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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머리말
Al Jazeera에 흥미로운 주제의 기고문이 올라와 번역과 더불어 내 의견을 첨부한다. 이전 포스트 (웍비자 노동자가 수상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서도 내 스탠스를 설명했는데 많이 리버럴 해졌지만 나는 소수 민족 이민자로서 내 정체성을 잊지 않고 있다. 아니 잊을 수가 없다. 며칠 전에도 내가 이민 올 때 태어나지도 않았을 파케하로 보이는 백인 청년들이 차로 지나가면서 조깅 중 인도에서 잠시 쉬던 나에게 창문을 내리고 낄낄대며 소리 지르며 지나갔다. 이런 경우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미들 핑거 혹은 너 돌았느냐 식의 제스처도 순간적으로 생각해 보곤 하지만 이내 의미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불쌍한 중생 혹은 길 잃은 양의 어리석고 치기 어린 행동으로 사태 정의를 하며 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 하지만, 이렇듯 에스닉 정체성은 아시안의 경우 현격한 외양의 차이로 저번 달에 이민 온 사람이나 증조할아버지 때 이민 온 4세대나 똑같이 이방인으로 취급받으며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자신이 이방인임을 주지 받는다.
이처럼 소수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은 많은 경우 반발적(reactionary) 성격을 지닌다. 그 이유는 위 나의 경험처럼 자신은 이민 온 국가의 한 사회구성원이라고 생각을 하려고 노력하는데 위에서처럼 소위 토착 주류 그룹이 ‘넌 우리가 아니야!’를 주기적으로 환기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당 부분 소수 민족 이민자의 정체성은 메인 에스닉 그룹에게 그 지분이 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은 소수 민족은 단일 그룹이 아니라는 점이다. 뉴질랜드 경우 작게 몇십 명에 불과한 소수민족 이민자 그룹부터 뉴질랜드 전체 인구의 각 5%에 가까운 비율을 차지하는 중국계와 인도계 이민자들도 이 소수민족에 속한다 (참고로 한국계는 0.75%다). 인도계 이민(희망)자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웍비자 노동자가 수상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 대해 사회구성원으로서 보편성이 모자란 소위 ‘생떼를 쓰는’ 글이라고 비판했었는데 그럼에도 그 서한을 지지하는 그룹들에게는 그 글의 메지지가 ‘노멀’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같은 이민자 처지이지만 이민자들 내부에서도 각 에스닉 그룹별로 견해 차이가 발견된다. 일부, 다수가 아니라면, 한국 교민들에게 중국이민자와 인도이민자들의 행동양식이 못마땅하게 비치는 것이 그 예다. 내가 보기엔 한국 교민들도 주류 사회에 어울리려는, 파케하입장에서는 동화하려는, 노력이 부족하지만 그런 한국교민들 눈에도 중국인들과 인도인들은 너무 자기네 공동체 중심으로 사회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같은 이민자이지만 일부 이민자 그룹 중 주류 사회에 동화(assimilation)까지는 아니어도 융화(integration), 아니 그것도 바라지 않고 융화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제스처도 없는 그룹이라면 그들의 에스닉 정체성은 같은 이민자 그룹 내에서도 공감 받기 힘들 것이다.
아랫글은 프랑스 언론인이자 인종차별 반대운동가인 Rokhaya Diallod가 최근 프랑스 정부의 코로나바이러스 관련 마스크 착용 의무화를 이슬람 여성의 부르카 착용금지와 연계시켜 프랑스 정부의 이중 잣대 혹은 위선성을 비판한 글이다.
Wikipedia를 따르면 그녀는 1978년생으로 세네갈 국적의 아버지와 잠비아 국적 어머니 사이에서 세네갈에서 태어나 11살이 되던 1989년 프랑스에 이민 온 1.5세대 이민자다. 인구 6,700만 명의 프랑스는 국가 차원에서 국민의 인종(race) 혹은 ethnicity에 대한 정보 수집을 금지하고 있는데 2008년 기준, 추정된 흑인 인구는 300~50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약 4~8%가 흑인이고 전체 인구 중 무슬림 인구는 7~9%로 알려졌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이전 기고 글 ‘프랑스 코로나바이러스 대처 실패는 수십 년에 걸친 궁핍 정책의 산물이다(France’s COVID-19 failures are the result of decades of austerity)’에는 전반적으로 동의하나 이번 글은 입장을 달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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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바이러스는 프랑스가 ‘부르카를 금지’한 진짜 이유를 드러냈다
(Coronaviris exposed the real reasons behind France’s ‘burqa ban’)
프랑스의 공공장소에서의 마스크 착용 의무화는 무슬림의 부르카 금지에 대해 중요한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by Rokhaya Diallod

프랑스 여성들이 록다운이 완화되면서 마스크를 착용한 채 쇼핑몰로 나왔다 (출처: Eric Gaillard/Reuters)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 와중에 프랑스는 패러독스에 직면했다: 프랑스 정부는 특정 공공장소에서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했지만, 수년간 이어져 온 무슬림의 전면가리개 (부르카:역자 주)는 여전히 금지하고 있다. 이는 워싱턴 포스트에서 지적한 것처럼 “만약 무슬림 여성이 파리 시내에 나가고 싶다면 그녀는 부르카를 벗고 대신 마스크를 쓰고 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5월 10일 프랑스 정부는 엄격한 록다운을 안전하게 완화하고자 공공장소에서의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하였다. 독일부터 우간다에 이르기까지 50개가 넘는 국가가 바이러스 확산을 억제하고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유사한 법률을 통과시켰다.
대부분 국가에서 마스크 의무 착용에 대한 논의가 그 효율성에 초점이 모인 반면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는 얼굴을 가지지 않고 산다(the Republic lives with its face covered)”고 자랑하던 프랑스의 이 결정은 국가가 프랑스 정체성과 가치를 정하는 방식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 정체성 관련하여 얼굴을 가리는 것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십여 년 전 니콜라스 사르코지 대통령 시절이었다. 차별을 감시하는 프랑스 대중 워치독 그룹인 HALDE는 이민자 여성이 프랑스에서 머물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참가해야 하는 프랑스어 수업 시간에 부르카 착용을 금지한 행정명령에 대해 부르카를 착용하는 것은 ‘여성의 복종(submission of women)”를 의미한다고 유권해석을 내렸다. 이 유권해석에 대해 워치독 그룹은 “부르카는 종교적 영역을 벗어난 여성의 복종을 의미하며 융화 과정과 관련 교훈을 주도하는 국가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유권해석은 이 종교적 의복이 단지 반 페미니스트일 뿐만 아니라 프랑스 문화에 이질적이라는 인식의 기반을 마련했다. 또 이슬람이 프랑스에 과연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로 번진 “프랑스의 가치 (republican value)”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켰다.
HALDE의 유권해석이 내려진 지 몇 달 후 전국에 걸쳐 무슬림 부르카 착용 금지에 대한 요구가 거세지면서 사로코지 대통령도 논의에 뛰어들었다.
국정연설에서 대통령은 일부 무슬림 여성이 착용하는 부르카는 “종교적 문제”가 아니라 “자유와 여성의 존엄성(liberty and women’s dignity)”의 문제라며 “부르카는 프랑스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선언했다.
사르코지의 이 선언은 또 다른 대중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한쪽에서는 프랑스 정체성으로부터 무슬림을 배제하기 위해 페미니즘과 세속적(secular) 가치를 무기화했다고 비난하는 한편 다른 한쪽에서는 프랑스의 핵심 자유적 가치 옹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편 부르카를 착용하는 프랑스의 몇 안 되는 여성 - 약 2천 명으로 추정된다:역자 주 - 은 이 “부르카” 논쟁에 참여하지 않은 반면 저명인사들 - 대부분 남성 - 은 열성적으로 그 어떤 여성도 본인이 원해서 부르카를 입지 않았기에 명백히 남성 억압의 희생자라고 주장했다. 성 억압으로부터 “그녀들을 구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몸과 의복에 대한 여성들의 견해를 들어보려도 하지 않은 채 이들은 여성의 권리와 프랑스의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부르카를 금지해야 한다고 국민을 설득했다.
그 결과 2010년 프랑스 상원은 공공장소에서 얼굴을 가리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2011년 3월 법안이 발효되기 몇 주 전 정부는 새로운 금지 범위를 발표함과 동시에 일부 문화적 정당화를 제공했다.
“얼굴을 가리는 것은 사회적 삶의 최소 요구를 위반하는 것이다”라고 발표문은 지적하면서 이어 “이는 또한 프랑스가 옹호하는 자유, 평등 그리고 인간 존엄성의 원칙에 어긋나는 배척과 열성(inferiority)의 상황으로 해당자를 몰아넣는다”라고 서술한다.
따라서 이 발표문은 사람이 공공장소에서 옷 입는 방식과 그 사람의 프랑스 사회 내 위치와의 관계(link)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프랑스 사람으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국가의 “공통 가치”와 “운명 공유”에 대한 지지 표명으로 공공장소에서 반드시 얼굴을 드러내야 한다.
바로 이 대목이 최근 프랑스 정부의 공공 장소에서의 마스크 착용을 의무시하는 결정에 의문을 제기케 하는 것이다. 무슬림의 부르카 착용 금지는 철회하지 않는 상태에서 마스크 착용을 의무시한 것은 “부르카” 금지 결정이 부르카 착용이 프랑스 삶의 방식과 공존할 수 없다는 주장과는 관계가 없고 프랑스 국가 정체성에 눈에 띄는 무슬림을 포함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라는 이들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것이다.
현재 수백만 명의 프랑스인이 얼굴을 가린 채 아무런 문제 없이 공공 생활에 참여하고 있음을 볼 때 프랑스 정부가 부르카를 금지한 것은 프랑스의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수민족의 문화적 표현을 용납하지 않는 동화를 원했기 때문임이 명확하다.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은 또 다른 여러 행동양식에 대한 프랑스의 위선적 태도를 드러냈다.
예를 들어, 2019년 무슬림 노동자들에 의한 파리 경찰본부 공격에 이어 내무장관은 잠재적 과격화 신호에 대한 논란이 되는 리스트를 의회에 제출했다. 긴 턱수염을 기르는 것과 같은 단순한 문화적 표현과 더불어 많은 프랑스인이 보통 행하는 볼키스를 무슬림이 하지 않는 것은 과격화의 징표가 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러나 현재 정부는 바이러스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볼키스를 적극 만류하고 있다. 물론 볼키스를 금지하는 것이 사회 내 삶의 요구 위반이라는 어떤 주장도 찾아볼 수 없다.
이번 팬데믹에 대응하기 위한 극단적 조치들은 부르카 착용과 다른 형식의 무슬림 문화적 종교적 표현들이 프랑스 삶의 방식에 전혀 위협을 제공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프랑스 국가는 배타적 국가 정체성 형성을 위한 국민 정서에서 “프랑스다움(being French)”과 연관된 문화적 징표(markers)를 단순하게 이용했다.
이제 코로나바이러스는 사람이 공공생활에 참여하고 얼굴을 보여주지 않거나 볼키스를 하지 않고도 “프랑스 사람(French)”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듯이 프랑스도 이제 무슬림을 대하는 방식도 다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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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의 독후감
주제가 흥미로와 번역했지만, 살짝 후회될 정도로 기고문 논리 전개가 억지스럽다. 그녀의 결론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똑같이 얼굴을 가리는 마스크와 부르카인데 전자는 프랑스의 핵심 가치를 전혀 손상하지 않지만, 부르카는 손상한다고 금지한 것은 프랑스 정부의 위선적 이중잣대로 본심은 문화적 다양성을 수용하려는 대신 구태의연한 동화(assimilation) 정책으로 회귀하려는 것이다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얼굴을 가린다는 겉모습을 제외하곤 마스크와 부르카는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 기원을 가진 물건이다. 부르카는 종교적 문화적 징표(marker)지만 마스크는 그런 문화적 성격- 굳이 주장한다면 의료문화라고 할 수 있겠지만, 종교적 그리고 ethnic 성격은 전혀 없다 - 과는 관계가 먼 보호장비일 뿐이다.
이와 관련 2010년 10월 프랑스 헌법재판소의 합헌 판정을 받아 이듬해 2011년부터 효력을 발동한 이 법안에는 이미 의료용 마스크는 얼굴을 가리는 용도에서 제외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따라서 마스크와 부르카를 연결지어 주장할 것이라면 그렇지 않아도 반이민 정책을 고수하던 사로크지 대통령 집권 당시에 하던지 그렇지 않고 지금 할 것이라면 법안 자체의 위선성을 논의해야 할 것이지 마치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식 아니면 불난 집 부채질 식으로 5월 20일 현재, 28,022명이 코로나바이러스로 사망하고 매일 백수십 명이 사망하는 현 프랑스의 시민으로서 제기해야 할 문제였는가 싶다.
부르카 논쟁은 따라서 이번 팬데믹의 마스크와 별도로 그간 누적되어 온 논쟁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법안 제정으로 영향을 받게 된 부르카와 니캅 착용 프랑스 거주 여성은 약 2천 명으로 추정된다. 먼저 부르카 외양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듯하다. 우리가 구분해야 할 이슬람 여성의 의복은 크게 3종류로 나눌 수 있다. 외양 차이가 뚜렷하므로 부연 설명이 필요 없다.
지금 기고문에서 문제를 삼고 있는 부르카(burqa)

부르카처럼 얼굴을 전부 가려 같이 착용금지가 되었지만 눈 부분은 온전히 노출된 니캅(niqab)

위 부르카와 니캅에 비해 서구 사회에 많이 노출되고 또 큰 문제 없이 수용되는 것처럼 보이는 히잡(hijab).

이민 정책에 좌우파 구분은 의미없다
정치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자본가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알려진 보수당 - 뉴질랜드는 National Party - 비해 노동자와 소수민족 이민자를 포함한 사회적 약자의 권익을 더욱 중히 여기는 것으로 알려진 좌파 정당 - 뉴질랜드는 Labour Party - 이 ‘이민정책(immigration policy)’에 있어 보다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을까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국가 내 사회적 약자라고 할 수 있는 소수민족 이민자에 대해 더 관대해 보이는 ‘이민자정책(immigrant policy)’을 펼치니까 이 소수민족 이민자들에게 유리한 이민 정책도 펼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다.
하지만 현 제신다 아던의 노동당은 2019년 4월 말 기준 약 55,700명의 순이민자(net migration) 수를 연간 2만~3만 명 수준으로 줄이는 정책을 지향하고 있다. 순 이민자는 뉴질랜드 시민권자를 포함 - 가령 해외 거주 뉴질랜드 시민권자의 뉴질랜드 영구 재입국 - 하는데 이들 숫자는 정부가 콘트롤할 수 없는 대상이므로 순 이민자 중 정부가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대상은 자연히 뉴질랜드 시민권자/영구영주권자가 아닌 외국인이 대상이 된다. 즉 뉴질랜드 영구 이주를 희망하는 외국인들에 대한 영주 허가를 제한함으로써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반이민까지는 아니어도 결코 친이민은 아닌 이민정책을 뉴질랜드 좌파 정당은 고수하고 있다.
이민자에게 자비로운 좌파 정당은 있어도 이민에 자비로운 좌파 정당은 없다. 다른 말로 이미 국가 내 사회구성원이 된 ‘이민자출신’ 유권자’에게 우호적인 좌파 정당은 있지만, 국외에 있던 국내에 이미 들어와 있던 상관없이 ‘이민희망자’ 외국인에게는 철저히 ‘국가적 이익’ 관점에서 접근한다. 모든 좌파 정당은 ‘민족주의적(nationalistic)’ 좌파 정당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국내’ 노동자 및 하층계급 유권자를 대변하기 때문에 신규 이민이 이들의 이익에 반하는 경기 상황에서는 이민 문호를 확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르카 착용금지 관련해서 프랑스 좌파 정당인 사회주의당(socialist party)도 마찬가지다. 2010년 하원 의회 법안 통과 표결 때 사회주의당 의원은 대부분 투표에 불참함으로써 법안 통과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중에서도 일부 사회주의당과 공산당 위원은 적극 부르카 착용 금지에 찬성하는 등 이들 좌파 정당에서도 의견이 엇갈림을 보여 주었다. 대다수 불참 사회주의당 의원들은 부르카 착용 금지를 일부 제한된 공공장소, 가령 정부 기관,에만 적용하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82%의 유권자가 지지하는 부르카 착용 금지 법안을 어떤 정당이 반대할 수 있겠는가?
뉴질랜드 무슬림의 의견은?
뉴질랜드에서 개인적으로 부르카나 니캅을 입은 여성을 본 적이 없다. 실제로 이 의상에 대해 뉴질랜드 사회적 차원에서 문제가 된 적이 없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럼에도 뉴질랜드 무슬림은 해외국가의 부르카 착용 금지에 대해 우려 섞인 의견을 개진한 바 있다. 아래는 뉴질랜드에 거주하며 히잡도 걸치지 않는 무슬림으로 자신을 소개한 이란 출신 여성의 의견과 웰링턴에 기반을 둔 무슬림 단체의 입장이다.
먼저 이란 출신 여성은 강제적으로 부르카 착용 금지를 하는 것은 강제적으로 부르카를 착용케 한 탈렌반이나 ISIS와 같은 조치로 의도의 반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면서 부르카를 착용한 여성은 남편이나 율법에 따라 강제적이 아닌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신의 외모를 성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세계에 집중하기 위해 착용함을 강조한다. 따라서 부르카를 두려워하는 솔직한 이유가 이슬람 근본주의(fundamentalism) 때문이라면 이를 없앨 수 있는 근본적 해결책은 무슬림의 다양한 신앙생활을 장려하는 것이며 이런 차원에서 무슬림 여성의 부르카 착용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결론짓는다.
웰링톤의 무슬림단체 Al-Ameen은 부르카나 니캅 착용이 반사회적, 퇴보적, 억압적 그리고 이슬람의 한 부분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한다. 이들을 따르면 부르카는 이슬람의 한 부분이며 오직 낯선 남성들 앞에서만 착용하는 것이며 지역에 따라 의무적일 수도 선택적일 수 있다고 서술한다. 억압적이라는 주장에 대해 이들은 위 이란 출신 여성과 마찬가지로 현대 사회의 여성 대상화(objectification)를 벗어나기 위한 자발적 결정이라며 출처를 확인할 수 없는 미국 여성의 인터뷰를 인용하며 반박한다. 부르카가 혐오감을 준다(intimidating)는 주장에 대해 tattoo나 노출 많은 옷이 더는 혐오감을 주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남성지배의 형식이 아니냐는 물음에 대해서는 위 이란 출신 여성과 마찬가지로 많은 여성이 자발적으로 착용한다고 반박하며 또 반사회적이지 않는냐는 질문에 대해선 여성끼리 있을 때는 착용하지 않는 것을 예로 들며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부르카를 입어도 사회공동체에 충분히 이바지할 수 있다며 그 예로 이슬람학자로 유명한 모하메드 아내 중 한 사람인 Aisha를 사례로 든다. 사회안전에 위협이 된다는 지적에 대해 오토바이 헬멧처럼 요구 시 얼굴을 노출할 수 있다며 문제 될 것 없다고 넘긴다. 그러면서 현대사회가 개인의 자유에 기초했음을 상기하면서 부르카 착용 금지는 이 핵심 가치에 반하는 것이며 나치의 유대인 차별과 같은 커다란 사회적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면서 위 이란 출신 여성과 마찬가지로 부르카를 강제적으로 착용하는 게 억압적(oppressive)이라고 한다면 강제적으로 입지 못하게 하는 것 역시 억압적이라고 끝을 맺는다.
내가 생각하는 이 논쟁의 본질
위 뉴질랜드 무슬림들의 주장에 여러 생각이 든다. 그 중 몇 개를 소개하면 우선 부르카를 착용하는 것이 여성의 자발적 결정이라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위 주장자들의 주장 근거에 대한 증빙이 없을 뿐더러 프랑스에서 법안 실행 전 무슬림 여성을 상대로 한 사전 세미나에서 많은 여성이 부르카 착용이 자발적이 아님을 증언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대 서구 사회 개인의 자유를 언급하며 의상 착용의 자유를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이슬람 복장의 착용을 강제화하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 경우 이슬람의 억압적 사례 국가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되는지 그리고 부르카를 입고도 사회에 이바지한 예로 모하메드의 아내 Aisha를 예로 들었는데 그녀가 모하메드의 3번째 아내였음과 이슬람에서는 여전히 일부다처제(polygamy)를 인정해서 한 남자가 4명의 여성을 아내로 받아들여도 되는데 이것도 여성의 자발적 의지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리고 이런 이슬람 제도하에서도 남녀평등이 실현될 수 있다고 믿는 건지 등등.
하지만 이런 세부 사항에 대한 반박이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나의 주 관심은 서구 주류 사회에서 소수 에스닉 그룹이라는 지위를 공유하는 이슬람 이민자 그룹이 어떻게 해야 그들의 입장을 보편성을 획득하면서 주류 사회 그리고 다른 소수 에스닉 그룹에게도, 내가 보기엔 무척 중요하다, 어필할 수 있는 가이다. 개인적으로도 부르카 착용에 관해 법률로 금지할 것까지 있나 하는 생각은 있지만, 이 복장의 착용이 일부 무슬림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식의 근본주의를 연상시키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무슬림들은 단순히 자신들을 향한 곱지 않은 시선을 서구 주류 사회의 위선적 혹은 패권적 태도에 기인했다고 성급하게 결론을 짓기보다는 무엇이 다른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에 대한 시선이 이토록 우호적이지 않은지에 대한 냉정한 자성을 먼저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는 다른 모든 에스닉 그룹에게도 해당한다. 저번 포스팅 ‘웍비자 노동자가 수상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통해서도 같은 입장을 피력했는데 자신이 보고 싶은 방식으로만 사태를 바라봐서는 소위 징징대거나 생떼를 쓰는 식의 주장밖에 안 돼 다른 사회구성원의 공감을 획득하기 힘들다.
기본적으로 같은 소수 민족 이민자로서 다른 소수민족의 어려움과 차별에 대해 공감을 하려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항상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주류 사회의 패권적 담론과 이데올로기이기에 부지불식 중에 이런 대세 담론과 이데올로기에 물들 수 있으며 또 역사적으로 지배 그룹은 피지배 그룹을 분할해서 통치(divide and rule)하는 전략을 취하기 때문에 소수 민족 이민자들 간 균열을 ‘이유 있게’ 용인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무슬림은 좀 더 그들 담론의 보편성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가령 부르카의 경우도 이것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처럼 기필코 사수해야 할 보루로 여길 필요가 있을까 싶다. 부르카는 이슬람 고유의 종교 관습이 아니며 이슬람 종교 탄생 이전부터 존재했던 문화를 이슬람이 도입한 경우다. 심지어 한국 조선 시대에도 ‘너울’이라는 이름의 부르카 형식의 모자가 있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과 ‘종교적 관습의 시대적 특성과 한계’를 쿨하게 인정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맞게 이슬람의 진리를 어떻게 전파하고 신앙생활을 할 것인가에 더욱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 이렇게 지엽적인 문제에 죽자사자 매달리는 것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것으로 나에겐 비친다.
물론 모든 종교가 본질상 도그마 성격이 있다. 특히 유일신을 그 특성으로 하는 종교들, 가령 기독교와 이슬람, 은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들 종교는 ‘개방성’을 반드시 유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 이외의 그리고 내 종교 이외의 모든 종교와 그 종교를 믿는 사람을 나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말로 나는 내 신이 유일한 신이라고 믿지만 다른 사람은 다른 신이 유일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세다. 이런 다원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세가 ‘근본주의’다. 우리가 보는 이기적 종교 행위는 모두 근본주의에서 출발한 것이다.
따라서 부르카 착용 금지가 우리에게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은 이 ‘근본주의’의 문제이지 개인의 자유나 사회공동체 가치 위반과 같은 피상적, 내가 보기엔, 문제가 아니다. 안면을 가리지 않는 인도 시크교도 남성의 터번(turban)도 유대교 남성의 키파(kippah)도 만약 이 종교적 징표(markers)가 이들 종교의 근본주의, 가령 유대교인 선민사상,를 직접 상징한다면 이 역시 논란이 될 것이다. 마치 나치의 하켄크로이츠처럼. 급격한 세계화로 다양한 인종, 문화 그리고 종교가 한 정치적 공동체 안에서 공존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런 세상에서 내 인종의 우월성을 고집한 결과 탄생한 것이 백인우월주의고 이 인종적 근본주의로 말미암아 작년 3월 15일 무슬림 51명이 뉴질랜드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와 유사하게 이슬람 근본주의와 연관된 폭력이 그동안 세계 곳곳에서 행해졌다.
머리말에서 썼듯이 소수 민족의 에스닉 정체성은 반발성을 가진다. 많은 경우 이슬람 근본주의도 서구 패권에 대한 반발적 요소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이고 이것은 이것이다. 한 사회 내 같은 구성원이 된 이상 ‘이것도 저것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해줘, 그렇지 않으면 이건 차별이야’라고 외치는 것은 희생자의식(victimhood)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며 이런 태도가 반복되면 징징대는 아이 떡하나 더 주는 식으로 웬만하면 그들의 요구를 수용해주나 내부적으로 이들을 ‘같은’ 사회구성원으로 여기는 것과는 요원해진다. 우리는 패권적 담론과 이데올로기를 식별하고 이에 저항할 줄 알되 한편으로는 궁극적으로 함께 만들어가는 사회에 대한 비젼도 공유하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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