들의 고용을 유지할 경우 정부가 노동자 급여의 80%를 지원할 것이라는 깜짝 놀랄 발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생각지 못한 조치들이 갑자기 가능해졌다 - 그리고 이런 가능성에 대한 감각은 아마도 다시는 쉬이 방해받지 않을 것이다.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를 자본주의의 위기로 보기보다는 새로운 경제와 지성의 시작을 알리는 세계 창조의 사건(world-making event)으로 이해하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1775년에 Lisbon은 지진과 쓰나미 때문에 75,000명이 죽고 대부분 파괴되었었다. 경제는 완전히 초토화되었지만, 자체 생산업자들을 육성하면서 재건되었다. 영국 수출품에 대한 의존을 낮추면서 Lisbon의 경제는 결국 다시 활성화되었다.

 

지진은 또한 상당한 철학적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특히 볼테르(Voltaire)와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가 그러했다. 칸트는 발생 지역의 뉴스를 수집하면서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에 대해 초기 지진학적 이론을 수립했다. 프랑스 혁명의 전조로서 이 지진은 모든 인류에게 의미를 가진 사건으로 다가갔다: 그와 같은 규모의 파괴는 과학적 사고의 권위를 높임과 동시에 신학적 가정들을 흔들었다. 만약 신이 인류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면, 칸트는 그의 후기 저술을 통해 결론짓는다, 그것은 세속적 동인(reason)의 실행에 기초한 “보편적 시민사회(universal civic society)”를 통해 개인적이며 집단적 자치권(autonomy)을 획득한 우리를 위한 것이다. 

 

2020년의 의미를 완벽히 이해하는 데에는 수 년 혹은 수십 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명백히 글로벌 위기로서 이 위기는 글로벌 전환점이 될 것이다. 엄청난 감정적, 육체적 그리고 금전적 고통이 우리의 가까운 미래에 펼쳐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 규모의 위기는 우리 사회적 경제적 삶의 많은 근본이 재창조되기 전까지는 결코 진정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필자 William Davies는 영국 출신의 사회학자이자 정치경제학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