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내드립니다. daum 블로그의 지속적 편집 에러로 교정/편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교열이 되었고 보다 나은 가시성/가독성을 가진 '네이버 포스트'(링크) 를 권장합니다.
역자 머리말
지난 몇 달 코로나바이러스 관련 이슈들로 블로그가 채워지고 있다. 이전부터 사회학적 주제에 대해 관심이 있던 차에 이번 팬데믹은 나로 하여금 사회학의 주요 주제라 할 수 있는 계급,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그리고 대안적 사회주의 등의 개념에 대해 정면으로 부딪치라고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독서와 사고에서 긴 호흡이 잘 안된다는 것을 핑계로 상대적으로 쉽게 소화하기 쉬운 짧은 article 혹은 essay 형식의 글만을 선별 섭렵하는 경향을 보인다. 깊이가 없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는 건강에 유익한 음식보다는 입이 먼저 찾는 인스턴트 식품처럼 피상적인 지식에 불과하며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고정 관념을 강화시켜줄 논리를 찾는 것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아뭏든 이런 마음을 한편에 간직하면서도 better than nothing의 마음으로 21세기 가장 많이 쓰이고 있을지 모르는 단어처럼 스터디의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을 위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읽고 쓰기를 계속할 계획이다.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유튜브 등의 온라인 매체를 통해 한국과 다른 나라의 팬데믹 소식을 거의 매일 체크하다시피 한다. 많은 매체가 공통으로 중국, 대만 그리고 한국과 같은 동아시아 국가 - 일본 제외 - 가 선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며 그 선전의 배경에 주목하고 있다. 그 배경 중 하나로 아시아 국가들의 강한 공동체 지향성을 지적한다. 아시안 국가의 공동체 지향성을 서구인들이 얘기할 때는 긍정적 함의와 더불어 부정적 함의(orientalism)가 같이 있음을 느낀다. 부정적 함의에는 아시안 국가들이 서구와 같은 개인주의에 기반을 둔 리버럴리즘이라는 역사적 과정을 아직 거치지 못했다는 뉘앙스가 포함될 것이다.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아시안 국가의 공동체 지향성이 다름 아닌 내가 지금 대안 시리즈를 통해 찾고자 하는 팬데믹 이후 사회에서 구현되기를 바라는 사회주의적 가치와 일맥상통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주의적 가치는 사회주의 정치/경제 제도 혹은 이데올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쉽게 말해 물질만능주의로 상징되는 현재 자본주의 국가의 경제 우선주의에서 사람과 사회를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사회 일반을 의미한다. 이런 기풍을 가진 사회의 실현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정치적 비전과 실천 과정이 필요하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이 현재 진행 중인 대안 시리즈의 목표이기도 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한국의 공동체 지향성은 주관적 관찰과 경험에서도 분명 존재하는 듯하다. 대표적인 예가 단어 ‘우리’ 사용의 보편화일 것이다. 단어 ‘우리’로 상징되는 강한 공동체 지향성은 서구인들의 시각에서는 개인 자유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이분법적 접근을 하게 한다. 이번 팬데믹 대처에서 한국인이 보여준 정부의 목표에 대한 자발적 동참도 전통적 권위주의에 길든 순종적 태도로 폄하하기도 한다. 과거 이런 지적은 일정 부분 진실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2020년 현재 한국 국민의 공동체 지향성은 이런 20세기 문법으로는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한반도에서 농경민족으로 권위주의적 왕정에서 수천 년을 같은 장소에서 살아온 한민족은 지배계급의 패권적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가 남이가’식의 집단주의 사고방식에 길들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4.19와 광주민주화운동을 거쳐 2017년의 촛불 혁명은 이 전통적으로 내려온 한국인의 강한 공동체 지향성을 다른 차원으로 끌어 올렸다고 본다. 그 이전까지 아시안 국가 특유의 권위주의에 순종하는 공동체 지향성으로부터 주권재민의 인식하에 내가 사는 ‘사회’공동체는 내가 원하는 공동체로 만들겠다는 공동체 지향성으로 승화하였다. 즉 이미 정해진 틀 안에서 공동체 지향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틀 자체를 스스로 마련하려는 공동체 지향성이다.
이런 한국의 공동체 지향성은 내가 보기에 서구의 그것과 또 일본의 그것과도 다르다. 서구의 공동체 지향성은 개인주의를 기반으로 그 개인주의의 해로운 날카로움을 유화시키기 위한 공동체 지향성이다. 이번 팬데믹 대처 과정에서 소위 의료인들과 같은 ‘필수적 노동자(essential workers)’의 노고에 감사하는 표현으로 시민이 집단으로 박수치는 모습을 미디어에서 보여주는데 내가 보기에 이는 이 공동체 의식을 인위적으로 유지하려는 제스처로 보인다. 하나 다시 말하지만, 서구의 공동체 지향성은 개인주의라는 기반 위에 올려진 건축물이다. 따라서 최근 한국의 의심자 추적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국가의 국민 사생활 정보의 습득은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명목하에 개인의 자유를 침범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서구에서는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서구의 인식은 이전 한국 그리고 현재의 중국이라면 받아들일 만한 지적이다. 두 국가 모두 권위주의 사회였고 사회이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의 공동체 지향성은 다른 성격을 가진다. 주관적 관찰에 의하면 일본의 공동체 지향성은 강요된 지향성이다. 몇백 년간 이루어진 막부정치 결과 공동체에 대한 순종은 생존을 위한 필수 덕목이다. 문제는 공동체와 국가를 한 몸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한국은 내가 그리고 우리가 살 ‘공동체’를 위해 ‘국가’를 바꿀 수 있다는 사고를 할 수 있고 이 사고의 역사적 발현이 바로 촛불 혁명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사회공동체와 국가를 분리할 줄 모른다. 이게 지금 트럼프와 더불어 희대의 양아치 지도자 아베가 여전히 높은 지지율 - 이전보다 조금 떨어졌지만 - 을 기록하는 이유다. 일본은 이 숨 막히는 출구 없는 국가와 사회의 일체화 상황에서 일본인 특유의 개인주의 행동양식을 발전시켰다. 즉 주어진 공동체의 틀을 철저히 지키되 그 한도 내에서 아주 개인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서구가 개인주의에 기반을 둔 공동체라고 한다면 일본은 공동체에 기반을 둔 개인주의 사회인 것이다. 반면 한국은 서구 리버럴리즘의 개인주의적 인권(individualistic human right)이 아닌 ‘공동체적 인권(communal human right)’ - 유사 개념이 학계에 이미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 에 기반을 둔 사회공동체가 되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의 공동체적 인권에 기반을 둔 사회공동체가 어쩌면 우리가 팬데믹을 계기로 새롭게 건설할 사회주의적 가치를 담보하는 사회와 유사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물론 한국은 자본주의 국가이고 어저께도 38명의 노동자가 노동 현장에서 화재로 사망하는 등 ‘돈’이 노동자의 안전보다 여전히 우위에 있는 사회다. 그럼에도 많은 다른 아시아 국가처럼 권위주의적 톱다운 공동체 지향성이 아닌 바텀업 민주적 공동체 지향성을 가지고 있으며 서구처럼 ‘나 개인의 자유가 절대로 침범되지 않는 조건’에서의 공동체 지향성이 아니라 ‘뭣이 중 헌디’를 명확히 인식하면서 ‘자발적으로 그리고 이타적으로’ 개인이 공동체 지향성에 참여함을 이번 팬데믹을 통해 보여준 한국 사회는 팬데믹 이후보다 나은 사회 건설에 다른 나라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상당히 큰 머리가 되었다. 아랫글은 미국의 사회주의 온/오프라인 미디어 Left Voice에 실린 글이다. 모든 사람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포스트 팬데믹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집단이 모여 정당으로 상징되는 정치 세력화될 필요가 있고 이 정당은 대중의 사회 운동과 병행하여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정당은 과연 어떤 정책을 가진 정당이 되어야 하는가는 이전부터 궁금했던 바라 흥미롭게 이 글을 번역해 보았다. 이 짧은 글 하나로 실제로 어떤 일이 이 정당들에 벌어졌는지 왜 그런 한계를 노정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할 수는 없지만, 대략의 윤곽이라고 그려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어떤 정당이 우리에게 필요할까? 5개 국제 사례 (What kind of Party Do We Need? Five International Examples)
Post on: April 26, 2020 Nathaniel Flakin William Lewis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서 새로운 정당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정당을 우리는 원하는가? 우리는 5개의 국제적 사례를 평가해본다: 녹색당(green party), 민주사회주의당(democratic socialist party), 신 개혁주의당(neo reformist party), 신 반자본가당(new anticapitalist party), 그리고 계급독립당(class-independence party).
버니 샌더스가 대선 경선을 포기하고 조 바이든 지지를 표명한 이후 새로운 제3 정당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져 왔다. 지난해 여론조사를 따르면 38%의 미국인은 제3의 정당을 원했으며 해시태그 #DemExit (민주당으로부터 탈출(Exit from the Democratic Party)을 의미하며 Damn Exit를 연상시킨다:역자 주)는 샌더스의 슈퍼 화요일 수치스러운 패배 이후 트렌드가 되었다. 그러나 세계는 이미 “새로운 좌파 정당”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들 중 일부는 노동자 계급과 피억압 계층에 진보를 가져왔지만, 그 외는 노동자 계급을 공격하는 부르주아를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Bernie Sanders
버니 샌더스 선거 운동에 열성적으로 참가한 미국 좌파는 기조를 바꾸고 있다. 사회주의 대안 세력은 “기업 자금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해서 우리의 운동에 반대하는 것이 아닌 우리와 함께 투쟁할 우리만의 정당”을 만들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Red Wedge 잡지에서 DSA (Democratic Socialist of America: 미국 민주 사회주의자) 회원인 Adam Turl과 Saman Sepehri는 “노동자 계급의 단결과 정치적 자주성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모든 사회주의자들에게 개방된” 정당을 요구한다. Turl과 Sepehri는 더 나아가 미국 내 좌파 그룹 리스트를 발표하면서 “민주당을 반대하는” 모든 독립적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이 정당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난 몇 달 민주당 유세활동을 했기에 독립 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중도좌파의 의지가 과연 얼마나 강한지 지켜볼 일이다.
위 두 사례는 갈수록 커지는 조직적 지지 현상이지만 새로운 정당은 의심할 여지 없이 젊은 사회주의자와 양당 체제에 절망감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관심을 끌고 있다. 그런데 어떤 종류의 새로운 정당인가? 국제적 사례를 살펴봄으로써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하자.
- 녹색당(Green Party)
많은 샌더스 지지자들은 우익 민주당에 투표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를 지지하는가? 일부는 녹색당 후보인 Howie Hawkins를 고려한다. 심지어 미국 민주 사회주의자들에게 그의 지지를 호소하는 탄원도 하고 있다. 그럼 과연 녹색당이 부패한 민주당 정치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1980년대에 사회운동의 제도권 진입의 방편으로 전 세계적으로 많은 녹색당이 등장했다. 환경보호주의자, 평화주의자 그리고 다른 활동가들이 녹색당을 통해 의회에 진출했다.
지난 30년이 넘는 기간 녹색당은 정부 진출에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원칙을 실현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반대다: 독일에서 사회민주당 연정에 참여한 녹색당은 독일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복지 예산 삭감에 동참했고 더 나아가 1945년 이후 처음으로 1999년 NATO의 세르비아와의 전쟁에 해외 파병을 동의했다.
오스트리아에서 녹색당은 현 Sebastian Kurz의 우익 정부에 연정 파트너로 참여하고 있다. 독일 Baden-Württemberg주의 녹색당 주지사는 디젤자동차가 계속 생산되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녹색당의 생태학적 원칙을 배신했다. 녹색당은 몇 좋은 계획을 추구하고는 있지만, 종국에 그들의 계획은 항상 자본과 타협으로 끝나는데 이는 녹색당의 프로그램이 내재적으로 비윤리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에 저항하고 이를 철폐하려는 대신 자본주의의 “윤리적” 운영 방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녹색당은 권력의 주변조차 가본 적이 없으나 자본주의를 더 “사회적” 혹은 “유지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는 프로그램을 유지하고 있다. 심지어 당의 중심을 “생태적 사회주의(ecological socialism)”로 전환하는 2016년 녹색당 플랫폼에도 여전히 시장 체제를 고수하고 있다: “사적 기업, 탈중앙화된 민주적 협동조합(cooperatives), 공적 기업 그리고 대체적 경제구조의 혼합에 기반을 둔 경제 시스템을 우리는 원한다.” 이 선언에서도 사유 재산과 개인 이익이 명백히 최우선임을 알 수 있다.
사회가 보다 민주적 시장경제를 창조할 수 있다는 녹색당의 생각은 이상에 불과하다. 사회의 부가 극소수의 슈퍼리치 손에 있는데 어떻게 경제 시스템이 민주적일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들을 보호하려는 국가와 충돌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슈퍼리치를 통제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생태 위기를 고려할 때 전 세계적 차원의 계획경제가 아니고는 지구 기후변화의 재앙으로부터 인류를 보호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녹색당이 선거에서 일정 성공을 거둔다 해도 유럽의 자매 정당과 같은 길을 가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전혀 없다. 설사 Howie Hawkins가 녹색당 내에서 명확히 좌파에 속한다 해도 이들은 따라가야 할 모델이 될 수 없다.
- 민주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당(Democratic Socialist/Social Democratic Party)
19세기 말 그리고 20세기 초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칼 막스의 사상에 영감을 받은 한 때 혁명적 조직이었다. 오늘날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들여다보면 Obi-Wan Kenobi(영화 스타워즈의 캐릭터: 역자 주)의 말이 떠오른다: “넌 이보다 더 비열한 기생충과 악당들의 소굴을 보지 못할 것이다.” 이 정당들의 국제기구는 한 때 이집트의 장기 독재자 호세 무바라크를 회원으로 인정했고 현재 트럼프의 지지를 받고 있는 베네주엘라의 “임시 대통령” 후안 과이도(2018년 대통령 선거 혼선으로 베네수엘라는 두 명의 대통령, 후안 과이도와 니콜라스 마두로가 있다:역자 주)도 인정하고 있다.
이들 정당은 자신을 “사회주의자” 혹은 “민주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세계를 둘러보면 2009-2012년의 금융위기 기간 그리스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은 신자유주의 궁핍 정책을 이들이 시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이들 정당 중 상당 수는 붕괴했다: 프랑스의 Parti Socialiste와 그리스의 PASOK는 이전의 대중 정당에서 이젠 껍데기만 남았다. 이 정당들이 모든 이를 기쁘게 하려고 타협한 결과 누구도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극단 중도(extreme center)의 위기.
사회민주주의의 쇠퇴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그들의 국제적 원칙을 배신하고 자본주의 국가에 충성을 선언할 때 이미 시작되었다. 그때 이후 이들은 기꺼이 자본의 이익을 위해 일해 왔다. 제2 인터내셔널의 부패와 배신을 생각하면 미국 민주사회주의자가 이전 자매 정당들과 결별을 선택한 것은 진보적이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Jacobin 잡지(이전 포스팅에서도 인용했던 미국 좌파 잡지:역자 주)의 Bhaskar Sunkara 같은 이들은 우리가 “1914년 SPD 이전” (독일의 사회민주당(Social Democratic Party)으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까지 사회주의 원칙을 고수했으나 전쟁 참여를 결정하면서 그 원칙이 무너졌다: 역자 주)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귀여운 작은 호랑이 새끼는 원하지만 450파운드의 고양이를 갖고 싶지는 않다고 하는 것과 같다. 1914년의 역사적 배신은 정확히 사회민주주의의 비일관성에서 야기된 것이다. 당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개혁과 혁명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시도했고 자본주의 국가에 충성하는 괴물 같은 관료조직이 노동자들의 운동을 집어삼키는 것을 허용했다. 이 역사적 경험은 왜 우리에게 개혁주의와 타협하지 않는 혁명적 정당이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선거에 승리를 거두어 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한 개혁의 실행을 목표로 하는 미국 사회 민주주의(social democratic) - 혹은 “민주적 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t)”- 정당은 유럽의 자매정당과 같은 모순에 직면할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는 지속적이고 치열한 경쟁에 처해 있으며 한 나라의 노동자에게 주어진 혜택은 다른 나라의 더 심해지는 경쟁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세계 각국의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행해야하는 압력에 직면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미국에서 어떻게 이와 같은 정당을 만들 수 있느냐는 질문은 각종 어려움과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노동자들은 민주당에 “동조(realign)”할 수 없다. 왜냐하면, 민주당은 본질에서 지배계급의 정당이기 때문이다. “Dirty break” 전략 - 장래의 결별을 준비하면서 당장은 민주당에서 활동하자는 생각 - 에 대한 모든 논의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좌파에게 가장 좋은 환경이 주어졌음에도 Jacobin(이 글의 출처인 Left Voice가 혁명적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면 이들은 사회민주주의 개혁을 지향하는 것으로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역자 주)과 다른 이들이 민주당으로부터 결별하지 못함에 따라 눈에 띄게 사라졌다.
이런 종류의 개혁 모델이 민주당의 대안이 될 수 없는 이유다.
- 신 개혁주의당(Neoreformist Party (Syriza, Podemos, etc))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신자유주의 개혁의 선봉장이 된 이후 젊은 세대들은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을 가지지 않은 채 성장했다. 오히려 반대다: 그들은 사회민주주의 정부가 그들에게 불안정한 직업, 등록금 빛 그리고 불안을 선사하는 것을 목격했다. 2010년에 그리스와 2011년 스페인에서는 이 고통에 저항(궁핍 정책에 대한)하여 광장을 점거하고 진정한 변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등장했다(이 시위에서 사용된 슬로건은 “그들은 더는 우리를 대표하지 않는다”).
이 시위를 뒷받침한 분노는 신개혁주의 정당인 그리스의 Syriza와 스페인의 Podemos으로의 투표로 이어졌다. Syriza는 오래된 “유럽 공산주의(스탈린식 개혁주의자)” 정당을 중심으로 좌파 그룹의 지지를 받으면서 “급진 좌파의 연합체”로 등장했다. 한편 Podemos는 몇 젊은 대학교수들이 TV 쇼의 도움으로 아무런 준비없이 등장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더 민주적이고 신자유주의로 타락해버린 낡은 개혁주의 정당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신 개혁주의 정당과 구 개혁주의 정당 간의 주요 차이점은 구 사회민주주의와 달리 이 신생 정당들은 대중 기반 비슷한 것을 전혀 가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선거 기구에서 사회를 보는 카리스마 있는 미디어 인물을 접할 뿐이었다.
Syriza 선거 운동 당시
Syriza는 2015년 초 권력을 잡았다. 극우파와 연정정부를 구성한 Syriza는 Troika (유럽위원회(EC), 유럽중앙은행(ECB) 그리고 IMF)에 의해 부과된 궁핍을 종식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이 정부라면 유럽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안으며 전 세계적으로 열성적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Syriza는 Troika의 조건 수용을 반대하는 그리스 국민의 압도적 투표 결과를 무시한 채 EU 지도부에서 요구하는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을 자발적으로 실행했다. 결과적으로 4년 뒤 보수파의 재집권을 자초했다.
Podemos는 지난해 카탈루냐 사람들의 자치권을 거부하는 제국주의적 스페인 정부에 참여했다. Podemos는 그 이후 스페인 시민의 대규모 봉기를 진압하는데 동참했으며 카탈루냐의 독립요구에 대한 스페인 정부의 폭력적 억압을 지지했다.
이 두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신 개혁주의는 구 개혁주의의 디지털 버전에 불과하며 정치적 대안이 될 수 없다.
- 신 반자본가당 (New Anticapitalist Party)
위 사례와 더불어 우리는 스페인의 옆 나라 프랑스를 들여다볼 수 있다. 200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당시, 27살의 집배원이었던 트로츠키주의자가 백만 표 이상을 획득했다. Olivier Besancenot(올리비에 브장스노)는 프랑스에서 가장 사랑받는 정치인으로 그의 조직인 혁명적 공산주의 동맹(Revolutionary Communist League:LCR)이 대중의 시선을 끄는데 일조했다. LCR은 몇천 명의 회원 밖에 없었지만 이후 몇백만 명이 되었으며 더욱 폭넓은 “반자본가(anticapitalist)” 프로젝트를 위해 트로츠키 유산을 포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결정했다.
Olivier Besancenot (올리비에 브장스노)
그 결과 탄생한 것이 2009년의 신 반자본가당(New Anticapitalist Party:NPA)이다. 만 명 가까이 이 새 정당에 참여했다. 실천가들로 이루어진 이 정당은 곧 국내 정치에서 무시 못할 세력으로 등장했지만, 프로그램 혹은 계급 측면에서 명확한 한계를 설정하지 못했다. NPA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당이 프랑스의 노쇠한 사회민주주의를 대체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NPA는 노동자가 정치권력을 잡기 위한 명확한 전략을 가지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많은 당원은 “좌파 정부”에 대해 개혁주의자들과 타협해야 했다.
이 전략의 부재 때문에 NPA는 시간이 흐르면서 영향력을 잃어갔다. 그럼에도 여전히 프랑스 정치 무대에서 진보 세력으로 남아 반 자본가 공장 노동자 필리프 푸투 (Phillippe Poutou)를 대통령 후보로 내기도 했다. 극우파 후보 마린 르펜이 포퓰리스트로 등장했을 때 푸투는 후보 토론회에서 시청자들에게 그녀가 백만장자로서 여느 브루주아 정치인들처럼 부패했다고 주지시켰다. NPA의 이런 혼재된 성적표를 받고 당내 트로츠키주의자들은 NPA의 혁명적 토대의 재구축을 지향하고 있다.
이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사회주의자들의 폭넓은 연합은 한편으로는 좋지만 “반자본주의”에 대한 명확지 않은 방향은 정치적 기반으로서 충분치 않다는 점이다. 새로운 사회주의 프로젝트는 단순히 이론적 반대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격파하기 위한 전략의 공감에 기초할 필요가 있다.
- 계급 독립에 기반을 둔 정당(Party Based on Class Independence)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혁명적 대안을 제공하는 데 실패한 새로운 4종류의 좌파 정당들을 보았다. 긍정적으로 이글을 맺기 위해 우리는 국제적으로 도드라진 한 예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아르헨티나의 노동자의 좌파전선(Workers Left Front(FIT).
FIT는 2009년에 설립되었으며 선거에서 120만의 표를 얻었다. 이 정당은 계급 독립 프로그램과 노동자 정부를 위한 투쟁에 기반을 둔 3개(지금은 4개)의 혁명적 사회주의자 조직의 연합체다. FIT는 모든 부르주아 정당 및 개혁주의 세력과 독립해서 존재한다.
FIT 출신의 상원의원은 노동자들보다 임금을 더 받지 않고 - 나머지는 파업 자금으로 쓰인다 - 경찰의 폭력에 반대하여 노동자들 투쟁의 최전선에 항상 선다. 후후이(Jujuy) 주 의원 쓰레기 수거 노동자 Alejandro Vilca처럼 FIT에서 노동자들은 가장 두드러진 대표자들이다.
Alejandro Vilca
FIT는 계급 독립에 대한 혁명적 사회주의 프로그램에 대중의 관심을 끄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미국에서 우리는 좌파와 노동자 운동의 경험에 기반을 두고 이런 세력을 창조할 방법들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노동자 계급에 기반을 둔 이 세력의 건축에 힘을 합쳐야 하며 이 세력은 착취자들의 모든 세력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노동자들과 피억압자의 투쟁을 지지하며; 개혁주의에 반대하여 개방적 혁명적 프로그램을 실행할 것이다.
Left Voice(좌파의 목소리)로서 우리는 노동자 계급의 새로운 정당을 향한 모든 움직임을 지지한다. 우리는 자본가 양당 체제를 타파하고 우리만의 정당을 만들 필요를 느끼는 미국 민주사회주의자들을 포함한 좌파의 모든 조직과 토론을 원한다. 이것은 팬데믹의 영향에 대항하기 위한 우리 계급 일부의 초기 투쟁과 더불어 민주당 내 샌더스 선거 운동의 몰락을 고려할 때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우리는 우리의 프로그램을 새로운 정당을 위한 운동에 참가하기 위한 사전 조건으로 만들 생각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혁명적 사회주의 프로그램을 지향하는데 왜냐하면 국제적 경험은 오직 이 프로그램만이 자본의 저항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세상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또다시 마스크 이야기, 그리고... (0) | 2020.05.07 |
---|---|
국가가 무너지는 자본주의를 구하려 한다 - 대안 시리즈 7 (0) | 2020.05.01 |
경제 계획은 시장이 무시한 필요를 충족시킨다 - 대안시리즈 5 (0) | 2020.04.28 |
팬데믹 이후 사회에 관한 역사의 교훈 - 대안 시리즈 4 (0) | 2020.04.27 |
팬데믹 이후 세계의 모습은? - 대안시리즈 3 (0) | 2020.04.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