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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위기의 생산경제(The Overstretched Productive Economy)
우리가 주목했듯이 지난 40여 년에 걸쳐 만들어진 시간상으로, 공간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긴장된(overwrought) 생산시스템은 이미 심판의 시간을 지났다. 1995년 이후, 10여 년간 서구의 공급 체인은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중국으로 연결되었는데, 서구 시장의 포화와 중국의 임금 인상을 포함한 여러 요인 때문에 2008년 금융위기 이전부터 이미 서구의 경제 성장은 더뎌진 상태였다. 게다가 2008년 이후 궁핍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자유무역협정(Free Trade Agreement :FTA) - 실체는 노동, 환경 그리고 다른 규제에 제약받지 않는 외국 투자의 수용을 위한 협정 - 이 서구에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자유무역협정이 서구 노동자의 임금과 고용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주장이 많이 있었는데, 진실은 자유무역협정은 쌍방, 특히 서구 블루 콜라 노동자들에게, 모두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이런 불만스러운 상황은 좌파에 의해 문제 제기가 되어야 함에도 수 십 년에 걸친 신자유주의 우파의 좌파에 대한 비방과 전통적 좌파 정당의 부분적 우경화로 때문에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대신, 우파 포퓰리즘은 이 문제들을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이 고통과 결과적 분열을 Brexit와 무역전쟁 같은 교묘한 술수를 동원해서 선거에 이용했다. 그 결과 이미 허약해진 전 지구적 생산 체계가 더욱 불안정해졌다.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은 심판(reckoning)을 향한 여정을 단지 촉진하고 있을 뿐이다.
4. 위기관리의 위기(The Crisis of Crisis Management)
이 끔찍한 칵테일의 마지막 첨가물은 자본주의의 위기를 역사적으로 관리해왔던 미캐니즘과 관련 있다 - 국가와 정치. 몇 십 년에 걸친 신자유주의의 득세는 서구 사회에서 국가와 더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 역량을 심각하게 훼손하였기에 이제 우리는 현재 위기에 국가가 잘 대처를 할 수 있을지, 단기적으로 이 팬데믹을 통제하고 종료시킬 수 있을지 그리고 장기적으로 필요한 새로운 경제 방향 설정을 할 수 있을 지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이번 팬데믹에 대한 서구의 느려 터진 반응을 보면 국가에 대한 우리의 불신이 맞는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중국 대처의 잘못된 점을 찾기 위해 몇 달을 소비한 서구는 오히려 베이징보다 못한 대처를 보여주고 있다. 2019년 코로나바이러스 질병(Covid-19)에 대한 WHO-중국의 리포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이전까지 알려진 바 없는 바이러스에 직면해서, 중국은 역사상 아마 가장 용감하고, 신속하고 공격적인 질병 통제 노력을 전개했다. 이 통제 노력의 초기 핵심적 전략은 체온 측정의 일반화, 마스크 쓰기 그리고 손 씻기에 대한 국가적 장려였다. 그러나 바이러스가 확산하고 질병에 대한 정보가 축적됨에 따라 정확한 대처의 실행을 위해 과학과 위험도에 기반을 둔 접근이 도입되었다. 이에 따라 각 지역, 지역의 감당 능력 그리고 해당 지역의 전염 특성을 고려해서 통제 조치들이 조정되었다.
서구와의 차이가 이보다 극명할 수 없을 것이다. 서구의 대표적 두 국가 미국과 영국을 보라. 지난 40년에 걸친 신자유주의 때문에 이들 국가는 국가의 능력(역할)이 축소되었으며, 필수적 제도들은 철폐되었고 훌륭한 인력들은 다 떠났다. 두 나라 모두 정치 계급은 신뢰를 잃었으며 정치 시스템은 누가 봐도 알 수있는 허풍꾼들(charlantans)에게 가장 높은 정치적 권력을 맡길 정도로 엉망이 되었다. 시스템을 이처럼 만들어 놓고 지금 진행되고 있는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정치적 의지와 국가 능력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이번 팬데믹은 유로존도 시험무대에 올려놓았다)

Boris Johnson or Donald Trump: Who's got it worse?
미국에서는 민간의료체계와 더불어 보험, 비용 그리고 다른 상업적 매개변수(parameters) 때문에 테스트가 무계획적이고 국지적으로 시행되면서 팬데믹의 진정한 실체는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10여년이 넘는 궁핍 정책으로 예정된 수술 일정들을 연기하지 않고서는 매년 발생하는 독감마저도 국립의료서비스(NHS)가 제대로 대처할 수 없는 상태인 영국 정부는 이를 인지하고 처음부터 자신들은 ‘집단면역(herd immunity)’를 추구한다고 주장했다. 이건 집단 학살을 각오한 국가 파산 선고와 다를 바 없다. 팬데믹으로 말미암아 가난한 자들이 직격탄을 맞을 것을 고려할 때, 바이러스가 퍼지게 버려둔 후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고 오직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약한 놈은 내버려 둬라(let the devil take the hindmost)’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서구 전반에 걸쳐 민간 미디어와 소셜 미디어에 지배된 정보 시스템은 잘못된 그리고 허위 정보를 범람케 함으로써 이 문제들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더 나아가, 이 국가 차원의 무능력함은 국가 간 공조를 어렵게 하는 국가 간 경쟁의식과 긴장 때문에 어려움이 더 가중된다. 21세기를 특징짓는 이 국가 간 경쟁의식은 물론 세계 경제의 무게 중심이 서구로부터 옮겨갔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물론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서구의 느린 경제 성장과 중국 그리고 일정 국가의 이 신자유주의로부터 이탈 혹은 적응 능력으로 말미암아 발생했다. 서구는 이 중심 이동에 오래전부터 못되게 대응해왔다: 경쟁 국과 ‘졸부(upstarts)’에 대한 군사적 경제적 전쟁이 그것이다. 포퓰리즘의 대두는 이 상황을 더욱 나쁘게 만들 뿐이었다.
2008년 이후 국제적 친목 수준은 항상 과장되었으며 G20의 노력은 이 위기를 완화하는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고 ‘미국 우선(America First)’과 Brexit는 불협화음의 새로운 단계를 보여 주었다. Trump의 개발 백신에 대한 독점적 사용권한에 대한 보상으로 제약유통회사에 ‘큰돈(large sums)’을 제안했다는 사실은 이 위기의 와중에 서방 국가가 취할 수 있는 새로운 최악의 행동이다. 심지어 서구 정책 입안자들과 미디어는 중국의 성공으로부터 배우는 것에도 거부감을 가지고 있으며 성공적 치료제에 대한 의학적 진전에 대해서도 아무런 정보의 공유가 되지 않는 채 각 국가는 각자 살길을 찾는 분위기다. 그러는 한편 나쁜 국가로 서구에 찍힌 국가, 가령 베네수엘라, 는 국제적 제재 때문에 치료를 위한 약품도 사지 못하는 상황이다.
만약,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세계 경제가 건강하고 국가 간 공조가 잘 이루어지고 있을 때 발생했다면 물론 여전히 커다란 피해를 주었겠지만, 그 피해는 시간상으로 공간적으로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팬데믹은 지난 수십 년간의 신자유주의 때문에 세계 경제와 자본주의 시스템이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상태에서 찾아왔다. 팬데믹의 여파는 이 약해진 자본주의 시스템과 불가분 얽힌 상태에서 존속할 것이다. 이런 상황이 좌파에게 커다란 가능성을 가져다주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는 다음번으로 넘겨야 할 것이다(That, however, we must leave to another time).
역자 요약 및 맺음말
저자 Radhika Desai는 지난 40여 년에 걸쳐 서구를 지배한 신자유주의 독트린과 그 독트린으로부터 기반을 두고 구체적으로 우리 국가, 사회 그리고 경제를 지배했던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 글로벌 자본주의와 금융자본주의로 대표될 수 있다 - 가 누적된 모순 때문에 이미 숨을 헐떡이는 상황에서 팬데믹이라는 메가톤급 펀치를 맞은 상황으로 비유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그 펀치가 현재의 서구 자본주의와 국가에 어떤 피해와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했다.
1970년대 케인즈주의하에서 서구 자본주의가 소비와 투자에 대한 수요의 하락을 경험함에 따라 서구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를 선택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갈수록 더뎌지는 경제 성장과 자본가들의 낮은 이익률 제고를 위해 서구는 2008년 세계적 금융위기 이후 집중적으로 통화정책을 통해 경기 부양을 시도하게 된다. 그 결과 금리 인하라는 양적 완화를 전가의 보도처럼 필요할 때마다 꺼내 썼지만, 이번 팬데믹은 20세기 대공황과 비견되면서 이 침체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돈을 풀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는데 문제는 이제 더는 내릴 금리가 없는 상황에 봉착했다는 것이다. 이에 저자는 ‘바보야, 문제는 재정정책이야’라고 외치는 듯, 소비와 투자 수요를 증대시키기 위한 국가의 개입을 역설한다. 이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서구 국가들은 딜레마에 빠진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국가가 개입해야 하는 상황인데 그러면 시장이 알아서 최적화된 상태로 우리를 인도한다는 신자유주의적 믿음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번 경우는 어쩔 수 없는 비상사태이므로 시장(market) 대신 국가가 개입한다고 어설프게 변명하면서 뒤늦게 팬데믹 대처에 서구 정부는 어기적어기적 나서게 된다. 하지만 지난 40년 간 가장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신자유주의 서구 정부는 이 대처 과정에서 처음부터 그리고 지금까지도 허둥지둥하고 있다. 초기엔 일머리를 못 찾았고 이후 국민 수백, 수천 명이 사망하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그때는 대처할 역량이 부족함을 발견한다. 40년에 걸친 신자유주의 때문에 의료시스템과 인력, 장비 모든 것들이 팬데믹이라는 거대 침입군에 저항하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한국처럼 국가의 역할이 아직 살아있고 유행병과 같은 외부 시련에 대처한 경험을 가지지 못한 무늬만 그리고 덩치만 선진국인 서구의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반면 여담으로 똑같이 경험 없기는 마찬가지인 뉴질랜드 정부는 겁먹은 듯 한국이나 대만과 같이 경제와 국민 생활을 유지하면서 바이러스를 통제하겠다는 두 마리 토끼 전략은 처음부터 아예 고려하지 않은 채 - 과문해서인지 모르지만 코로나바이러스 관련 뉴질랜드 뉴스에서 한국이나 대만의 사례가 언급된 것을 본 적이 없다. - 곧바로 빈대를 ‘완벽하게’ 잡기 위한 초가삼간 소각 전략을 택한다. 전면적 국가 봉쇄와 전 국민 이동금지라는 처방을 내린 것이다. 이 초가삼간 소각 전략에 대한 평가는 팬데믹 종료 이후, 사망자 수 집계가 아닌 집 재건에 드는 비용이 나올 시점에서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아뭏든 한국의 경찰은 시민을 위한 방역에 동원되지만, 뉴질랜드 경찰은 시민의 감시에 동원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번 팬데믹 대처에서 제대로 된 의욕도 능력도 보여주지 못한 서구는 이 팬데믹이 전 세계적 현상이기에 당연히 국가 간 공조를 통해 글로벌 대처를 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 채 (혹은 못한 채?) - 내가 아는 한 이 필요성을 역설한 국가는 단 하나다. 대한민국. 저번 BBC와의 인터뷰에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G20 정상 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빨리 문을 걸어 잠그는 국가가 대처를 잘하는 국가로 인정받는 것처럼 오히려 자국의 문을 걸어 잠그기 바빴다. 그리고는 자국의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다른 국가들에 대한 배려 없이 행동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서구 국가들끼리 마스크 확보를 놓고 서로 다투는 사례도 미디어에 등장한다.
이는 세계 경제의 축이 지난 40년의 신자유주의 실행 때문에 현저하게 쇠약해진 서구로부터 그 사이 부상한 중국과 같은 신흥 국가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축의 이동을 이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막을 힘이 없는 자신들의 초라한 현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빈털터리 양반이 이젠 거상이 된 이전 노비 출신 대하듯 자존심만 세우는 서구의 태도다. 연대해서 팬데믹에 대처해도 시원치 않을 마당에 지리멸렬해진 서구는 이미 글로벌화된 생산, 공급, 소비 체인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치면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글로벌 특성을 위협하게 된다.
팬데믹이 그동안 휴업 상태였던 서구 신자유주의 국가의 국가 기능을 억지로 끌어내었지만, 이 국가의 기능이 팬데믹으로부터 일단 노동자를 포함한 자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고 이후 재정지출을 통해 국민 경제를 재건하는 데 온전히 활용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매우 naive하다. 지금 이 팬데믹 상황을 자본가들은 돈을 벌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로 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인 트럼프가 독일 제약회사가 개발 노력 중인 백신을 선도입매하여 미국이 독점적으로 사용하겠다는 시도다. 더 나아가 이 미국의 독점적 사용권이 이 전 미국민에게 대한 보편적 백신 혜택으로 이어질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지금 미국의 민간의료시스템을 보면 보험 비가입자가 백신 혜택을 볼 가능성은 지극히 불투명하게 보인다.
저자의 마지막 말은 나의 마음을 편치 않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는 다음번으로 넘겨야 할 것이다 (That, however, we must leave to another time).” 많은 질문이 떠오른다. 팬데믹으로 서구의 신자유주의 자본주의가 그로기 상태로 간다 해도 우리는 혹은 좌파는 post-neoliberal capitalism을 예비하고 있는가? 어떤 형식의 경제 시스템이 도입되어야 하며 그리고 어떤 형식으로 경제, 사회 그리고 국가의 관계가 정의되어야 할까? 붕괴에 대한 바람과 열망만 가득하고 만약 그때가 왔을 때 대안의 부재로 또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것은 아닐까?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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